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도 제 4기 12과
반상순 장로의 안교교과 공부입니다.
기도와 응답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여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약 5:16-
기도와 과학
왜 한약이 건강식품일까?
3~40% 밖에 병이 낫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100명의 병자를 위해 기도했는데
95명의 병자들이 나음을 입었다면
그것은 약이요 과학이다.
기도해서 나은 것 같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보니 낫지 않았다.
그런데도 또 가서 안수 기도를 받으러 간다든가,
낫지 않았는데도 다른 신을 찾아가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무속이다.
기도해도 낫지 않았다.
그래도 기도한다.
그것은 충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기도는
과학에 속할까,
무속에 속할까,
충에 속할까?
물어볼 것 없이 기독교의 기도는
충의 범주(範疇)에 속하는 것이다.
충(faithfulness)에서 fulness을 떼낸 faith가
기독교의 신앙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해바라기와 같은a)
바라봄이다.
다신론자들에겐 충이 없다.
신이 많다는 것은 예배자들의 소원을 들어준 신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소원을 응답해준 신이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신을 찾아 헤메지 않는다.
오래 전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기적에 의지했다.
인류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기적이 아니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세월을 지나
인류는 여기까지 왔다.
요즘도 기적을 소원하는 사람이 있지만
옛날처럼 절박함으로 기적을 소원하지는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기적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과학을 의지한다.
인류의 모든 문제를 과학이 해결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할 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마 12:39)고 하신 예수께서
과학적 증거를 대라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뭐라고 대답하실까?
요나의 과학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실까?
요나의 과학이 무엇일까?
요나의 과학을 말하기 전에 과학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과학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지맨(John Ziman 1925-2005)에 의하면
"과학은 공공지식이다".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가설이라고 한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 실험이나 검증을 거치면 과학이 된다.
가설을 설정하고,
설정된 가설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된 자료들을 모아
설명이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었을 때
그것을 과학적 이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위와 같은 과학이라는 정의에
과학이 겪어온 경험에 비추에
다음과 같은 충수(蟲垂, appendix)를 덧붙인다.
"과학은 반증과 검증을 허락하는 지식쳬계이다.
따라서 검증과 반증할 수 없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진화론은 반증과 검증을 향해 열려 있으므로 과학이라 말할 수 있으나
창조론은 반증과 검증을 거절하므로 과학의 테두리에 들어오지 못한다.
반증하기는 쉬울 것같아도 반증되지 않는 이론이
정말 훌륭한 과학적 이론이다.
진화론은 증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반증할 수 없는 튼튼한 이론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과학이지만
반증을 거절하는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과학은 공공지식이다'라는 분명한 정의(定義)에
'변할 수 있는 것이 과학이다'라는 보충설명(appendix)이 필요한 것은
과학의 쓰라린 경험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등장하기 전까지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주장된 과학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우주의 구조를 수학적 모델을 통해 정교하게 설명하면서
천동설을 흔들릴 수 없는 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갈릴레이 등 천문학자들이 등장하자
지동설이 과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천동설은 부끄러움의 휘장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운동의 관계는
뉴턴의 역학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고전역학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매우 정확하게 설명되고 예측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 아원자 입자가 별견되면서
고전역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모순들이 발견되었다.
이를 해결하게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 양자역학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개발한 이들 중 한 명인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의 무작위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양자역학의 현상인 도께비 원격현상등을 강력히 부정하면서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운동의 관계는
명확한 설명을 기다리고 있다.
실험이나 검증을 거친 지식이 과학이다.
이 정의는 변함이 없다.
변할 수 있는 것이 과학이라는 충수는
과학의 정의가 아니라 과학의 수치(羞恥)다.
이 수치를 수치로 알지 못하고
과학의 정의인양 말하는 것은
인간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한 자연현상을 설명하기에
얼마나 모자란 존재인가를 입증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과학의 충수(蟲垂, appendix)다.
과학적 이론을 제창하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과학의 한계요 비극이다.
과학의 한계와 비극이 과학의 정의를 대신한다면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검증과 반증에 닫혀 있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실험이 얼마나 정교했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요나의 과학은 무엇이며
그것은 정말 정교한 실험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가?
요나의 표적이 부활이듯이
요나의 과학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12제자들 비롯하여 수 많은 증인들의 의해 증명되었다.
증인으로 번역된 martus는 순교자(martyr)다.
순교는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죄인은 자백하는 순간 죄인이 되지만,
부활의 증인은 자신의 증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백하는 순간
죄를 벗고 살아난다.
살아날 방도가 있는 증인들이 죽었다는 것은,
그리고 죽음을 선택한 증인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목숨을 바꿀만큼 확실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수 많은 증인들에 의해 실증된 과학이다.
증인은 물증 앞에 힘을 잃는다.
수백명이 증거했더라도 물증 하나만 나오면
수많은 증인의 증거는 무시된다.
물증은 증거에 우선한다.
정말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물증이 있을까?
예수의 부활을 두려워했던 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지 못했다.
실존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인 미라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던 시대에
왜 예수의 적대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미라를 만들지 못했을까?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겠지만,
제자들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행 5:30)고 말할 때
왜 그들은 예수의 시체를 색출하여
그들 앞에 제시하지 못했을까?
예수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부활은 흔들릴 수 없는 과학이다.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예수께서
기도의 정교한 응답, 즉 과학을 좋아하실까?
기도를 하면 응답해주기를 몇 번만 하면
그 하나님은 알라딘 램프의 지니가 되고 만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종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종이라면 인간은 종의 자녀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이 되기 위해 인간을 만드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왕이시기에 우리는 왕의 자녀인 것이다.
신앙의 필수 도구(?)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신앙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고 찬양한다.
그렇다면 기도와 찬양은 신앙의 필수 도구일까?
도구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수단이다.
연필은 필기 도구이지만
연필이 없으면 볼펜으로 쓰면 된다.
치약은 이를 닦는 도구이지만
치약이 없으면 소금으로 닦으면 된다.
만일 기도와 찬양이 신앙을 위한 도구라면
기도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을 때
그것을 대체할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기도와 찬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도와 찬양은 그리스도인의 필수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기도와 찬양의 또 다른 말은 예배다.
예배란 신앙이라는 목적을 위해 행하는 의식이 아니라
신앙하는 사람의 삶이다.
호흡하지 않으면 죽듯이
예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만 기도하고 찬양할까?
믿지 않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하면 신(神)을 부르고
즐거우면 노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필수도구냐 아니냐가 아니라
기도와 찬양의 대상이 살아 계시냐 아니냐이다.
살아 있지 않는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들의 신을 향해 돌을 던진다.
과거 이교 세계에서 왕은
자기 부족의 신에게 적들을 진멸시켜 달라고 탄원했다.
그리고 왕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저들의 신이 위대한 것이요,
저들이 전쟁에 패배하면 격분하여 저들의 신전과 상을 부수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기도의 응답이 없을지라도하나님을 부른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하지 않으시지만(마 12:32)
그외의 죄는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신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관습적인 무엇은
심판의 잣대가 되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당신의 행위에 의해 판단하신다.
따라서 그 행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위가 내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비워야 한다.
환자를 위한 기도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4-15)
어쩌면 이 말씀은 야고보의 경험담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이든벨리에 가서 설교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저녁에 설교를 마치자
어떤 아주머니가 만나자고 해서 그 방에 갔다.
만나자 마자 하시는 말씀은
자기의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겪은 이야기를 했다.
내용은 동생에게 꿔준 돈을 받으려다가
병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듣고 동생을 용서하고나니
그렇게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면서
아프던 온 몸이 나았다는 것이었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는 말씀에서
기름은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만 해도 기름은 만병 통치 약이었다.
약이 없던 시절에 속병에도 외상에도 기름이 사용되었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라는 말씀을
지금의 말로 읽으면 '주의 이름으로 약을 사용하며'와 같은 말씀이다.
야고보서 5장 14-15절 말씀의
키워드는 구원이다.
병든 자의 치료를 말하면서
치료라는 뜻의 therapeuo를 사용하지 않고
구원이라는 뜻의 sozo를 사용했다.
구세주는 soter(소테르)
일으키시리라로 번역된 egeiro는
마태복음 10장 8절에서 '죽은 자를 살리며'에
사용된 단어이다.
기도에 대한 야고보의 결론은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여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여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는 것이다.
관계의 잘못으로 많은 병들이 생긴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관계의 회복이다.
뉴스타트 건강 프로그램에서
안식일 교인들의 병은 잘 낫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일 뉴스타트 건강프로그램에 간 사람들의 병이 모두 낫는데도
안식일 교인들의 병이 낫지 않는다면
안식일 교인들의 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뉴스타트 건강프로그램에서 병 낫는 확률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면
안식일 교인들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대단히 칭찬받을 일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안식일 교인은
관계의 문제로 질병을 앓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불목으로 인해 생긴 병은 관계의 회복으로 치유가 일어난다.
기도의 모본
기도의 모본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
이것이 과학일까 기적일까?
이 성경절을 보고 "우리의 기도도
현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는
진지한 고민에서 비롯된다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고 말한다면
엘리야가 일으킨 일은 과학이다.
과학은 효과를 논한다.
그러나 기적은 효과를 논하지 않는다.
기적에서는 기적을 일으킨 분의 목적이 중요하다.
프란시스 갈톤b) 목사는 ‘기도의 효험’에 대해 말하면서
"보험 회사들은 군주들과 목사들의 수명을 비교해서
보험료에 반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기독교 대백과 사전> 2권 909쪽 '기도' 참조)
정말 기도하는 목사는 더 오래 살고
기도하지 않는 왕은 수명이 짧을까?
왕의 수명이 짧은 것이 기도하지 않은 때문일까,
방탕한 생활습관 때문일까?
기도하는 목사가 더 오래 사는 것이
기도의 응답일까,
올바른 생활습관 때문일까?
만약 프란시스 갈톤의 말대로
기도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수명을 비교할만큼
기도의 효과가 크다면 기도는 약 중의 하나이다.
초자연적 현상이라도
그것을 일으킨 사람의 목적이
흥행이면 마술이요
그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면 기적이다.
마술은 항상 관람자들의 감탄을 이끌어낸다.
감탄을 이끌어내지 못한 마술은 시장에서 퇴출된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 9:30)고 하신 것은
감탄할만한 기적이 마술로 받아들여질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구원이라는 목적 하에 행하여지는 기적이
그 목적을 수행하고 있을 때,
때로는 재앙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출애굽하기 위해 모세가 펼친 기적들은
애굽사람들에겐 재앙이었다.
하나님의 기적은
대상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따라서 기도를 해서 병이 나은 것도 기적이요
병이 낫지 않은 것도 기적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엘리야의 기적에서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라는 말씀이다.
말씀 대로 행하는 것과
말씀 없이 스스로 행한 것의 차이는
삶과 죽음이다.
명령을 따라 행한 엘리야의 기도는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셨지만,
명령과 관계없이 뛰놀던 사람들은
책임질 존재가 없으니
백성들이 칼을 들어 쳐도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왕상 18:40)
엘리야의 기도는 기도의 모본으로 제시될 말씀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에서 나에게 명령하실 분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떡을 앞에 두고 기도하셨다.
기적의 목적이 구원이라면
기적의 동력인 기도의 목적 역시 구원이다.
기도를 해서 병이 낫지 않아도
병자가 구원을 받았다면
기도는 응답된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매순간의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응답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을 구원하는 사업에
그와 하나가 되라고 요청하신다"(시대의 소망 504쪽)
서설(絮說)
a) 영조 때 해동가요를 지은 김수장은 “모란은 화중왕(花中王)이요, 향일화는 충효로다.”라고 읊었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 충이다.
b) 프랜시스 갈톤(Francis Galton, 1822-1911)은 영국의 인류학자로서 찰스 다윈은 그의 배다른 외사촌 형 이었다. 갈톤은 탐험가로서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최초의 정밀 지도를 제작해서 영국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상한 지리학였다. 그 는 또한 영국각지에 사람을 보내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기압과 날씨를 동시에 측정함으로써 세계최초의 기상도를 만들었으며, 고기압 과 저기압이 어떻게 날씨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연구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기상학자이다. 그는 사람들마다 손가락의 지문 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해서 런던 경찰청으로 하여금 세계 최초로 ‘지문 수사기법’을 도입하게 한 장본인이다.
a) 영조 때 해동가요를 지은 김수장은 “모란은 화중왕(花中王)이요, 향일화는 충효로다.”라고 읊었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 충이다.
b) 프랜시스 갈톤(Francis Galton, 1822-1911)은 영국의 인류학자로서 찰스 다윈은 그의 배다른 외사촌 형 이었다. 갈톤은 탐험가로서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최초의 정밀 지도를 제작해서 영국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상한 지리학였다. 그 는 또한 영국각지에 사람을 보내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기압과 날씨를 동시에 측정함으로써 세계최초의 기상도를 만들었으며, 고기압 과 저기압이 어떻게 날씨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연구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기상학자이다. 그는 사람들마다 손가락의 지문 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해서 런던 경찰청으로 하여금 세계 최초로 ‘지문 수사기법’을 도입하게 한 장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