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박사님 질문 있습니다..

by 이상구 posted Dec 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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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이미 사하여 주셨다는 너무나 위대하고 당연한 이 진리를 그렇게 확고하게 깨달으시고 믿으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아직도 지은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를 해야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는 것처럼 알고 있는 교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교인들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진실로 성령으로 거듭나신 분들이 많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참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는 십자가의 보혈의 의미를 신학적인 지식이나 이론으로서가 아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분의 품성과 죄 사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더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죄가 더 할수록 은혜가 더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롬5:20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렇게 죄가 더 할수록 은혜를 더 부어준다는 것은 이 세상의 지식적 이론으로서는 전혀 합리성이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성령으로 깨닫지 못하면 은혜에 대한 감사는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이상한 혼란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은혜를 더 많이 받으려면 자꾸 죄를 지으랴 되겠구나.” 라는 결론입니다. 이러한 결론은 성령을 아직도 받지 못하여 악한 영들로부터 완전히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이론인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를 깨닫게 되면 절대로 이러한 혼란스러운 결론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사단의 영으로부터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죄지은 사람을 사단이 마음속에 넣어주려고 애쓰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용서의 확신을 주셔서 더 큰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그 결과 죄인은 “그래,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더 이상 떠나서 죄를 지을 수는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 죄짓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래 더 이상 죄를 지을 수는 없어!, 그럴 수가 없지”라고 성령으로 결심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체험을 하게 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6:15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들이 죄를 사하여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죄 사함 받기를 선택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본다면 모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인들은 조건 없이 은혜로 이미 주신 용서를 믿고 받아드리기로 선택을 해야만 그 죄 사함이 나의 것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값없이 주신 것이지만 그 주신 은혜가 자동적으로, 또는 강제적으로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자유의지를 허락하시고 선택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는 공의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죄 사함과 구원은 주신 그대로 그냥 죄인들이 받아드리던지 말던지 에 상관이 없이 적용이 되겠지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하는 조건으로 은혜를 주시겠다는 조건부로서의 죄 사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구하라”는 말씀은 “부디 죄 사함을 받아들여 달라”는 우리의 선택을 호소하시는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있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기도도 이러한 선택의 자유와 연관 짓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하시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위의 말씀에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이 자기를 해친 원수를 스스로 용서하기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진정한 영적인 용서가 가능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원수를 용서해본 체험을 하신 분들은 그 엄청난 용서의 기쁨을 맛보며 그 용서의 결과 그 원수에 대한 증오심까지도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소멸된다는 기적적인 체험을 맛보아 아실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며 증오심의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참으로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인 줄을! 바로 이런 영적인 용서를 체험해보아야만 하나님께서 이토록 큰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고도 전혀 미워하시지 않고 사랑하시며 얼마나 기뻐하실 줄을 이해하게 되면서 용서의 참 맛을 보게 됩니다. 위의 기도는 그런 용서를 하게 해달라는 죄인의 간절한 선택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구함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마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위의 13절의 말씀은 우리들이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하지 않고 싶은 악한 사단이 주는 충동과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도와주시며 그러한 증오심으로부터 구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의 유혹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죄인들에게는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기도입니다.

 위의 12절과 13절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셔야만 다음 13, 14절의 말씀을 다릉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만 하나님께서 나의 죄도 용서하신다는 그런 조건부 용서의 뜻으로 오해하시지 않게 됩니다.

 마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위의 말씀은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진정한 영적 용서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그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영적인 용서를 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죄인이 구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은혜로 이미 죄인에게 주신 용서일지라도 죄인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죄인이 받아드리지 않은 결과 하나님께서 주실 수도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는 모든 인간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용서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을 용서했던 용서하지 않았던, 그런 것에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들에게 이미 용서를 주셨습니다. 이 용서를 참으로 받았다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체험한 사람들은 자기의 원수들의 과실을 반드시 용서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 원수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조건 없이 주시는 은혜의 용서를 아직도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주시는 것일지라도 죄인이 받아드리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용서를 강제로 주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토록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도 힘드시게 하지만 인간에게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참으로 자유를 주시고 싶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겠다.”고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받아드리지 않은 것을 우리의 탓으로 돌리시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의 탓으로 돌리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주신 구원도 받아드리지 않는 죄인에게 책임을 돌리시지 않고 마치 당신께서 용서를 주시지 않으시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당신의 책임으로 돌리시는 참으로 좋으신 그리스도의 참 품성이 보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