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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사도 요한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불일치하며 전혀 상반되는 요12장 37절과 40절을 서로 일치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해입니까?

그리고 마태도 마13장 15절과 사6장 10절을 일치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지자들은 성경말씀의 불일치의 일치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위의 3 말씀을 종합하여 판단해보면, 사실은 백성들이 사단의 유혹을 선택하여 마음이 강팍하여지고 눈이 멀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왜 이사야와 요한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둔하게 하셨다(요 12:40)고 표현하였을까요?

그리고 마태도 그 불일치의 일치성을 알고 있었을까요?


주의 영광을 본 선지자들

그 이유가 다음의 사도 요한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즉 이사야서 6장 10절에서 그렇게 이상하게 불일치하게 표현한 이유가 이사야는 주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며, 또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이사야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복잡해 보일지 모르나 우리가 슬기로우신 대명장(大名匠)께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이 될 생애와 품성의 본을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 품성은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도록 가납하심을 받을 것이다. 새롭게 함을 입은 자들이 흰옷을 입고 예수와 동행할 것이니 저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소망, 331)


주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사야는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어떻게 그 분의 품성을 알았을까요?

이사야 6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좀 더 자세히 보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늘보좌가 그의 눈앞에 열렸습니다.

참으로 정결하시고 온유하신 사랑을 확실히 보는 순간 이사야는 자기의 품성이 얼마나 죄 된 품성인가를 절실히 깨닫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게 됩니다.


사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아 나는 이제 죽었구나!”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같은 죄인이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된다면 죄인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랍을 보내시어 하늘 성전제단의 숯불, 곧 죄를 태워서 사하시는 성령의 뜨거운 사랑의 불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죄사 함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늘성소의 제단에서 취한 숯불은 죄를 태우시는 뜨거우신 성령의 불을 의미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느낀 이사야는 조건 없이 주시는 사랑, 곧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순간, “아!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구나!”라는 확신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고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됨으로서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참 품성을 본 것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놀랍게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았습니다.


이렇게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품성,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 이사야는 또 다른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시어 용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극도로 타락하여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도 사랑하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사야는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어 용서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하여 “누구를 보낼꼬!”하시며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조건 없이 용서 받은 체험을 해본 후, 마침내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일지라도 조건 없이 사랑하심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 후에 마침내 그리스도의 눈물어린 사랑의 음성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변화는 극도로 타락한 백성들일지라도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제 이사야에게는 전해야 할 메시지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곧 자기가 본 하 나님의 품성을 전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습니다.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라고,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부르짖을 수가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을 전하는 메시지는 품성을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참 품성을 알게 되면 이러한 부르짖음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시기로 결심하십니다. 극도로 패역한, 당신을 향하여 등을 돌리는 백성들을 구원하사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뜻, 곧 하나님의 사랑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게 들리는 이상한 명령을 이사야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려는 명령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9절부터는, 너무나 사랑과 일치하지 않은 명령입니다.


사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한글성경에는 위와 같이 번역이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들의 번역으로는 한글성경과는 그 뜻 이 전혀 다릅니다. NKJ 본을 보면,


Is.6:9 And He said, "Go, and tell this people: 'Keep on hearing, but do not understand; Keep on seeing, but do not perceive.'

(다시 우리말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백성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라,‘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달아 알지는 말아 라!”입니다. 왜 이렇게 황당하리만큼 이상한 말씀, 마치 사랑과는 불일치한 것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과연 사랑과 불일치한 말씀일까요?)


그리고는 연달아 더 이상하고 황당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러나 이사야는 기록은 이렇게 했지만 이해는 마태처럼 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께서 직접 백성들의 마음을 강팍케 하시거나 눈과 귀를 막으셨다고 생각하지 않고 백성들 자신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스스로 마음을 강팍케 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이사야도 마태처럼 생각했다는 증거는 다음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6:11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6: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는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자기를 그들에게 보내시려는 하나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그들이 주님을 거역하며 들어도 거부하며 보아도 눈을 감으며 마음을 열지 않고 스스로 강팍하게 하고 있을까요? 언제나 그들이 당신의 품성을 알고 돌아올까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라가 멸망하여 먼 내 백성들이 이방 나라로 사로잡혀 가게 되면 그때는 그들이 나를 다시 찾으리라.”라고.


하나님의 품성이 나타나신바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말한바 요 12:40절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는 말은, 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신 품성, 곧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바로의 경우를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실제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신 분이 과연 하나님이실까요?


[출10:20]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 하였더라.

(여기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에서는 정반대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출8:32] 바로가 이번에도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백성을 가게 하지 아니하더라.

(여기서는 바로가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강팍케 하였다고 서로 상반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출7:22]애굽의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술객들이 사단의 능력으로 지팡이로 뱀을 만들고, 강물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를 만드는 것을 바로가 보고 사단의 영에 혹하였기 때문에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졌다고 표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위의 출애급기의 3 성경 절에서 나타난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진 세 가지의 각각 다른 이유들은 동일한 한사람의 저자인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견해로는 위의 세 가지의 다른 견해들이 서로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의 신에서는 바로의 마음이 강팍하여진 원인이 하나님이 직접 강팍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옛날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경고를 거절함으로 강퍅의 씨를 심게 되었고 따라서 강퍅함을 거두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제로 불신하게 하지 않으셨다.  (CDL 85)

예언의 신에서 이‘불일치의 일치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약속이다.(교육 126)


죄인들에게는 명령과 약속은 서로 상반되며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일치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달아 먼저 알고 있는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명령과 약속은 일치함을 먼저 깨닫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일치한 명령과 약속을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명령으로 생각되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이 든 법궤를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언약(약속)궤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엘렌 화잇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처럼 하나님의 진정한 종들은 하나님의 마음, 곧 그분의 품성을 깊이 잘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보고도 일치하는 의미를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과는 불일치하게 들리는 황당한 말씀을 하실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품성을 이렇게 모순되고 황당한 말씀 속에서 볼 수 있을까요? 모세처럼 깨달은 선지자도 바로가 사단의 유혹에 속아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을 혼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심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품성)을 본 이사야 선지지가 요한복음 12:40, 41절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다는 황당한 말씀을 기록한 것처럼 출애급기를 기록한 모세도 하나님의 품성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품성을 더 확실히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출33:18-23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품성을 모르는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품성의 영광을 본 선지자들의 말이 황당하게 들리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피조물에 대하여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절대적 사랑을 가지신 창조주께서, 그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실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당신께 모든 잘 못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표현을 ‘사랑의 능동적 표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극치의 사랑 표현은 피동적이지 않고, 죄인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당신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당신 책임으로 여기시며 즐거이 스스로 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능동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창조주 하나님다운 표현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을까? 너무나 모순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되던 많은 부분들이 모두가 이와 같은 창조주의 사랑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부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엄청난 사랑을 하시는 분만이 이러한 사랑의 능동적 표현을 하실 수 있고, 또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체험하여 주의 영광을 본 사람만이 이러한 사랑의 능동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죄인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러한 모순처럼 들리는 표현을 사용하셨는가? 그 이유에 대하여 우리들도 이사야처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씀의 뜻의 대강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를 보내어도, 또 예수님 자신이 그들에게 갔어도, 그들은 슬프게도 사단의 유혹에 빠져 사랑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더 완악해져 돌아와 구원받기를 싫어하며 하나님을 버릴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조 마13:1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사야를 보냅니다.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이 하나님의 품성을 확실히 나타내시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사랑하십니다. 정말 조건 없는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사랑의 눈물로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십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경우의 모든 고통도 참고 견디십니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랑입니까? 사랑이 깊으면 조건이 없어집니다. 사랑이 깊으면 모든 것을 믿고 바랍니다. 희망이 없어도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말 바보이신 것 같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가 결국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셔서 용서와 구원을 상징하는 언약의 피인 포도주잔을 마시도록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참조 마26:27) 참으로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바라고 견디시는 사랑입니다.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7]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표준새번역)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당신을 배반하고 떠나버린 자녀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사랑하셔서 그들의 모든 죄를 책임지십니다. 당신을 버린 백성들의 죄를 당신의 책임으로 돌리시기 위하여, 그들이 듣지 않고 구원을 거부하여 받지 않는 것을, 마치 당신께서 직접 그들의 귀를 멀게 하시며 눈을 감게 하시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표현합니다. 참으로 하나님다우신 사랑의 표현을 사용하신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능동적 표현법’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능동적 표현을 이사야 선지자가 깨닫지 못하였다면, 그는 하나님을 오해하여 이렇게 바보처럼 항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왜 그들의 귀를 막으시며 눈을 멀게 하시고 완악하게 하셔서 구원을 주시지 않으려 하십니까? 너무하십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도 미워하십니까?”


그러나 이사야는 이렇게 깨닫지 못한 질문을 던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동적 표현 때문임을 이해하여 안타깝고 답답하며 비통한 하나님의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6: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 니이까?”


이사야의 이 질문의 뜻은 “하나님, 그러면 그 패역한 백성들이 언제까지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을 반역하며 당신께 돌아오지 않으며 당신의 사랑을 피하여 구원받기를 거부하도록 버려두시겠습니까? 어떻게라도 빨리 구원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6:11-12]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 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대답 또한 너무나 모순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는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하여 그들이 구원을 거부하게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으로부터 떠나게 하시며 적국의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가 되게 하고, 그래서 성읍과 가옥에 사람들이 없어지고 땅이 황폐하여질 때까지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것 역시 백성들이 사단의 유혹을 따라서 당신을 떠나 죄 지은 모든 잘못을 당신의 책임으로 돌리시기 위한 하나님다우신 사랑의 능동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능동적 표현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십니까?” 혹은 “그들이 죄를 지었으니 그렇게 벌주심이 당연하십니다!”라고 반응했다면, 그 이사야는 하나님의 품성을 이루는 절대적 사랑을 올바로 이해한 선지자가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당신의 잘못으로 돌리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국의 침략을 받아 비참하게 노예가 되고 땅은 황폐해져 가도,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심지어 이사야서 6장 13절에 보면 그들 중에서 택하신 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그 십분의 일의 택하신 자까지도 결국 사단에게 미혹당하여 “삼키운바”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래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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