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 쳐 죽이라는 명령!, 죽이라는 명령인가?

by 이상구 posted Oct 0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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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돌, 사람의 돌, 하늘의 돌, 땅의 돌.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울의 돌은 사람의 돌, 땅의 돌, 사망의 돌이었다. 그러나 스데반이 피 흘리며 숨져가면서 사울에게 던진 돌은 사울이 바울이 되게 한 하나님의 돌, 하늘의 돌, 살리는 생명의 돌, 곧 그리스도이었다. 스데반이 율법의 돌에 맞아 순교의 영광을 맛본 그날, 마침내 사울도 스데반이 그 전에 이미 맞았던 하나님의 돌, 사랑의 돌에 맞아 마침내 옛 사울이 죽고 새 바울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이 죄인을 돌로 치는 이야기로 꽉차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지막에도 하나님은 돌로 세상을 치신다. 다니엘서의 예언에서, 이 죄된 세상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시고 있다.

단2: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성경에서 돌은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신상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위의 다니엘서 2장의 예언도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재림을 나타냅니다. 생명의 돌이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려 오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의 생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합니다. “돌이 신상을 쳐서” 또 “부숴뜨리매”라는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키려 오시는 것처럼, 그리고 오셔서 부숴뜨려 멸망시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하늘의 돌과 땅의 돌을 구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하늘의 돌은 생명의 돌, 곧 살리는 돌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죽이기 위한, 스데반을 죽이기 위한 바리세인의 돌, 곧 사망의 돌이 아니었습니다. 멸망은 악인들이 생명을 거부하므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시키지 아니하신다. 멸망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 될 것이다. 양심의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불신(不信)의 씨를 심는 자이다. 그 씨는 정확하게 불신을 수확하게 될 것이다. (실물 64)

그들의 배교와 반역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었다. 그 젊은 선지자는 경고의 기별을 그들에게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증언 5, 749)

우리는 하나님을 죄인을 벌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죄인이 자기 스스로 벌을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죄인 자신의 행동들이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연속적인 사건들을 돌발시킨다.(1SM, 235)

가장 먼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인이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기뻐하시지도 않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 죄인들은 악인의 죽음을 정당하다고 보고, 악인이 죽으면 공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그리고 우리 죄인들은 악인이 죽기를 원하면서 사형집행을 명합니다.

그렇다면 악인이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돌로 쳐 죽이는 사형집행을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죽이고 싶어서 사형집행을 명하시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형집행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것은 생명이신 당신과 그 생명을 확고히 거부하며 사망을 선택하는 악인과의 분리, 그 원하시지 않으시는 고통스러우신 분리를 마침내 허락하신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악인이 악할지라도 그 악인에게 인자로우신 주님은 그 악인과의 분리를 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악인은 고의적으로, 돌로 치는 사형을 각오하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확고하게 사망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망을 선택한 사랑하는 두 제자,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바울도 원하지 않았던 그 고통스러운 분리를 허락한 것입니다. 왜? 그들이 돌이키어 회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반역한 그들을 다시 끌어안기 위하여 그러한 아픔의 분리를 선고한 것입니다. 그 분리는 결코 그들의 멸망을 바라고 선고한 분리(징계)는 아닌 것입니다.

[딤전1:20]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그 후, 만약 그들이 돌아온다면 그것은 하늘의 징계가 될 것이지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눈물의 분리의 선고는 그들에게 사망의 심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성경공부 자료실에서 “하늘의 징계와 땅의 징계”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인을 위해서까지도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인의 사망을 금하셨습니다. 금하셨다는 말은 원하시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하심은 당신께서 그 악인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시면서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이 끝까지 사망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망의 선택을 마침내 허락하셔야만 하나님으로서 공의로우신 결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죄짓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죄를 금하십니다. 죄짓는 것을 금하신다는 말은 사망을 선택하는 것을 금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끝끝내 사망을 선택하기로 확고히 고집하며 고의적으로 생명을 거부하는 것을 행동으로 표시하게 되면 선택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 악인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아프신 마음으로 그 악인과 당신의 분리를 허락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형선고인 것입니다.
당신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금하신 것도 허락하셔야만 하시는 분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프신 괴로운 이별을 선언하실 수밖에 없게 되신 것입니다.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은 다음의 두 다른 경우(상황)에 따라서 두 가지 다른 결말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율법을 범하였을지라도 죄인이 아직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생명을 구하는 마음이 아직도 조금이라도 남아 있음을 죄인 스스로는 부인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보신 경우 -- 그 돌은 생명의 돌, 살리는 돌, 곧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
죄인이 율법을 범하고도 당당하며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옳다고 주장하며 전혀 더 이상 생명을 구할 마음이 없어졌고 용서를 해준다고 해도 그 마지막 하나님의 자비마저도 거부할 것임을 하나님께서 보신 경우, 이 경우는 죄인이 확고히 사망을 선택한 경우이다. 그러나 죄인 자신은 사망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확고히 사망을 선택한 죄인을 죽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은 공의롭지가 못한 것이다.

죄인의 마음이 위의 첫 번째의 경우인가 아니면 두 번째의 경우인가를 구분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셔서 최종 결정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이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을 바로 하나님의 판단하심, 곧 심판(Judgemen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께서 죄인의 선택이 두 번째의 경우라고 판단하시게 되면, 참으로 고통스러운 눈물의 사망선고를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공의로우신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죄인의 사망의 선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죄인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인 사망을 받아 체험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죄인을 돌로 쳐서 죽이는 역할이라는 것은 그 죄인이 과연 무엇을 선택하였나를 분명히 보여주는 역할인 것이다. 많은 죄인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것이 실제로 자신들을 스스로 죽이는 자살행위인줄을 모르고 있는 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품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이 역할을 실제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결코 그 죄인을 증오하며 처형하는 하나님을 나타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그 악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참 품성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의의 집행은 하나님이나 인간에게 참으로 눈물겹고 고통스러운 역할인 것이다.

한 인간이 이러한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깊은 기도가 필요하다. 이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정죄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와 영원히 분리되어 그 자녀를 결국 잃어버리는 아픔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이 그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처럼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심판에서도 그분의 뜨거운 사랑이 넘쳐흐르며 죄인의 선택의 자유를 끝내 존중해주시는 사랑의 공의가 함께 하시는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심판이란 결코 죄인을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사랑으로 그 죄인이 선택한 것을 마지막으로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심판을 당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아들, 그리스도에게 맡기시는 것이다.

[요5: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 품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세에게 심판을 맡기신 것이다. 모세는 기도했다. 하나님의 이 사망을 선택한 악인을 살리시고 싶으신 마음을 깨달아 알고 심판에 임하기 위하여.

그러한 기도로서 준비된 심판의 순간, 마지막 순간에 죄인은 자기를 돌로 치려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의 눈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눈물을 보고 마침내 죽음의 직전에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죄인은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면서도 자기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사울이 스데반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 속에서 십자가의 피를 보고 그리스도를 만난 것처럼 그 돌에 맞아 죽어가는 죄인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죄인이 맞고 죽는 돌은 땅의 돌, 정죄의 돌, 사망의 돌이 아닌 하늘의 돌, 용서의 돌, 생명의 돌, 구원의 돌인 것을 죄인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스스로 사망을 선택한 악인들이 실제로 정죄의 돌이 아닌 사랑의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 자기가 선택한 것이 바로 사망인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이 없이는 죄인은 영영 자기가 선택한 것이 사망임을 알지 못하게 되고, 또 자기가 추구해온 것이 사망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 죽는 순간에 만이라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던진 돌에 악인이 맞아 죽는 순간이 그에게는 최후의 회개의 순간, 곧 구원의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픈 과정을 통하여서라도 그 사망을 선택한 악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최후의 노력을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악인의 구원을 위한 최후의 판단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러한 심판을 하는 것을 마치 돌로 쳐 죽이는 즉결 처형으로 오해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상이며 하나님의 품성을 완전히 오해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수가 원수를 구원하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처형은 죄인을 분노로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눈물로 그 죄인이 스스로 선택하여 그가 가고 싶어 하는 그 길로 가버렸던 결과 마침내 사망에 도달하게 된 것을 그 죄인에게 알려주셔야만 했다. 또 그 사망을 허락하셔야만 하시는 고통스러운 그분의 사랑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과정이 바로 사망의 심판의 의미인 것이다. 사랑의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죄인과의 영원한 이별, 참으로 하기 싫으신 이별을 결심하시는 것이 곧 사망의 심판인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공의를 저버릴 수가 있으시다면, 그 사망을 확고히 선택해버린 죄인일지라도 결코 그 악인이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겔18:23]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겔33:11]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그러나 심판에는 사망의 심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심판에는 사망의 심판과는 정반대로 생명의 심판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심판을 하시는 경우는 첫 번째의 경우인 것이다. 죄인의 깊은 마음속에 하나님만이 보실 수 있는 생명을 추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실 수만 있다면 그 죄인에게는 용서와 구원이라는 생명의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이 생명의 심판의 결과는 영생, 곧 영원히 사는 것이다. 사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사 65:17).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그 여인은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를 죽이려는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모든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율법의 문자대로만 행하여 그 여인을 처형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여인도 역시 율법 속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치심과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인하여 한순간이라도 빨리 그 자리를 떠나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꾸부리시고 땅에 쓰시는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께서 땅에 쓰신 것을 보는 순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한 절망적인 수치심과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 여인은 마음 속 깊이 생명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진정한 살아 있는 돌, 생명의 돌이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지금 생명 주시는 돌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했다. 생명의 돌에 맞아 다시 태어나는 생명의 심판이 필요했다. 죄인이 하나님의 진정한 품성을 알고 받아드리게 되면 마침내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밧세바와 간음한 다윗)

그러나 그 여인을 죽이고자하는 사망의 심판의 돌, 곧 정죄의 돌을 손에 들고 있던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쓰셨다. “나는 간음과 살인을 범한 다윗을 만났다. 그는 나를 만났다. 나는 그를 용서하였고 그는 나의 용서를 받아드렸다. 다윗은 생명의 돌에 맞았고 그는 구원을 받아드렸다. 그는 사망으로부터 자유 하였다. 나의 율법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땅에 쓰신 것은 그 사망의 돌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잘 순종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그들의 거짓 믿음, 위선적 믿음, 곧 그들의 죄의 본질을 쓰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죄 없는 자’란 죄 사함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죄 사함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만난 자를 뜻한다. 곧 생명의 돌을 맞아본 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곧 그리스도를 만난 자만이 그 여인에게 죄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그리스도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고 의문(문자)으로만 율법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을 얼마나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자기들이 얼마나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그 무지함 때문에 저질은 그들의 가르침의 모순성과  자신들의 죄의 본질, 그들 속에 의문의 율법만 있을 뿐, 그리스도가 없음을 마침내 보았다. 그 순간 사단이 또 그들에게 역사하였다. 그들은 즉시 양심의 가책을 받음과 동시에 수치감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져버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상대하여 말씀으로 토론을 하시지 않고 일부러 그들 앞에서 꾸부리신 이유도 그들을 당신의 권위로 압도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사랑의 호소를 합리적으로 하시고 싶어서였다.

다윗도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살인과 간음을 범하고 사단의 손아귀에서 마음의 평안을 잃고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면서 회개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초조하셨다. 스스로 사망을 선택하여 사망의 심연으로 자꾸만 빠져들어 가면서도 다윗은 외면적인 종교형식은 갖추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을 잃어버릴 수가 없으셨다. 다윗을 구원하셔야만 하셨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순교자로 선택하시었다. 나단도 다윗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끝까지 사망을 선택할 경우 다윗 왕이 자기를 즉각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다윗을 그가 선택하고 있는 사망으로부터 구원해내기 위하여 순교자로서 다윗 앞으로 나아갔다.

그 나단의 얼굴에는 스데반의 얼굴에서 빛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빛이 나고 있었다. 다윗은 이 위기의 순간에 나단과 함께 오신 그리스도를 다시 만난 것이었다. 다윗은 생명을 선택했다. 만약 다윗이 이 순간에도 사망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영적으로 사망하였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단은 다윗의 영적사망의 집행자가 될 번 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참으로 아찔한 사망의 심판으로 끝날 번 하였다. 하나님의 승리였고 사단의 패배였다.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의 보내심은 다윗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기도 하였던 하나님의 최후의 카드였다. 그날 다윗은 생명의 돌에 맞았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빠져서 나올 수가 없는 사울을 구원하고 싶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울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스데반의 순교를 마음 아프게 감수하셔야만 하셨다. 사울도 바리세인이었다. 그는 모든 율법을 문자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의 문자대로 그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를 행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던진 돌에 맞아 피 흘리며 죽어가는 스데반의 얼굴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원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으로 화안하게 빛나는 스데반의 얼굴은 사울을 눈부시게 하였다. 사울은 마침내 그리스도를 보았다. 스데반과 그리스도는 함께 자기를 용서하고 있었다. 사울에게는 결정적인 심판의 순간이 온 것이다. 다윗이 나단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 것같이 사울도 스데반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 것이었다. 사울은 마침내 생명의 돌에 맞았다. 그 생명의 돌에 맞은 그는 회개했고 구원을 받아드려 생명을 얻었다. 하나님의 승리였고 사단의 패배였다.

하나님께서는 두 강도들을 사랑하시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 세파에 시달리어서 그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들이 속해 있었던 악하고 비도덕적인 상황 속에서는 하나님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허용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단의 유혹을 받아드려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사단의 충동대로 참으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은 사단의 계획대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사단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멸망시키기를 원했다. 사단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들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너희를 증오하시어 죽이시는 것이라고 그들의 마음속에 속였다.  

하나님은 이 두 강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이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들이 사형집행을 받도록 허락하신 것이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결심이었다. 하나님은 그 악인들이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들이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임을 아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강팍해져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와 같은 고통과 죽음을 직면한 그러한 극한상황에서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감옥에도 여러 번 감금이 되었고 곤장도 여러 번 맞았으나 그들은 강인하게 버텨내었다. 오히려 형벌을 주고 있는 병정들을 향하여 냉소를 퍼 부우며 더 세게 때려보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하면서 자기들의 강함을 과시하곤 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상황은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만나는 길 이외는 없었다. 하나님의 최후의 구원의 카드는 그들이 선택한 십자가형을 당하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허락하시는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두 다른 강도들도 함께 못 박힐 수 있도록 여건들을 허락하시었다. 마침내 이 두 강도들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이 방법만이 그리스도께서 이들에게 당신의 참 모습을, 당신의 참 품성을 나타내어 보이실 수 있었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이 길 밖에는 아무 길도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돌에 맞는 순간인 것이었다.

한 강도는 원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자기를 침 뱉고 못 박는 악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품성을 본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악한 강도일지라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를 본 것이었다. 생명의 돌을 맞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산돌로 그 강도를 치신 것이었다. 그 만남의 순간은 그 강도에게는 심판의 순간이었다. 그 심판은 사망의 심판이 아니라 생명의 심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날(오늘) 구원을 받고 낙원에서 죽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낙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십자가에서 자신도 구원해내지 못하는 무력한 자칭 하나님의 아들 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품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곤경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만에 관심이 있었다. 그 품성은 사랑이었고 생명이었지만 그는 거부했다. 하나님의 최후의 구원의 시도는 거부당한 것이었다. 그는 사망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통곡 속에서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다. 사단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눈물 속에서 그는 사망의 심판을 선택한 것이었다.

다윗의 경우처럼 첫 번째의 경우에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의 또 다른 아픔은 하나님은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지 아니하고 용서함으로써 자기의 율법을 스스로 위반하며 율법을 폐한다는 오해를 받는 아픔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처사가 공의롭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며 그분은 죄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었다.

악인이 결국 회개하지 않고 영원한 사망의 심판 속에서 주어버렸을 경우처럼 두 번째의 경우에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아픔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하지만 결국 죄인을 미워하며 죽이시는 분으로 오해를 받는 아픔인 것이다.(지금 김 진복님으로부터 받고 계신 오해이지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하지 않으며 정죄를 받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없느냐?” 여인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을 폐하시거나 범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율법의 진정한 의를 들어내어 보여주시어 그 율법의 진정한 의를 도리어 굳게 세우시는 순간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롬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