강의12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축복” (성경7기)
자, 기도하십시다. “저희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참으로 절대적으로 조건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이유는 당신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이 만드신 사람들이 참으로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절대적 사랑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합니다. 절대적 사랑은 절대로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하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완전히 이원론이 자리 잡고 지배하는 이 죄의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절대적 사랑은 상대적 사랑에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기가 힘들며 실천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그것은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성령이 없이는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주님께서 그 절대적 사랑을 주셔서 우리가 참으로 원한다면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야곱이 장자권을 바라던 것처럼 그것을 우리가 바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자, 전 시간에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일에 대한 공부를 조금 시작했습니다. 제가 강의실에 들어오기 전에 조금 생각해봤습니다. ‘조금 지나서 이 첫 장면을 잘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좀 지나서 후반부부터 공부를 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여기서 야곱이 드디어 아버지께 나갑니다. 형 에서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맛있는 요리를 해드리고 축복을 받기 위하여 사냥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동안에 엄마가 야곱더러 네가 형인 것처럼 하고 들어가서 축복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께로 나아갔습니다. 27: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여러분, 첫머리부터 이삭은 이축복 받으러 온 아들이 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몰랐던 게 아닙니다. 알았다면 네가 누구냐라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뻔합니다. 눈은 잘 안보여도 두 아들의 목소리를 모르겠습니까? 훤히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듣기에는 이게 에서의 목소리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네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27:19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7:20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삭은 아들의 목소리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압니다. 뒤에 보면 나옵니다.
27: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러니까 아버지 이삭은 음성이 분명히 야곱의 음성인 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 때문에 이삭이 처음부터 속았다고 보는 것은 상당히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벌써 첫마디부터, 너는 누구냐라고 그랬잖습니까. 그러니까 아버지 이삭은 완전히 속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목소리는 하도 들어봐서 야곱인데 이 손은 다른 사람의 손이로다라고 한다면 말이 됩니까, 안됩니까. 말이 안되지요. 여기서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에 지금까지 딱 성경만 본다면, 이삭이 바보처럼 모르고 한 짓이 아닙니다. 깡그리 속은 것은, 절대로 속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읽으면 ‘속아서 에서한테 갈 축복이 야곱한테 갔다. 그래서 에서가 나가서 마구 울었다. 이삭은 할 수 없이 이제 상황이 다 끝난 것이다’라고 읽어버린다면 이게 말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자세히 읽어야 됩니다. 성경이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자고 이런 이야기를 써놓은 게 아닙니다. 성경은 한 줄 한 줄이 절대적 사랑과 상대적 사랑,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 모든 책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지는 것과 피조물이 각자가 자기 책임으로 지는 것, 이런 것들을 성경은 대조해서 써놓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맞춰봐도 확실하도록 써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공식대로만 확실하게 쓸 수가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거기에 뭐가 작용합니까? 사랑이 작용합니다. 인간적인 어떤 감정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뭔가 복잡한 것처럼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장면이 복잡한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아버지 이삭의, 인간 아버지로서, 에서에 대한 애정도 우리가 여기에 넣어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냥 기계처럼 쇼를 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는 아버지 이삭의 착찹하기 짝이 없는 심정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도 이미 야곱이 장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삭이 알기에도 하나님이 억지로, 강제로 야곱을 장자로 시키겠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나님이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도 야곱은 야곱대로 하나님 안에서 자유 의지를 발휘해본 사람입니다. 이삭도 그렇지요.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잘 배웠습니다. 자유로운 믿음 말입니다.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믿음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하나님한테 대들고 싶으면 대들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건 굉장한 믿음, 수준 높은 믿음입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라는 식의 쩔쩔 매는 믿음이 아닙니다. 굉장한 믿음을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이 말 한마디 속에 이삭의 착찹한 심정이 나타납니다. 이게 뭡니까? ‘내가 야곱을 축복하긴 해야 되는데, 야곱을 축복해야 되는 그러나 에서가 더 사랑스러운,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에서가 나중에 모든 일을 알고 나면 얼마나 답답해할까, 억울해할까. 그리고 아빠를 원망할 텐데..” 이삭의 마음이 착찹합니다. 이것은 온 집안이 박살이 나는 사건입니다. 그렇게 되면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들 것이고 야곱은 도망을 가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 뻔한 이야기입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라고 하는 이 한 마디 속에 저는 이삭의 고민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삭이 바보 같이 굴었던 게 아닙니다.
27: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왜 털이 있습니까? 엄마가 염소 가죽을 붙였습니다.
27: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 번역 잘못 되었습니다. 분별치 못하고라고 번역한 것은 완전히 선입견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한글KJV)27:23 이삭이 그를 분별하지 못하더라. 이는 그의 손이 그의 형 에서의 손같이 털이 있기 때문이더라. 그러므로 이삭이 그를 축복하더라.
분별하지 못하더라라는 말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어판 King James Version이 확실한 영어 번역입니다. 그런데 한글King James를 번역했던 사람들이 영어판King James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영어판King James를 한번 보겠습니다.
27:23 And he discerned him not, because his hands were hairy, as his brother Esau's hands: so he blessed him.
Discerned이 진짜 번역입니다. 아시겠어요? 이삭이 야곱을discern 하지 못했습니다. Discern이 무슨 뜻입니까? 분별하고 분석해서 이게 맞다, 아니다를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 여기 우리 한글말 성경대로 한다면, did not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he could not이어야 됩니다. did not은 무슨 뜻입니까? 안했다는 말입니다. 구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못했다가 아니라 안했다,가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안했습니다.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가 이번에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전에는 이것을 못했다라고 해석을 했었는데 무척 께름칙했었습니다. 그래서 좀 다르게 해석했었습니다. 그 해석 자체도 좀 께름칙했었습니다.
27:23 And he did not recognize him, because his hands were hairy like his brother Esau's hands; so he blessed him.
한글 성경의 번역대로 나온 못하더라는 결코 did not이 아닙니다. 못하더라는 he could not입니다. 혹은 he was not able to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대로 하면 구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시겠어요? 이게 핵심 key입니다. 이게 바로 비밀 열쇠입니다.
(NIV) 27:23 He did not recognize him, for his hands were hairy like those of his brother Esau; so he blessed him.
각 영어 성경에는 전부 다 He did not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he did not이지 he was not able to가 아닙니다. was not able to이나 could not 이라는 것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He did not은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자기 주관을 섞어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써놓은 대로 번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영어 성경을 전부 다 봐도He did not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He did not을 번역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머리 속에 있는 관념대로 could not으로 번역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런 번역이 상당히 많습니다. 내가 내 생각대로 이미 해석을 해가지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자기 해석을 번역하는 것이지 써진 것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잘못된 번역들이 더러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마3: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NKJ) 3:2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막10: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NKJ) 10:15 "Assuredly, I say to you, whoever does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will by no means enter it."
[눅18: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NKJ) 18:17 "Assuredly, I say to you, whoever does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will by no means enter it."
받들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면,이 맞는 해석입니다. 그 절대적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면 천국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지요. 그 진리를 그대로 써놨잖아요.
그래서 He did not입니다. 지금 제가 영어 성경을 다 보아도 한개도 could not, was not able to는 없습니다. 못하더라가 아닙니다. 못하더라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이번에 찌지직 성령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보세요. 이 성경 귀절 한 줄 깨닫는데도 몇년이 걸리는 겁니다. 이번에 제가 창세기를 세미나에 하겠다고 해서 깨달은 거예요.
그러니까 구별할 수 없었다,가 아니라 구별안했다는 말입니다. 구별 안했다는 말은, 목소리 가지고 구별 하지 않고 만져지는 대로 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만져보니까 에서의 손입니다. 털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따질 것 없이 야곱이라고치자라는 것이지 구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대목입니다.
능히 분별치 못하고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능히란 말은 아무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못하더라라는 말을 쓰려고 하니까 능히는 괜히 따라 들어온 말에 불과합니다. 왜 제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보시기에 야곱이 장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이삭도 기억하고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축복은 야곱한테 해야 되는데 과연 이렇게 되어서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완전히 잘못 돌아가고 있지요. 왜? 이 아이디어는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엄마의 아이디어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었고 이삭도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했었던 것이나 사라가 아들 안 생기니까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보내어서 이스마엘이 생기게 한 것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닌데 역시 이 리브가도 자꾸만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하려고 합니다. 이런 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나는 피조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피조물이라면 다 맡겨야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고 믿는다면 다 맡겨야 됩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무엇을 해가지고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으면 내 생각대로 해버립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하나님도 못 말립니다. 하나님은 그 못말리는 사라나 리브가에게 양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목적을 결국 하신다는 이야기가 이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자,이것만 해결하면, 능히 분별하지 못했다,라고 하면 해석은 다 달라집니다. 분별치 못한 것이 아니고 분별 안했다,라고 할 때 스토리는 완전히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이 께림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부터 끝내놓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자, 처음부터 다시 봅시다. 보시면 결국 여기서도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비교가 나온다고 저는 보아집니다.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과 리브가는 두 아들들을 키우면서 그 두 아들들의 성격을 훤하게 압니다. 그런데 에서는 씩씩하고 남자 다워서 좋긴 좋은데 아무리 키워봐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그렇고 그렇습니다. 육적인 면에만 관심이 있고 영적인 차원에는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저 순간 순간에 재미 있으면 되고 맛있으면 되고 만족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는 것에는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7:2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27:3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무엇을 가지고서 하라고 합니까? 네가 가진 기구인 전통과 활입니다. 네가 가진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 말도 좀 수상합니다. 그렇지요? 아니 축복을 하려면 안 먹고는 못합니까? 그러니까 에서가 가지고 있는 축복의 개념은 대충 이런 개념의 축복이었다는 말입니다. 우선 내가 가져다가 먹이고 그 다음에 그 댓가성으로 축복을 받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이 말을 듣고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 상대적 사랑으로 봐서는 이게 정상이니까 이렇게 해야 됩니다. 절대적 사랑을 거부한 에서로서는 이게 정상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가 잡아와서 별미를 내 손으로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에게 갖다 바치면 아버지가 잘 먹을 것이다. 그러면 기분 좋을 때 댓가성으로 나에게 축복을 해줄 것’이라고 에서는 생각했습니다. 에서로서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리브가가 그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27:5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27:6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27: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27: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이 말은 누구의 말입니까? 아버지의 말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즉 아버지가 한 말은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누구의 말을 들으라는 겁니까? 엄마의 말을 쫓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말과 엄마의 말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에서에게 한 말은 어떤 겁니까? ‘완전히 너의 행함으로, 너의 공로로, 그 댓가로 축복을 받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말은 다릅니다. 사실 이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예언해놓은 게 있으니까 리브가는 이렇게 해도 된다고 자기 딴에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을 가지고 자기가 다 이렇게 해야 되는 줄로 그렇게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다.
27: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27: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내가입니다. 네가가 아닙니다. 네가가 아니고 내가입니다. 너의 공로는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친 이삭이 좋아하는 것을 야곱 네가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엄마가 만드는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과 비슷합니까? 우리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우리의 공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만든 나의 공로, 즉 내가 이렇게 훌륭하게 농사 지어서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 왔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가야 됩니까? 절대적인 사랑으로 완전히 책임지시는 그 결과로 흘린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를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야곱아, 너는 네가 나가 직접 잡아서 요리한 것을 가지고 축복 받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만드는 것은 내가 만들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표상적으로 본다면, 이삭은 하나님이고 리브가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야곱은 용서받고 축복받아야 될 죄인의 표상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만든 별미는 누가 가지고 들어 갑니까? ‘그것은 너 야곱이 가지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아버지 이삭은 에서에게 행함으로 말미암는 축복 이야기를 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받는 축복을 이야기 했습니다. 멋있지요?
27:11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27: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러니까 이 싯점에서 야곱은 절대적 사랑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지금 야곱은 욕심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 참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27: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예수님같지 않습니까?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을 테니까 안심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거지요. 어머니의 공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그것만 갖고 가라고 합니다. 굉장히 멋지지 않습니까?
27:14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27:15 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27: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27:17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27: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이때 야곱이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나아가는 것은 누구를 믿고 가는 겁니까? 믿음으로 엄마를 믿고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털옷을 입혀 준 것도 누구입니까? 그것도 엄마입니다. 장자의 에서의 옷을 입었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갑니다. 의의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들고 갑니다. 꼭 같지 않습니까?
27: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27:19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인데 이것은 영적으로는 참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하면 이것은 참말입니다. 나중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네가 누구냐’라고 물으실 때,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대답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들고 있는 피,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다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그것을 입혀주고 그 피를 들게 했으면 내가 가서 뭐라고 해야 됩니까? ‘네가 누구냐’고 물으시면 ‘아버지,나는 의인입니다’고 대답해야 됩니다. 그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여러분, 멋지지요?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27:19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여기서 좀 헷갈립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거짓말과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뒤죽박죽됩니다. 그렇지요?
27:20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것은 에서가 할 대답은 아닙니다. 에서는 어떤 대답을 했을 겁니까? ‘버지, 밖에 나갔더니 마침 이 놈이 도망 가잖아요. 그래서 막 쫓아가서 잡았습니다. 아버지, 제 기술 좋지요?’고 대답했을 겁니다. 이게 에서가 할 대답입니다. 에서가 뭐 하나님을 들먹거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삭이 보니 말하는 스타일이나 목소리를 들으니 이게 누구의 것입니까? 이게 야곱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말합니다.
27: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이삭은 벌써 처음부터 에서가 아닌 줄 압니다. 왜 이렇게 해야 됩니까? 야곱한테 축복을 주어야만 될 이삭의 입장도 참 곤란합니다. 그리고 만약 야곱이 축복을 받고 나중에 생각할 때 ‘는 축복을 도둑질했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축복을 받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모르고 축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 생각해야 진심으로 한 축복이 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결론이 어떻게 나야 됩니까? 아버지가 모르고 한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이 나야 됩니다. 이삭은 이제 에서한테는 뭐라고 하고 싶습니까? 속았다고 하고 싶습니다. 이거 복잡합니다. 알고 줬다고 하면 에서는 야단이 날 테니까요. 여러분, 여기에 미묘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의 문제, 감정상의 문제 이런것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을 위하여 이삭은 100% 속은 것 같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에서를 위해서는 마치 속은 것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dilemma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는 에서 네가 싫다. 에서, 너는 안돼. 나는 야곱을 축복할래’고 말하면 간단합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러나 이삭의 마음은 자기 뜻대로 하자면, ‘래도 에서를 축복하고 싶어, 너무도 멋있는 사나이야.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그래서 그를 축복하고 싶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이 얽혀 있습니다.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이것을 영어 성경으로 한번 보도록 하지요. 제가 탁 생각나는 게 있어서 그럽니다. 영어 성경에는 뭐라고 나와 있는지 봅시다.
27:21 Then Isaac said to Jacob, "Please come near, that I may feel you, my son, whether you are really my son Esau or not." ‘가 진짜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를 알려고 하노라’는 말입니다. ‘가 만져서 알려고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아닌 줄은 알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삭은 ‘네가 에서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겠다’라는 것입니다. 결정하는데 목소리로 결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결정하겠다는 겁니까? 만져서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거 진짜 좋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들고 갔는데 ‘네가 누구냐’라고 물을 때 의인 XXX라고 하면, 목소리는 죄인 누구 누구의 것인지를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렇다면 죄인인지 의인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목소리 가지고 결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었느냐 안입었느냐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꾸 이삭이 어리버리한 바보같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삭이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요?
리브가도 이삭이 결정할 때 만져서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붙여 줍니다. 목소리로 결정한다면 구태여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고민을 참 많이 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뜻대로 야곱이 축복을 받게 할 수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 사람의 장난입니다. 안 그래도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는데 사람이 자꾸 자기들의 공로를 내세워서 하나님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마치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자꾸 하갈과 동침하라고 자꾸 그랬 듯이 말입니다. 만져서 결정하겠다,라는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27: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음성은 관계 없이 에서라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27: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목소리로는 계산에 넣지 않고 무시하여 더 이상 분별하지 않고 야곱을 에서로 축복했습니다. 야곱의 생각으로는 성공한 것입니다. 일단 성공했습니다. 야곱은 이 진리를 아직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요?
축복해놓고 이삭이 아들더러 뭐라고 합니까? 27:24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네가 영적 이스라엘이냐’라는 말입니다. ‘육적으로는 아니지만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고 묻습니다. ‘영적 장자냐’는 것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야곱이 ‘네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믿음으로 하는 소리입니다. 아마 이것도 야곱에게는 굉장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야곱의 실습입니다. 자기는 전혀 장자로서 축복을 받을 자격은 없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모든 책임을 지는, 엄마를 믿는 믿음으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여기서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여기에 대입하면 딱 들어 맞을 것 아니겠습니까.
27:25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이삭은 속은 것같이 합니다.
27:26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그러니까 목소리는 에서의 목소리가 아닌 것입니다. 목소리를 빼놓고 전부 옷 때문에 축복합니다. 그것은 입혀주신 의를 기준으로 해서 의롭다, 안의롭다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27:3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이제 나는 축복을 받는다,라고 생각하면서 에서는 자기의 공로를 가지고 옵니다
27:31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7:32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너는 누구냐라고 아들에게 묻습니다.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압니다.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왜 이삭이 떨어요? 속아서 떨었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삭은 드디어 가장 염려했던 순간이 닥쳐온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이것을 어떻하나’ 너무 너무 마음 아픕니다. 이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면, 유대인들 자기들이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인 이방인들에게 축복이 돌아가고 너희(유대인들)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셔야 될 때 느끼는 그 비참한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이게 뭐와 같으냐면 [마7: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할 때 예수님은 심히 떨며 심히 비통하십니다. [마7: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한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삭의 그 마음이 바로 예수의 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에서를 축복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미 야곱을 축복해버렸습니다. 그럴 때 에서를 보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줄 에서는 모릅니다. 이 아버지는 하나님을 버린 에서를 grieve합니다. 이것을 무조건 속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 속에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 이삭의 에서에 대한 사랑도 나타나 있습니다. 에서를 위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될 일을, 내가 축복줘야될 사람에게 축복줄 수 밖에 없고 내가 주었은 즉 그가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서야, 이 아버지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끝났다’라고 말할 때 느끼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에서 자기는 당당하게 구원 받을 자격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에서에게, ‘너는 참 맏아들 에서가 아니야, 육적인 장자야’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이 아들이 이해를 합니까, 못합니까? 이해를 못합니다. 이해를 못하는 이 아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심히 크게 떨려 오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것은 나중에 심판 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심히 크게 떨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해가지고 , 나중에 둘째 부활에 일어나가지고서는, 마지막 판단할 때 하나님이, 너희가 첫째 부활에 일어나지 못하고 둘째 부활에 일어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시겠습니까. ‘리가 당신을 위하여 얼마나 일했습니까? 교회 개척도 몇개나 했는데요? 침례도 몇 사람이나 줬는데요?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방법인 뉴스타트 방법대로 살도록 했잖아요?’고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애소할 것입니다.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면서 ‘가 왜 멸망해야 됩니까? 왜 나한테 올 축복은 없소?’라고 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런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더 큰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전체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너 오기 전에 여기 너 오기 전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나중에 나온 놈이 먼저된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라고 하셨는데 이게 다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 한절 한절마다에 진리가 loaded되어 쌓여 있습니다.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게 ‘단 내가 한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렇게 되었어야 되는 것을 내가 그렇게 했으니 그가 진짜로 정녕 복을 받을 것’라고 선언합니다. 선언하는 그 순간은 에서를 사랑하는 아버지 이삭으로서는 피가 맺히는 순간입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심판의 순간입니다.
27:34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27:35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저는 이 대목에서 간교라는 말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복을 빼앗기는 게 아닙니다. 물론 에서 차원에서는 빼았겼습니다. 이삭이 볼 때는 야곱이 빼앗은 게 아니라 에서는 그 복을 이미 찬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받을 복을 이미 에서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귀절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가 진짜로 무슨 복인지도 모르는 그런 영적인 복은 네가 이미 포기했고 그래서 그것은 야곱에게로 건너갔다’ 겁니다. 야곱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27:36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빼앗기는 언제 빼았았습니까? 에서 자신이 팔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에서는 덩치만 크고 좋았지 정직하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라고 말하는데 빼앗은 게 아니지요. 장자의 명분과 복이 같이 따라가는 줄도 그는 모르고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도 빼앗고 이번에는 복도 빼았았다고 따로 말하는 것을 보면 장자의 명분과 복이 따로 따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줄을 에서는 모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장자는 장자이고 복은 복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완전히 세속적인 그러한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영적인 아버지 이삭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러니까 복이 무엇인 줄을 에서는 모릅니다. 복이란 게 좀 남겨놓고 주고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세속적인 복과 똑같은 복을 지금 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복이 이만큼 있다면 한쪽을 떼어서 저 사람에게 주고 또 한쪽을 떼어서 이 사람에게 주고 하는 줄로 압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남은 자라는 명맥이고 생명입니다.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이제는 아버지가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속았다라는 차원은 어디로 가고 없습니다. 이제는 다 알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27: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27:39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너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로서 살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27:41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27: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나니
27:43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27: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이게 또 완전히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룰 것은 다 이루었으니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27: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풍지박산입니다. 가정이 깨져 버렸습니다. 이런 경우가 생깁니다. 한 사람이 신앙하는 방법과 또 다른 사람이 신앙하는 방법이 다르면 이렇게 깨집니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서로 서로 복의 개념이 다릅니다. 한쪽은 받는 것이 복이고 또 다른 한쪽은 주는 것이 복일 경우 이렇게 되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27:46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여기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이라는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이게 참 뉴스타트적인 말입니다. 이 귀절이 무슨 말입니까?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유전자가 자꾸 망가지고 활성 산소가 너무 많이 생깁니다. 왜?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즉 미워하는 것이 생명을 싫어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것은 절대로 정당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미워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미워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미워하지만 그 미워함을 미워해야 됩니다.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그래서 이제 야곱을 장가 보내기 위해서라도 야곱을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도망시킨다고 그러면 이것도 고민입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믿음이 들어가면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유전자는 뜻에 반응합니다. 그러니까 뜻에 반응하지 않는 믿음은 이원론적인 믿음으로서 여기에서 멈춰버립니다. 그리고 유전자만 꼼짝도 안합니다. 그럴 때 나는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믿음이 아닙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서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삭이 아내인 리브가의 말대로 야곱을 부릅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의 딸들 중 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저기 네 외삼촌 집에 가서 아내를 취하라고 말합니다. 이제 도망 겸 신부감을 구하는 겸해서 보냅니다.
8: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28: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28: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진짜로 이삭이 속았더라면 이때쯤 되어서 뭐라고 해야 됩니까?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이 에비를 속이다니!’라고 했을 겁니다. 진심으로 이제 축복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정볼 필요가 없습니다. 에서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술 한잔 먹고 튀어 나갔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까 둘다 잃을 수는 없다는 거지요. 에서가 와서 야곱을 죽여 버리면 둘다 잃는 것이 되니까요. 그래서 리브가의 오라비인 외삼촌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8:6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28:7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28: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28:9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이제 이스마엘도 어떻게 합니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어떻게 잘 보이려고 합니까? 행함으로써 잘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여자로 아내를 삼습니다. 그러면 좀 나을까 해서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같은 혈통이라도 이스마엘 쪽은 완전히 행함으로 말미암는, 상대적 사랑을 택하는,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는 쪽입니다. 에서는 또 헛짚었습니다. 이미 본질적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맞추면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줄줄이 이런 식으로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용서하시고 다 감싸 주십니다.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28: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28:12 꿈에 본즉 이때 야곱은 처참합니다. 축복은 왕창 받았는데 신세는 가련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도 이럴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가서 그 보좌에 함께 앉아 왕 노릇한다고 하지마는 지금 신세는 말이 아닌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자기 처지가 어떻습니까? 노숙자이고 도망자의 처지입니다. 에서에게 죽을 죄를 졌으니 도망자입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야곱 자기는 진짜 어릴 때부터 순 거짓말장이,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단이 그것을 알게 해줍니다. 사단은 이때다 해서 축복받은 이 남은자의 명맥을 여기서 완전히 끊으려고 합니다. ‘아아, 나는 나쁜 놈이야. 나는 사실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아아, 사실 나는 사기꾼이야. 형 에서가 어리버리하고 어리숙한 점을 이용해서 장자권도 팔게 만들었어. 나는 구제 불능이야’라고 자책하게 사단이 만듭니다. 사단이 야곱에게 달려 들어서 죄책감을 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거기 누워 자더니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사닥다리를 보여주면서 말씀하십니다.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아, 네가 죄인이지? 걱정하지 마라. 그래도 나는 너를 절대적으로 사랑한단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이래가지고 야곱은 절대적 사랑을 유지해가는 남은 자의 대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저희들의 아버지. 우리를 남은 자가 되도록 우리에게 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택함을 입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혼인 잔치에 청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 청함을 받고 그 예복을 있을까요? 과연 그 택함을 입고 있을까요? 주님. 참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을 핑계 삼아서 그저 청함을 받았다는 것만 가지고 내 스스로 택함을 입는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부하고 있지 않는것인지도 모릅니다. 주님. 우리가 우리의 영적 상태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냥 장자이니까 장자인 것이 아니고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기 때문에 택함을 입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야곱의 그 인생처럼 오늘 저녁 그 청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택함을 입는 그 과정까지 얍복 강가에서의 그 마지막 투쟁까지 남아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흔히들 그 투쟁을 피하기 위하여, 그 투쟁을 면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부르짖고 그것을 사용해서 나의 영적 성장을 내가 거절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러지 않게 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밤도 주님, 저희들의 가슴 속에 일곱번 째 우물이, 그 쉼의 우물이, 그 영적인 말씀의 우물이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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