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부모와 하나님

by 이상구 posted Feb 2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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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자유와 십자가의 사랑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죄라는 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도 존재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시는 사랑과
죄를 선택할 수 없는, 곧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사랑,
그 두 종류의 사랑 중에
과연 어느 사랑이 더 큰 사랑일까요?

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시는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을 각오한 사랑이지만
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그런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기를 싫어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어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일지라도 자식이 사랑을 거부하면 그 마음을 돌이키어 구원해 줄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 인간 부모의 마음은 아프겠지요. 그리고 인간 부모는 그 아픔을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만약 인간 부모에게 억지로라도 자식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모든 부모들은 그들의 원하는 대로 그들의 모든 자식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인간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아야하는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사랑은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 부모의 마음이며 인간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충분히 돌이키어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잘못된 선택의 자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사용하시지 못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를 구원하시지 못하시는 그 고통, 인간 부모는 인내할 수 없는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선택하여 당하시는 그 이유는 인간에게 허락하여 주신 그 선택의 자유가 그렇게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원하지 않으면 그렇게도 해주고 싶으신 구원을 해주시지 않으시는 그 아픈 마음, 그 아픔은 인간 부모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해줄 수가 없기 때문에 해주지 못하는 아픔보다는 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주지 못하는 아픔이 더 고통스러울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 부모는 하나님의 아픔보다 더 작은 아픔을 인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인간부모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을 인내하십니다.

그리고 그 당신의 아픔을 인내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런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 부모의 사랑은 그런 아픔을 인내할 수 있는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왜 그렇게 인내하실까요?

십자가를 보십시오.
구원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시고
구원하시지 못하시는 그 고통을 인내하시면서 까지
죄인이 그 죄로 죽기보다는 당신이 직접 죽으시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까지
인간에게 주신 것을 빼앗지 않으시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선택의 자유입니다.

이제 십자가를 다시 보십시오.
우리들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를 끝까지 보장하고 계시는
그 사랑이 보이시지 않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진정한 자유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이 자유 때문에

그렇게 강하신 분이 그렇게 약하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그런 약하심이 그분의 진정한 강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모두 구원해버리시는 분이시라면
그분도 인간 부모처럼 당신의 고통을 인내할 수 없는 사랑을 하시는 분이겠지요.
그렇다면 그분은 결코 약하신 분이 아니시며,
따라서 그분은 강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하지 않는 죄인을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억지로 돌이키어 구원을 시키시어 스스로 고통을 피하시며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기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시어 고통을 피하시지 않고 그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는 그 사랑이 더 큰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의 목숨만큼 더 귀한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인간이 피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원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변화는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더라도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인간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그분과 인간의 관계가 영원하시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인간을 피동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보장하시어 능동적으로 변화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전지전능은 곧 십자가의 사랑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보장하는 십자기의 사랑만이 죄인을 참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의지를 보장하지 않는 사랑은 결코 죄인을 진정으로 변화시키어 구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에도 반응하지 않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이유만으로 그 죄인을 돌이키어 구원하신다면 그런 차원의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인간 부모 차원의 사랑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그런 십자가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 죄인을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변화시킨다면 그런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반응하지 않는 죄인에게는 어떠한 능력이 작용하더라도 진정한 변화를 결코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추측이기는 합니다마는 님의 사고 속에서는
인간의 선택의 자유보다는
만민을 구원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요?
그리고 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이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자유의지의 중요성,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목숨을 걸고 보장하시려는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이해하시지 못하시면 결국 만민구원론이라는 오류에 빠지시고 맙니다.

조심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보장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만민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말고는 어떤 능력도 죄인을 진정 변화 시키실 수는 결코 없습니다.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고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면 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가 허락되지 않은 구원,
그 구원이 과연 진정한 구원일까요?
그리고 진정한 사랑
십자가의 사랑까지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생명은 진정한 자유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진리는 생명이며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자유가 없는 진리, 곧 사랑과
자유가 없는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몇 명을 구원하느냐가
고통을 제거해주느냐가
사랑의 능력을 결정하는 요소라기보다는

그 사랑이 과연 어떠한 사랑인가가
과연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사랑인가
자유의지를 허락하지 않는 사랑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구원하시는 그런 사랑이라면
처음부터 죄가 발생하여 지금까지 존재해야 될 이유가 없지요.

처음부터 죄를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막아버리셨으면 이런 아픔이 없었을 것을!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와 있다는 이 자체부터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곧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사랑이 나타나 잇는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신 그런 하나님은
결코 십자가에 달리시지를 않으실 것입니다.

고통과 사랑은 반대가 아닙니다.
내가 고통을 당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 아닐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고통을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을 이용하고 있는 사단의 기만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면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주장,
고통의 유무로 사랑을 측정하는 사고방식은 지극히 인간본위의 인도주의적 입장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인간이 잘못 행사한 결과로 말미암아
고통이 당신과 인간에게 닥아 올 것을 미라 아시고서도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실 것을 각오하시고
인간과 천사들을 만드셨습니다.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결코 부정하시지 않으실 것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
이미, 결심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