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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철님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 잘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교리토론장이 아닙니다.

제가 안식일 교단의 교리, 조사심판에 대하여 번대의견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엘렌 화잇에 대한 견해도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실려면

우선, 

http://www.leesangku.org/ns/board_ANBV67/50760#0

https://www.youtube.com/watch?v=vXQonEMpt7Q

에서 강의를 잘 들어보시고

카스다 자유게시판에 마련된 토론방에 방문하여 주셔서

좋은 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쳐 알려드리지 못하고 님의 글을 삭제한 점, 

깊이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구 드림


  • ?
    호명호수 2016.07.02 20:46
    박사님 사랑합니다 힘들고 지치고 두렵고 화가날때 박사님 강의 들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아집니다 공부할때 마음이 복잡할때 강의를 듣고 있으면 평안함을 느낌니다 박사님 힘내시고 열심히 강의 듣겠습니다
  • profile
    다윗 2016.07.04 01:44
    글 삭제는 진작 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곳은 제림교회 산하 기관이, 신학연구소, 목회자 양성소,
    교리토론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 주장과 다르면 이곳에 들어오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
    신나게 2016.07.06 11:17

    카스다 자유게시판 토론방은 어디에 있나요...
    저도 궁금합니다...

  • ?
    kpark 2016.07.06 11:51
    kasda.com 에 있습니다.
    http://www.kasda.com/index.php?mid=ds
    회원이 로그인해야 가능할겁니다. 하지만 여기와서
    쓰든 말석 박진하 의 글만 늘어 놓아 별 도움 안됩니다.
  • ?
    신나게 2016.07.06 12:32
    감사합니다 ^_^
  • ?
    이상철 2016.07.09 18:06
    위에 글을 삭제 부탁합니다
  • ?
    이상철 2016.07.09 18:21
    스크랩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대상은 누구인가?
    (단 7:9~10, 13~14, 26~27)

    #. 이번 편에서는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 볼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파일 원문을 다운로드 하시고,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시리즈로 1.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2. 다니엘 7장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3. 다니엘서 8장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4. 다니엘서 9장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5.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6. 성소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7. 기타 ...

    #. 자료의 모든 내용들은 성경, 예언의 신, 아래 명시해둔 참고 목록 전체를 최근 다시 보고나서 이번 주제에 맞게 다시 보면서 편집한 것입니다. 가급적 모든 글은 각 단락에 출처를 명시하였습니다. 더욱 자세하게 살피고자 하신다면 필히 책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본 자료는 시간을 쪼개서 급히 기록하면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오타나, 편집 상 내용이 문맥에서 서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양해 바라고, 차후 버전 2, 3 등에서는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


    1. 다니엘 7장 심판의 배경

    1) “이 심판 장면은 작은 뿔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도입된다(11, 25). 이 뿔은 이미 3년 반 동안 성도를 핍박해 오고 있었다. 심판은 이 작은 뿔의 공포 통치가 끝나가면서 일어난다. 사실, 이 심판의 결과로 작은 뿔은 그 권세를 잃고 파멸된다. 인자와 성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받은 것도 바로 심판 후이다(27절). 이 이상의 장면은 성도의 핍박에서 심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간다. 다니엘 7장에 묘사된 심판은 작은 뿔이 파멸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수립되기 전에 일어난다.”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193.

    2) “대속죄일이 동시에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다니엘 8장 14절의 성소의 정결은 곧바로 다니엘 7장의 심판의 장면과 또 다니엘 2장의 초자연적인 돌 나라의 도래와 밀접히 평행하는 사건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다니엘서를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이런 평행 현상을 펼쳐 내는 것이다. 다니엘 7장의 심판은 하늘에서 대속죄일 곧 대 심판의 날이 시작될 때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시는 사건과 밀접히 비교되는 사건이다.” - C. Mervyn Maxwell,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오만규 역(서울: 시조사, 1997), 181.

    3) “다니엘 7장의 주요 초점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 백성을 핍박할 악한 종교 세력인 “작은 뿔”이다. 재림교회는 이 작은 뿔이 중세의 교황권을 대표한다고 본다. 다니엘 7장의 이상에서 작은 뿔의 행동은 이 세상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투쟁의 해결은 하늘에서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둘러선 가운데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심판의 형태 속에 나타난다. 이 심판은 작은 뿔로 대표되는 배도한 종교 세력을 정죄한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을 신원하고 이 세상의 왕국들을 “인자”와 그의 백성에게 넘긴다. 이것은 선과 악의 투쟁 즉 대쟁투와 그 해결의 축소판 그림이다.” - 마빈 모어, 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유동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5), 428.

    4) “다니엘 7장은 마지막 시대에 있을 재림 전 심판 곧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옹호하여(단 7:9~14, 22) 그들에게 약속된 나라와 권세를 주어 보상하고, 그분께 반역한 자들과 특히 박해하는 세력인 “작은 뿔”은 정죄하는 심판(단 7:26)을 묘사한다. 이와 함께 이 심판은 죄와 죄인을 다루시는 방법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옹호한다.” - 게르하르트 판들 편, 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3), 216

    5) “작은 뿔의 활동을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했다. 그 세력의 활동은 하늘의 성소, 곧 하나님의 정부의 심장부를 훼손하고 짓밟아 왔다. 그러나 다니엘의 이상은 하나님이 작은 뿔과 사단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게 해주는 재림 전 심판을 가리킨다. 갈바리의 빛 가운데서 사단의 모든 도전은 반박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옳다는 것과, 그분이 죄악 문제에 전혀 책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것이다. 그분의 품성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지고, 그분의 사랑의 정부는 재확인될 것이다.” -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8(서울 : 시조사, 2007), 442.

    2.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대상과 심판의 목적

    1) “다니엘 7장의 심판 장면에 사용된 기록들은 하나님의 종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데, 그들을 지지하는 심판이 베풀어지며(단 7:22), 그들이 우주 앞에서 옹호되고 나라를 받는다. 이것은 이 심판과 다니엘 12:1~2을 비교해 보면 확인된다. 미가엘은 영광의 왕국을 받기 위해서 일어난다. 그 일은 북방에서 온 원수가 패망한 후에 일어난다(단 11:45; 12:1). 그런 다음 성도들이 구원받고 부활이 일어난다(단 12:1~2). 영생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책에 이름이 기록된”자들이다(단 12:1). 다니엘 7장에서 논의된 심판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고 선언되는 옹호 심판이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고 선언되는 옹호 심판이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회와 인자와 우주 앞에서 베풀어진다. 이 회의의 심의사항은 모두 하나님의 지성적 존재들에게 공개되며, 하나님의 판결은 그 법정의 위원이 아닌 자들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부, 그분께서 죄와 구원을 다루시는 방법, 그분의 조치는 우주 앞에서 옹호하는 기능을 한다. 이 심판에서 하나님도 옹호 받는다(시 51:4; 롬 3:4).”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194~195

    2) “우리는 대속죄일이 하나님께 충성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분하셨던 심판의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 제사를 통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대속죄일 이전에 이미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대속죄일은 용서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용서를 굳게 붙들었고 어떤 이들은 용서를 버렸다.” - 로이게인, 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서울: 시조사, 2013), 189

    3) “마지막 심판의 첫 단계에 의도된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사면이였다. 하나님은 성도를 정결케 함으로써 죄를 철저하게 제거하여 고백된 죄들을 도말하고자 하였다. 죄를 분리케 하는 것이다(사 59:2). 죄가 제거됨으로써 화해(하나됨)가 실현된다. 죄의 마지막 기억이 사라짐으로써(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렘 31:34)절대적이고 영속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책들을” 조사하시는 것은 실패한 사람들을 골라내려는 의도가 아니라 끝까지 신실한 사람을 찾아내고자 함이다. 천년기 끝에 있는 무서운 심판에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이 선고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844년부터 시작된 재림 전 심판은 - 레위기 16장의 상징적인 대속죄일을 성취시키는 최종적인 대속죄일 – 드디어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는 감격적인 선포로 그 절정에 이른다. 그 끝에 예수님은 하늘을 떠나 땅으로 내려와 그의 성도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영생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이제 구약과의 또 하나의 평행 현상이 뜻 깊게 나타나고 있다. 옛 대속죄일에 생활을 심사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뿐이었다. 그 전 해 동안에 제물을 바친 백성들의 죄들만이 대속죄일에 도말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경계 너머에 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백성들은, 최소한 인간의 안목으로 생각할 때는 , 심사 없이 영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수 세기에 걸쳐 그의 진정한 이스라엘에 가담해 온 “진정한 유대인들”중에서 신실한 자를 찾아내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이시다.”(요 1:9) 조사 심판 즉 재림 전 심판의 기간에 심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때이건 또 어떤 식으로든 이 참 빛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해 온 사람들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 C. Mervyn Maxwell,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오만규 역(서울: 시조사, 1997), 237

    4) “다니엘 7장의 하늘의 법정은 실제적으로 “심판”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또 그와 같이 이해되어야만 한다(단 7:10, 22, 26). 단 7:10, 22, 26은 모두 같은 심판을 다루고 있고, 후에 나오는 22, 26절의 두 언급은 9, 10절에 나와 있는 심판에 대한 천사의 해석이다. 쟁투 가운데 있는 양편을 포함하고 있는 이 심판에는 하나님 백성의 승리와 적대적 세력의 파멸을 예언하고 있다(22, 26, 27). 이 심판의 본질은 양편을 포함해서 예언된 사건들의 문맥의 빛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다니엘 7장의 세 부분 모두는 심판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거의 없애려고 하는 지점까지 그들을 박해하는 반역한 종교적 세력의 뒤를 따라온다(10, 11, 21, 22, 25~27). 이 심판은 이러한 악의 세력들과 나라들이 더 이상 성도와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는 때를 정해 놓고 있다. 그들로부터 빼앗은 지배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에게 주어진 바 된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면, 거기에는 분명히 두 편이 있는데, 심판의 측면에는 하나님의 적에 대한 심판과 성도를 위한 심판이 있다. 1,260년 후에 따라오는 이 심판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이 양면을 다 포함시켜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항한 뿔의 잔혹한 활동의 긴 기간 때문에, 성도는 오랫동안 사람의 박해와 정죄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에, 그분의 성소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이 심판은 그들을 옹호하도록 역사의 선고를 역전시킬 것이다. 그러한 선고는 이 세상의 통치와 영원한 구원, 하나님 왕국의 회복의 약속과 함께 이루어진다.” - 에드워드 헤픈스톨, 우리의 대제사장, 하늘 성소의 예수 그리스도, 김일배 역(서울: 삼영 출판사, 1998), 108.

    5) “이 심판을 통해 기본적으로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1) 악인들이 파멸되고(단 7:11, 26), 2) 인자의 왕권이 재확인되며(단 7:13~14), 3)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상속 받는다(단 7:27). 천사가 설명하는 마지막 절(27절)은 성도가 지상에서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을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성도들은 ”인자를 섬겨 복종“할 것이다(27절). 14절과 27절은 서로 보완해 준다. 두 절은 영원한 나라에서 살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한다. 14절은 그들을 다스릴 자 곧 인자에 대해 말하고, 27절은 그들이 그분과 관계를 맺고 할 일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그분을 섬겨 예배하고 복종할 것이다. 이들 중에는 인간 법정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았던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늘 법정은 이런 잘못들을 시정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신 때를 언급한 22절의 의미이다. 인간 법정의 여러 경우, 소송 사건에는 두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양측 모두 권리의 일부를 주장할 수 있다. 법정은 한 편은 지지하고 다른 한 편에는 반하는 판결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의 법정도 마찬가지로 악인은 거스르고 의인은 지지하는 판결을 내릴 것이다. 의인을 옹호하는 판결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의인들을 알뿐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후에 그들은 심판에서 하나님께 옹호 받을 것이다. “옹호되다”가 다니엘 8:14에 사용된 동사의 의미 가운데 하나이며, 그 동사가 제임스왕역에는 “정결하게 되다”로, 새국제역에는 “재 봉헌되다”로 번역되어 있다.” - 윌리엄 H. 셰이, 풍요를 위한 성경 확대경 다니엘 제7~12장,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04), 157.

    6) “심판은 누가 죄를 지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롬 3:23) 그러한 관점에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대신 심판은 누가 용서를 받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용서받은 사람들에게 심판은 그들의 확신을 빼앗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재확인하는 것이다. 심판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위한 것이다(단 7:22).” - 로이게인, 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서울: 시조사, 2013), 249

    7) “재림 전 심판은 구원의 확신을 위협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의 결과는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심판은 “성도를 위한”심판이다(단 7:22). 심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우리의 죄를 영원히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킨다. 심판은 실제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다른 방식이다. 심판은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할지 거절할지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영접했는지 아닌지 우리의 행위를 보며 하나님이 우리의 선택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이다.” - 마르틴 프뢰브스트레, 2013. 제 4기 안식일학교 장년 교과, 성소, 130

    8) “다니엘 7장의 이 이상에 대한 문맥은 하나님 심판의 주된 초점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권세의 실체인 왕국들과 왕들”에게 집중된다. 이곳에서 짐승에 대한 심판은 그들의 멸망으로 귀결된다. 후에 7장은 이 같은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옹호 받는다고 말한다.” - 조드라브코 스테파노비치, 지혜자에게서 오는 지혜 다니엘서 주석, 김일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1), 252

    9) 다니엘 7장에 소개된 심판의 대상은 성도 (20-22, 25-27절)와 그리스도교 체제로 자칭하는 작은 뿔 (26절), 즉 참 하나님의 백성과 믿는다고 공언하면서 반역하는 두 종류의 사람을 다 포함한다(마 22:1-14). 이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7:22)과 원수들에 대한 파멸을 선언(7:26)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심판은 언제나 의를 옹호하고 불의를 정죄하는 것이듯이 재림 전 심판의 목적도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성도를 옹호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작은 뿔을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본질은 정죄가 아니라 속죄이며, 징벌이 아니라 보상이며, 멸망이 아니라 구원인 것이다(7:22, 27; 8:14).

    10) “조사 심판은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가를 하늘의 주민들에게 계시해 준다. 그것은 또한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러므로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승천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충성해 온 자들이 하늘 나라를 얻을 것을 선언한다.” -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8(서울 : 시조사, 2007), 427

    11) “마지막 대속죄와 조사 심판의 날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사건만을 다루게 된다. 악인들의 심판은 완전히 구별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 후에 집행된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벧전 4:17)할 것인가.” - 쟁투, 480

    12) “심판 때에 기록한 책들을 펼치면 예수님을 믿은 모든 사람들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 우리의 대언자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처음 생존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사건을 제시하신다. 각 사람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모든 사건이 세밀히 검토된다. 어떤 이름들은 가납되고, 어떤 이름들은 거절된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채 기록책에 죄를 남겨두고 있으면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그들의 선행의 기록도 하나님의 기념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출 32:33)고 선언하셨다. 선지자 에스겔은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면 …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겔 18:24)라고 말한다.” - 쟁투, 482

    3. 만일 다니엘 7장의 심판이 성도에 관한 것이라면, 왜 여기서는 핍박하는 작은 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까?

    1) 우리는 그 대답을 공의와 심판에 대한 히브리 개념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심판에는 무죄한 자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범죄자에 대한 형벌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심판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옹호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는 것 뿐 아니라(단 7:22), 악한 작은 뿔을 최후의 공의로 가져가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작은 뿔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악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심판은 진행될 것이며, 성도는 작은 뿔의 권세를 빼앗아 끝까지 멸망케 할 것이다(단 7:26).

    2)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 신 25:1

    3)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 - 왕상 8:32

    4) 위의 두 구절에서 우리는 다니엘서 7장에 나타난 대로 악한 자들이 심판 받고, 의로운 자들이 옹호 받는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심판이며, 왜 다니엘서 7장이 심판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던 작은 뿔의 세력이 멸망을 당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옹호 받을 뿐 아니라, 핍박하는 세력은 형벌을 받게 된다.

    5) 틀림없이 심판은 작은 뿔의 최종적인 멸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도 심판은 모든 지상 나라들의 종국을 가져온다. 심판은 단순히 작은 뿔의 종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재림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심판은 더 웅대하고 광대한 사건으로서, 성도의 원수를 멸망시킬 뿐 아니라 성도를 옹호하기까지에 이른다.

    4. 다니엘 7장의 심판에도 작은 뿔이 들어갑니까? 작은 뿔은 어떻게 심판을 받습니까?

    1) “(11) 그 때에 내가 작은 뿔이 말하는 큰 목소리로 말미암아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가 상한 바 되어 타오르는 불에 던져졌으며 (12) 그 남은 짐승들은 그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 단 7:11~12

    여기서 “뿔”은 자신의 “큰 말”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된다. 앞서 8절에서 “작은”이라는 말로 묘사되었던 뿔은 지상 왕국으로부터 나온 인간의 권세를 상징한다(단 7:7~8, 23~24).

    2) “(21)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 …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 단 7:21~25

    이 말씀에서 심판을 위해 펼쳐진 책들에는 작은 뿔이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는 말과 그분의 성도를 핍박했던 기록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한 평결은 “유죄”이다.

    3) “작은 뿔은 성도가 심판 받는 방식으로 심판받지 않는다. 그것은 정죄된다.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무죄한 자가 무고 당하는 문맥에서의 법정 소송에 관한 성경적 이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자들은 성전 법정으로 가서 그들을 판단하고(시 7:8; 26:1), 그들의 송사를 조사하여 옹호 받도록 해달라고 여호와께 구했다(시 7:9; 26:2). 악한 자는 법정에서 기소자로 기능했다(슥 3:1~4; 시 35:1). 의인들의 옹호는 악한 자의 악함을 확증하고, 의인들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 혼란을 야기한 자는 무력화되고 정죄되어 그의 세력이 제거되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 7장이 말하는 바이다.”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195.

    4) “하나님께서 로마교회가 수 세기 동안 행해 온 일들을 심판하시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인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 역사를 다룰 뿐만 아니라 그분께 대한 현재의 충성심이나 반역도 다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은 성소를 과거의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는 날일뿐만 아니라 바로 그 날에 죄 사함을 받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이 날에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비하게 하고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보여줄 기회를 가졌다. 이 날에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다니엘 7장과 8장에서 심판 또는 정결은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 동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을 대적한 “작은 뿔”의 권세를 정죄하고 깨뜨린다.”- 로이게인, 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서울: 시조사, 2013), 308.

    5)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옹호는 동시에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정죄를 가져온다. 요한계시록 18:20이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바벨론)에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옹호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사실상 악한 세력들을 정죄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의 피를 최종적으로 “심판하고 신원하시”는 때이다(계 6:10).”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203.

    6) “심판은 악인을 정죄하고 무죄한 자에게 승리를 안겨주며 그 승리를 축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무죄한 편에 속하며, 따라서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무죄하다고 선언하시고 그들을 원수들의 폭력에서 구하신다. 이런 판결의 결과로 악의 세력은 죄 있다고 선언되어 멸절된다. 그리하여 죄와 반역의 침입으로 분열되었던 우리의 세계와 우주에는 조화가 회복된다. 재판의 세 가지 기본적인 목적, 곧 진실을 밝히고, 무죄한 자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악한 자를 멸하는 것은 최종 심판에도 분명하게 적용될 수 있다.”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206.

    7) “다니엘 7장의 환상이 실제로 말하는 바는 양쪽 편에 대하여 모두 선고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용과 그것의 작은 뿔은 정죄를 받았고(11, 26),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다(22절). 성도들의 정당성이 입증된다. 심판에서는 작은 뿔과 성도 양쪽 모두를 조사한다는 뜻이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 마빈 모어, 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유동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5), 129.

    8) “그 심판은 배교적인 작은 뿔의 세력을 정죄하는 반면,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단 7:22)한 것이 된다. 진실로 이 심판은 우주 앞에서 하나님을 옹호할 뿐 아니라 그분의 백성도 옹호한다. 비록 성도들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겪어온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 때문에 멸시를 받고 핍박을 당해 왔을지라도 이 심판은 그런 것을 바로 잡아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눅 12:8, 9; 계 3:5 참조).” -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8(서울 : 시조사, 2007), 442.

    5.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2장의 용은 관련이 있는가?

    다니엘서 7장의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2장의 용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은 사탄이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은 “큰 용 …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고 말한다. 작은 뿔 자체가 사단은 아니지만 작은 뿔이 중세 교황권을 상징한다는 것을 역사주의 해석을 통해 알 수 있다.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12장의 비교를 통하여 다니엘서의 작은 뿔은 사탄의 대리자임을 알 수 있다. 사탄이 작은 뿔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다.

    6. 누가 우리를 참소하는 자인가?

    1)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 계 12:10

    2)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 단 7:25

    3) 다니엘서 7장 25절은 작은 뿔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을 보여주고,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서는 용, 즉 작은 뿔의 배후 세력인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탄의 공격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 자이다(계 12:10).

    7. 무슨 죄목으로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가?

    1) 욥기 1:6~11

    ①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 욥 1:6~11

    ② 사탄이 욥 1장에서 구체적으로 참소하는 것은 욥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2) 스가랴 3:1~4

    ①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 스가랴 3:1~4

    ② 스가랴 3장에서도 사탄은 여호수아가 자격이 없다고 참소한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무엇인가? 사탄을 책망하고 여호수아에게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면서 말한다.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 스가랴의 환상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완벽한 묘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로부터 제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히신다.

    3) 요한계시록 12:10

    ①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 계 12:10

    ② 계시록 12:10절에서 말하는 사단의 참소 역시 욥기나 스가랴에서서 말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8. 성도들의 죄를 왜 심판에서 들춰내는가? 심판 때 사탄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1) 다니엘 7장의 역사적인 초점이 중세 교황권의 이단재판소를 통한 하나님 백성의 박해에 맞춰져 있는 한편, 요한계시록 12장은 작은 뿔의 배후에 있는 권력이 사탄이며, 성도들에 대한 그의 공격에는 그들이 그분의 은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나님 앞에서 공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심판의 의미를 따지는 데 있어서 이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2) 하늘의 책들에는 하나님 백성의 생애의 기록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때에 그들의 행위가 선악 간에 드러날 것이다.

    3) 성도들의 죄를 심판 때에 왜 들춰내는가? 그것은 성도들의 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들춰내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들은 이미 그 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그것을 들춰내서도 아니다. 사탄이 그것들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 자이다.

    4) “예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동안, 사단은 그들을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고소한다. 사단은 그들을 의혹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자 진력해 왔다. 이제 그는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 그들의 품성의 결함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한 점, 곧 그들이 구속주의 영광을 더럽힌 것과, 바로 그 자신이 그들로 범죄케 한 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 쟁투, 484

    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와 믿음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주장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한 손을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 드시고 “내가 저희 이름을 압니다. 내 손바닥에 저희 이름을 새겼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충성된 백성들을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기 위하여 당신의 의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엡 5:27).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고 그들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 쟁투, 484

    6) “조사심판의 교리 그 자체가 반 복음이라는 것은 커다란 거짓이다. 오히려 재림 전 심판은 십자가를 무시하기는커녕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에서 성취하신 것을 더욱 완성 시킨다. 조사심판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십계명이 심판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은혜보다 율법을 강조하는 것처럼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19는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담고 있는 법궤에 강조를 둔다. 하늘 심판의 지상 모형인 레위기의 대속죄일에 일어났던 거의 모든 것이 율법이 아니라 피를 중심으로 삼고 행해졌다.” - 클리퍼드 골드스틴, 어린양과 사자 사이, 서만진 역(서울: 케루빔, 2000), 125.

    7) 최후의 심판에서 성도들의 죄를 검토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또는 천사들이 그것을 들춰내기 때문이 아니다. 사탄이 그것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기록책이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며, 천사들이 성도들의 생애를 다 검토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옳고 사탄이 틀렸다는 사실에 모두 만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참 성도들에 대한 사탄의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8) “예수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심판 때 아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들의 중보자께서 그들에 대한 사탄의 모든 고소에 대하여 하나하나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이 마치기 전에 하늘의 천사 각자는 사탄의 고소와 그리스도의 응답을 다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프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탄의 비난이 정확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 편에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실제로는 사탄의 편에 있었던 것이다(마 7:22, 23 ; 25:11, 12). 이런 자들은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천사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신뢰하는 성도 각자는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참으로 합당함을 예수께서 설명하실 것이며 그에 대하여서도 천사들은 동의할 것이다.” - 마빈 모어, 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유동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5), 61.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습 1:14)
    나는 준비되었는가? 그대는 준비 되었는가?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고 있으라!”(초기문집 64~67, 119)

    참고도서

    1. 게하르트 판들, 2004. 제 4기 안식일학교 장년 교과, 다니엘서 연구, 114~115
    2.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3.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8(서울 : 시조사, 2007)
    4. 에드워드 헤픈스톨, 우리의 대제사장, 하늘 성소의 예수 그리스도, 김일배 역(서울: 삼영 출판사, 1998)
    5. 마빈 모어, 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유동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5)
    6. 로이게인, 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서울: 시조사, 2013)
    7. 클리퍼드 골드스틴, 어린양과 사자 사이, 서만진 역(서울: 케루빔, 2000)
    8. 자크 B. 두캉, 다니엘 끝에 관한 이상, 임봉경 역(서울: 삼육대학 신학연구소, 2006)
    9. 마르틴 프뢰브스트레, 2013. 제 4기 안식일학교 장년 교과, 성소, 130
    10. 새라 엘리자벳 페크,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 권정행·김기봉·이성근 역(서울: 시조사, 2012)
    11. 리즐리 하딩, 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서울: 시조사, 1993)
    12. C. Mervyn Maxwell,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오만규 역(서울: 시조사, 1997)
    13. 조드라브코 스테파노비치, 지혜자에게서 오는 지혜 다니엘서 주석, 김일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1)
    14. G.E. 래드, 신약신학, 신성종·이한수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4)
    15. 게르하르트 판들 편, 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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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대상은 누구인가?
    (단 7:9~10, 13~14, 26~27)

    #. 이번 편에서는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 볼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파일 원문을 다운로드 하시고,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시리즈로 1.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2. 다니엘 7장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3. 다니엘서 8장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4. 다니엘서 9장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5.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6. 성소에서 말하는 재림 전 심판 7. 기타 ...

    #. 자료의 모든 내용들은 성경, 예언의 신, 아래 명시해둔 참고 목록 전체를 최근 다시 보고나서 이번 주제에 맞게 다시 보면서 편집한 것입니다. 가급적 모든 글은 각 단락에 출처를 명시하였습니다. 더욱 자세하게 살피고자 하신다면 필히 책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본 자료는 시간을 쪼개서 급히 기록하면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오타나, 편집 상 내용이 문맥에서 서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양해 바라고, 차후 버전 2, 3 등에서는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


    1. 다니엘 7장 심판의 배경

    1) “이 심판 장면은 작은 뿔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도입된다(11, 25). 이 뿔은 이미 3년 반 동안 성도를 핍박해 오고 있었다. 심판은 이 작은 뿔의 공포 통치가 끝나가면서 일어난다. 사실, 이 심판의 결과로 작은 뿔은 그 권세를 잃고 파멸된다. 인자와 성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받은 것도 바로 심판 후이다(27절). 이 이상의 장면은 성도의 핍박에서 심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간다. 다니엘 7장에 묘사된 심판은 작은 뿔이 파멸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수립되기 전에 일어난다.”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193.

    2) “대속죄일이 동시에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다니엘 8장 14절의 성소의 정결은 곧바로 다니엘 7장의 심판의 장면과 또 다니엘 2장의 초자연적인 돌 나라의 도래와 밀접히 평행하는 사건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다니엘서를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이런 평행 현상을 펼쳐 내는 것이다. 다니엘 7장의 심판은 하늘에서 대속죄일 곧 대 심판의 날이 시작될 때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시는 사건과 밀접히 비교되는 사건이다.” - C. Mervyn Maxwell,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오만규 역(서울: 시조사, 1997), 181.

    3) “다니엘 7장의 주요 초점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 백성을 핍박할 악한 종교 세력인 “작은 뿔”이다. 재림교회는 이 작은 뿔이 중세의 교황권을 대표한다고 본다. 다니엘 7장의 이상에서 작은 뿔의 행동은 이 세상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투쟁의 해결은 하늘에서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둘러선 가운데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심판의 형태 속에 나타난다. 이 심판은 작은 뿔로 대표되는 배도한 종교 세력을 정죄한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을 신원하고 이 세상의 왕국들을 “인자”와 그의 백성에게 넘긴다. 이것은 선과 악의 투쟁 즉 대쟁투와 그 해결의 축소판 그림이다.” - 마빈 모어, 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유동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5), 428.

    4) “다니엘 7장은 마지막 시대에 있을 재림 전 심판 곧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옹호하여(단 7:9~14, 22) 그들에게 약속된 나라와 권세를 주어 보상하고, 그분께 반역한 자들과 특히 박해하는 세력인 “작은 뿔”은 정죄하는 심판(단 7:26)을 묘사한다. 이와 함께 이 심판은 죄와 죄인을 다루시는 방법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옹호한다.” - 게르하르트 판들 편, 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3), 216

    5) “작은 뿔의 활동을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했다. 그 세력의 활동은 하늘의 성소, 곧 하나님의 정부의 심장부를 훼손하고 짓밟아 왔다. 그러나 다니엘의 이상은 하나님이 작은 뿔과 사단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게 해주는 재림 전 심판을 가리킨다. 갈바리의 빛 가운데서 사단의 모든 도전은 반박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옳다는 것과, 그분이 죄악 문제에 전혀 책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것이다. 그분의 품성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지고, 그분의 사랑의 정부는 재확인될 것이다.” -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8(서울 : 시조사, 2007), 442.

    2.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대상과 심판의 목적

    1) “다니엘 7장의 심판 장면에 사용된 기록들은 하나님의 종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데, 그들을 지지하는 심판이 베풀어지며(단 7:22), 그들이 우주 앞에서 옹호되고 나라를 받는다. 이것은 이 심판과 다니엘 12:1~2을 비교해 보면 확인된다. 미가엘은 영광의 왕국을 받기 위해서 일어난다. 그 일은 북방에서 온 원수가 패망한 후에 일어난다(단 11:45; 12:1). 그런 다음 성도들이 구원받고 부활이 일어난다(단 12:1~2). 영생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책에 이름이 기록된”자들이다(단 12:1). 다니엘 7장에서 논의된 심판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고 선언되는 옹호 심판이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고 선언되는 옹호 심판이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회와 인자와 우주 앞에서 베풀어진다. 이 회의의 심의사항은 모두 하나님의 지성적 존재들에게 공개되며, 하나님의 판결은 그 법정의 위원이 아닌 자들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부, 그분께서 죄와 구원을 다루시는 방법, 그분의 조치는 우주 앞에서 옹호하는 기능을 한다. 이 심판에서 하나님도 옹호 받는다(시 51:4; 롬 3:4).”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194~195

    2) “우리는 대속죄일이 하나님께 충성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분하셨던 심판의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 제사를 통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대속죄일 이전에 이미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대속죄일은 용서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용서를 굳게 붙들었고 어떤 이들은 용서를 버렸다.” - 로이게인, 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서울: 시조사, 2013), 189

    3) “마지막 심판의 첫 단계에 의도된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사면이였다. 하나님은 성도를 정결케 함으로써 죄를 철저하게 제거하여 고백된 죄들을 도말하고자 하였다. 죄를 분리케 하는 것이다(사 59:2). 죄가 제거됨으로써 화해(하나됨)가 실현된다. 죄의 마지막 기억이 사라짐으로써(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렘 31:34)절대적이고 영속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책들을” 조사하시는 것은 실패한 사람들을 골라내려는 의도가 아니라 끝까지 신실한 사람을 찾아내고자 함이다. 천년기 끝에 있는 무서운 심판에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이 선고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844년부터 시작된 재림 전 심판은 - 레위기 16장의 상징적인 대속죄일을 성취시키는 최종적인 대속죄일 – 드디어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는 감격적인 선포로 그 절정에 이른다. 그 끝에 예수님은 하늘을 떠나 땅으로 내려와 그의 성도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영생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이제 구약과의 또 하나의 평행 현상이 뜻 깊게 나타나고 있다. 옛 대속죄일에 생활을 심사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뿐이었다. 그 전 해 동안에 제물을 바친 백성들의 죄들만이 대속죄일에 도말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경계 너머에 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백성들은, 최소한 인간의 안목으로 생각할 때는 , 심사 없이 영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수 세기에 걸쳐 그의 진정한 이스라엘에 가담해 온 “진정한 유대인들”중에서 신실한 자를 찾아내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이시다.”(요 1:9) 조사 심판 즉 재림 전 심판의 기간에 심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때이건 또 어떤 식으로든 이 참 빛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해 온 사람들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 C. Mervyn Maxwell,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오만규 역(서울: 시조사, 1997), 237

    4) “다니엘 7장의 하늘의 법정은 실제적으로 “심판”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또 그와 같이 이해되어야만 한다(단 7:10, 22, 26). 단 7:10, 22, 26은 모두 같은 심판을 다루고 있고, 후에 나오는 22, 26절의 두 언급은 9, 10절에 나와 있는 심판에 대한 천사의 해석이다. 쟁투 가운데 있는 양편을 포함하고 있는 이 심판에는 하나님 백성의 승리와 적대적 세력의 파멸을 예언하고 있다(22, 26, 27). 이 심판의 본질은 양편을 포함해서 예언된 사건들의 문맥의 빛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다니엘 7장의 세 부분 모두는 심판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거의 없애려고 하는 지점까지 그들을 박해하는 반역한 종교적 세력의 뒤를 따라온다(10, 11, 21, 22, 25~27). 이 심판은 이러한 악의 세력들과 나라들이 더 이상 성도와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는 때를 정해 놓고 있다. 그들로부터 빼앗은 지배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에게 주어진 바 된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면, 거기에는 분명히 두 편이 있는데, 심판의 측면에는 하나님의 적에 대한 심판과 성도를 위한 심판이 있다. 1,260년 후에 따라오는 이 심판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이 양면을 다 포함시켜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항한 뿔의 잔혹한 활동의 긴 기간 때문에, 성도는 오랫동안 사람의 박해와 정죄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에, 그분의 성소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이 심판은 그들을 옹호하도록 역사의 선고를 역전시킬 것이다. 그러한 선고는 이 세상의 통치와 영원한 구원, 하나님 왕국의 회복의 약속과 함께 이루어진다.” - 에드워드 헤픈스톨, 우리의 대제사장, 하늘 성소의 예수 그리스도, 김일배 역(서울: 삼영 출판사, 1998), 108.

    5) “이 심판을 통해 기본적으로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1) 악인들이 파멸되고(단 7:11, 26), 2) 인자의 왕권이 재확인되며(단 7:13~14), 3)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상속 받는다(단 7:27). 천사가 설명하는 마지막 절(27절)은 성도가 지상에서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을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성도들은 ”인자를 섬겨 복종“할 것이다(27절). 14절과 27절은 서로 보완해 준다. 두 절은 영원한 나라에서 살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한다. 14절은 그들을 다스릴 자 곧 인자에 대해 말하고, 27절은 그들이 그분과 관계를 맺고 할 일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그분을 섬겨 예배하고 복종할 것이다. 이들 중에는 인간 법정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았던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늘 법정은 이런 잘못들을 시정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신 때를 언급한 22절의 의미이다. 인간 법정의 여러 경우, 소송 사건에는 두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양측 모두 권리의 일부를 주장할 수 있다. 법정은 한 편은 지지하고 다른 한 편에는 반하는 판결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의 법정도 마찬가지로 악인은 거스르고 의인은 지지하는 판결을 내릴 것이다. 의인을 옹호하는 판결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의인들을 알뿐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후에 그들은 심판에서 하나님께 옹호 받을 것이다. “옹호되다”가 다니엘 8:14에 사용된 동사의 의미 가운데 하나이며, 그 동사가 제임스왕역에는 “정결하게 되다”로, 새국제역에는 “재 봉헌되다”로 번역되어 있다.” - 윌리엄 H. 셰이, 풍요를 위한 성경 확대경 다니엘 제7~12장,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04), 157.

    6) “심판은 누가 죄를 지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롬 3:23) 그러한 관점에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대신 심판은 누가 용서를 받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용서받은 사람들에게 심판은 그들의 확신을 빼앗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재확인하는 것이다. 심판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위한 것이다(단 7:22).” - 로이게인, 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서울: 시조사, 2013), 249

    7) “재림 전 심판은 구원의 확신을 위협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의 결과는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심판은 “성도를 위한”심판이다(단 7:22). 심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우리의 죄를 영원히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킨다. 심판은 실제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다른 방식이다. 심판은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할지 거절할지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영접했는지 아닌지 우리의 행위를 보며 하나님이 우리의 선택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이다.” - 마르틴 프뢰브스트레, 2013. 제 4기 안식일학교 장년 교과, 성소, 130

    8) “다니엘 7장의 이 이상에 대한 문맥은 하나님 심판의 주된 초점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권세의 실체인 왕국들과 왕들”에게 집중된다. 이곳에서 짐승에 대한 심판은 그들의 멸망으로 귀결된다. 후에 7장은 이 같은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옹호 받는다고 말한다.” - 조드라브코 스테파노비치, 지혜자에게서 오는 지혜 다니엘서 주석, 김일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1), 252

    9) 다니엘 7장에 소개된 심판의 대상은 성도 (20-22, 25-27절)와 그리스도교 체제로 자칭하는 작은 뿔 (26절), 즉 참 하나님의 백성과 믿는다고 공언하면서 반역하는 두 종류의 사람을 다 포함한다(마 22:1-14). 이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7:22)과 원수들에 대한 파멸을 선언(7:26)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심판은 언제나 의를 옹호하고 불의를 정죄하는 것이듯이 재림 전 심판의 목적도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성도를 옹호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작은 뿔을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본질은 정죄가 아니라 속죄이며, 징벌이 아니라 보상이며, 멸망이 아니라 구원인 것이다(7:22, 27; 8:14).

    10) “조사 심판은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가를 하늘의 주민들에게 계시해 준다. 그것은 또한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러므로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승천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충성해 온 자들이 하늘 나라를 얻을 것을 선언한다.” -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8(서울 : 시조사, 2007), 427

    11) “마지막 대속죄와 조사 심판의 날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사건만을 다루게 된다. 악인들의 심판은 완전히 구별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 후에 집행된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벧전 4:17)할 것인가.” - 쟁투, 480

    12) “심판 때에 기록한 책들을 펼치면 예수님을 믿은 모든 사람들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 우리의 대언자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처음 생존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사건을 제시하신다. 각 사람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모든 사건이 세밀히 검토된다. 어떤 이름들은 가납되고, 어떤 이름들은 거절된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채 기록책에 죄를 남겨두고 있으면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그들의 선행의 기록도 하나님의 기념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출 32:33)고 선언하셨다. 선지자 에스겔은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면 …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겔 18:24)라고 말한다.” - 쟁투, 482

    3. 만일 다니엘 7장의 심판이 성도에 관한 것이라면, 왜 여기서는 핍박하는 작은 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까?

    1) 우리는 그 대답을 공의와 심판에 대한 히브리 개념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심판에는 무죄한 자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범죄자에 대한 형벌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심판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옹호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는 것 뿐 아니라(단 7:22), 악한 작은 뿔을 최후의 공의로 가져가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작은 뿔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악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심판은 진행될 것이며, 성도는 작은 뿔의 권세를 빼앗아 끝까지 멸망케 할 것이다(단 7:26).

    2)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 신 25:1

    3)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 - 왕상 8:32

    4) 위의 두 구절에서 우리는 다니엘서 7장에 나타난 대로 악한 자들이 심판 받고, 의로운 자들이 옹호 받는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심판이며, 왜 다니엘서 7장이 심판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던 작은 뿔의 세력이 멸망을 당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옹호 받을 뿐 아니라, 핍박하는 세력은 형벌을 받게 된다.

    5) 틀림없이 심판은 작은 뿔의 최종적인 멸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도 심판은 모든 지상 나라들의 종국을 가져온다. 심판은 단순히 작은 뿔의 종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재림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심판은 더 웅대하고 광대한 사건으로서, 성도의 원수를 멸망시킬 뿐 아니라 성도를 옹호하기까지에 이른다.

    4. 다니엘 7장의 심판에도 작은 뿔이 들어갑니까? 작은 뿔은 어떻게 심판을 받습니까?

    1) “(11) 그 때에 내가 작은 뿔이 말하는 큰 목소리로 말미암아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가 상한 바 되어 타오르는 불에 던져졌으며 (12) 그 남은 짐승들은 그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 단 7:11~12

    여기서 “뿔”은 자신의 “큰 말”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된다. 앞서 8절에서 “작은”이라는 말로 묘사되었던 뿔은 지상 왕국으로부터 나온 인간의 권세를 상징한다(단 7:7~8, 23~24).

    2) “(21)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 …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 단 7:21~25

    이 말씀에서 심판을 위해 펼쳐진 책들에는 작은 뿔이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는 말과 그분의 성도를 핍박했던 기록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한 평결은 “유죄”이다.

    3) “작은 뿔은 성도가 심판 받는 방식으로 심판받지 않는다. 그것은 정죄된다.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무죄한 자가 무고 당하는 문맥에서의 법정 소송에 관한 성경적 이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자들은 성전 법정으로 가서 그들을 판단하고(시 7:8; 26:1), 그들의 송사를 조사하여 옹호 받도록 해달라고 여호와께 구했다(시 7:9; 26:2). 악한 자는 법정에서 기소자로 기능했다(슥 3:1~4; 시 35:1). 의인들의 옹호는 악한 자의 악함을 확증하고, 의인들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 혼란을 야기한 자는 무력화되고 정죄되어 그의 세력이 제거되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 7장이 말하는 바이다.”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195.

    4) “하나님께서 로마교회가 수 세기 동안 행해 온 일들을 심판하시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인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 역사를 다룰 뿐만 아니라 그분께 대한 현재의 충성심이나 반역도 다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은 성소를 과거의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는 날일뿐만 아니라 바로 그 날에 죄 사함을 받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이 날에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비하게 하고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보여줄 기회를 가졌다. 이 날에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다니엘 7장과 8장에서 심판 또는 정결은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 동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을 대적한 “작은 뿔”의 권세를 정죄하고 깨뜨린다.”- 로이게인, 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서울: 시조사, 2013), 308.

    5)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옹호는 동시에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정죄를 가져온다. 요한계시록 18:20이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바벨론)에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옹호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사실상 악한 세력들을 정죄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의 피를 최종적으로 “심판하고 신원하시”는 때이다(계 6:10).”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203.

    6) “심판은 악인을 정죄하고 무죄한 자에게 승리를 안겨주며 그 승리를 축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무죄한 편에 속하며, 따라서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무죄하다고 선언하시고 그들을 원수들의 폭력에서 구하신다. 이런 판결의 결과로 악의 세력은 죄 있다고 선언되어 멸절된다. 그리하여 죄와 반역의 침입으로 분열되었던 우리의 세계와 우주에는 조화가 회복된다. 재판의 세 가지 기본적인 목적, 곧 진실을 밝히고, 무죄한 자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악한 자를 멸하는 것은 최종 심판에도 분명하게 적용될 수 있다.” -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206.

    7) “다니엘 7장의 환상이 실제로 말하는 바는 양쪽 편에 대하여 모두 선고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용과 그것의 작은 뿔은 정죄를 받았고(11, 26),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다(22절). 성도들의 정당성이 입증된다. 심판에서는 작은 뿔과 성도 양쪽 모두를 조사한다는 뜻이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 마빈 모어, 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유동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5), 129.

    8) “그 심판은 배교적인 작은 뿔의 세력을 정죄하는 반면,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단 7:22)한 것이 된다. 진실로 이 심판은 우주 앞에서 하나님을 옹호할 뿐 아니라 그분의 백성도 옹호한다. 비록 성도들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겪어온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 때문에 멸시를 받고 핍박을 당해 왔을지라도 이 심판은 그런 것을 바로 잡아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눅 12:8, 9; 계 3:5 참조).” -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8(서울 : 시조사, 2007), 442.

    5.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2장의 용은 관련이 있는가?

    다니엘서 7장의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2장의 용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은 사탄이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은 “큰 용 …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고 말한다. 작은 뿔 자체가 사단은 아니지만 작은 뿔이 중세 교황권을 상징한다는 것을 역사주의 해석을 통해 알 수 있다.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12장의 비교를 통하여 다니엘서의 작은 뿔은 사탄의 대리자임을 알 수 있다. 사탄이 작은 뿔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다.

    6. 누가 우리를 참소하는 자인가?

    1)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 계 12:10

    2)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 단 7:25

    3) 다니엘서 7장 25절은 작은 뿔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을 보여주고,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서는 용, 즉 작은 뿔의 배후 세력인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탄의 공격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 자이다(계 12:10).

    7. 무슨 죄목으로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가?

    1) 욥기 1:6~11

    ①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 욥 1:6~11

    ② 사탄이 욥 1장에서 구체적으로 참소하는 것은 욥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2) 스가랴 3:1~4

    ①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 스가랴 3:1~4

    ② 스가랴 3장에서도 사탄은 여호수아가 자격이 없다고 참소한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무엇인가? 사탄을 책망하고 여호수아에게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면서 말한다.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 스가랴의 환상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완벽한 묘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로부터 제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히신다.

    3) 요한계시록 12:10

    ①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 계 12:10

    ② 계시록 12:10절에서 말하는 사단의 참소 역시 욥기나 스가랴에서서 말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8. 성도들의 죄를 왜 심판에서 들춰내는가? 심판 때 사탄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1) 다니엘 7장의 역사적인 초점이 중세 교황권의 이단재판소를 통한 하나님 백성의 박해에 맞춰져 있는 한편, 요한계시록 12장은 작은 뿔의 배후에 있는 권력이 사탄이며, 성도들에 대한 그의 공격에는 그들이 그분의 은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나님 앞에서 공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심판의 의미를 따지는 데 있어서 이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2) 하늘의 책들에는 하나님 백성의 생애의 기록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때에 그들의 행위가 선악 간에 드러날 것이다.

    3) 성도들의 죄를 심판 때에 왜 들춰내는가? 그것은 성도들의 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들춰내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들은 이미 그 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그것을 들춰내서도 아니다. 사탄이 그것들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 자이다.

    4) “예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동안, 사단은 그들을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고소한다. 사단은 그들을 의혹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자 진력해 왔다. 이제 그는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 그들의 품성의 결함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한 점, 곧 그들이 구속주의 영광을 더럽힌 것과, 바로 그 자신이 그들로 범죄케 한 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 쟁투, 484

    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와 믿음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주장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한 손을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 드시고 “내가 저희 이름을 압니다. 내 손바닥에 저희 이름을 새겼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충성된 백성들을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기 위하여 당신의 의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엡 5:27).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고 그들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 쟁투, 484

    6) “조사심판의 교리 그 자체가 반 복음이라는 것은 커다란 거짓이다. 오히려 재림 전 심판은 십자가를 무시하기는커녕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에서 성취하신 것을 더욱 완성 시킨다. 조사심판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십계명이 심판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은혜보다 율법을 강조하는 것처럼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19는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담고 있는 법궤에 강조를 둔다. 하늘 심판의 지상 모형인 레위기의 대속죄일에 일어났던 거의 모든 것이 율법이 아니라 피를 중심으로 삼고 행해졌다.” - 클리퍼드 골드스틴, 어린양과 사자 사이, 서만진 역(서울: 케루빔, 2000), 125.

    7) 최후의 심판에서 성도들의 죄를 검토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또는 천사들이 그것을 들춰내기 때문이 아니다. 사탄이 그것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기록책이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며, 천사들이 성도들의 생애를 다 검토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옳고 사탄이 틀렸다는 사실에 모두 만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참 성도들에 대한 사탄의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8) “예수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심판 때 아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들의 중보자께서 그들에 대한 사탄의 모든 고소에 대하여 하나하나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이 마치기 전에 하늘의 천사 각자는 사탄의 고소와 그리스도의 응답을 다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프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탄의 비난이 정확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 편에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실제로는 사탄의 편에 있었던 것이다(마 7:22, 23 ; 25:11, 12). 이런 자들은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천사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신뢰하는 성도 각자는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참으로 합당함을 예수께서 설명하실 것이며 그에 대하여서도 천사들은 동의할 것이다.” - 마빈 모어, 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유동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5), 61.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습 1:14)
    나는 준비되었는가? 그대는 준비 되었는가?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고 있으라!”(초기문집 64~67, 119)

    참고도서

    1. 게하르트 판들, 2004. 제 4기 안식일학교 장년 교과, 다니엘서 연구, 114~115
    2. 앙헬 로드리게즈·로이 아담스, 성소 교리의 성경적 기초,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5)
    3.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8(서울 : 시조사, 2007)
    4. 에드워드 헤픈스톨, 우리의 대제사장, 하늘 성소의 예수 그리스도, 김일배 역(서울: 삼영 출판사, 1998)
    5. 마빈 모어, 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유동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5)
    6. 로이게인, 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서울: 시조사, 2013)
    7. 클리퍼드 골드스틴, 어린양과 사자 사이, 서만진 역(서울: 케루빔, 2000)
    8. 자크 B. 두캉, 다니엘 끝에 관한 이상, 임봉경 역(서울: 삼육대학 신학연구소, 2006)
    9. 마르틴 프뢰브스트레, 2013. 제 4기 안식일학교 장년 교과, 성소, 130
    10. 새라 엘리자벳 페크,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 권정행·김기봉·이성근 역(서울: 시조사, 2012)
    11. 리즐리 하딩, 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서울: 시조사, 1993)
    12. C. Mervyn Maxwell,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오만규 역(서울: 시조사, 1997)
    13. 조드라브코 스테파노비치, 지혜자에게서 오는 지혜 다니엘서 주석, 김일배·도현석 역(서울: 시조사, 2011)
    14. G.E. 래드, 신약신학, 신성종·이한수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4)
    15. 게르하르트 판들 편, 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임봉경 역(서울: 시조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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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철 2016.07.10 10:23
    조사심판(재림 전 심판) 1

    1. 조사심판이 있을 것인가?

    1) 성경에서 말하는 조사심판에 관한 성경구절

    ①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 전 12:14

    ②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 마 12:36~37

    ③ “(9)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 단 7:9~10

    ④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고후 5:10

    2) 예언의 신에서 말하는 조사심판에 관한 말씀

    ① “우리는 하나님의 최후의 크신 심판의 날에 가까이 가고 있다. 그때에 이 세상 사람들은 온 세상의 재판장 앞에 서서 그들이 행한대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조사를 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모든 사람이 다 조사를 받고 영원을 위한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 편지 112, 1909

    ② “심판을 위하여 정해진 때, 곧 2300주야가 마치는 1844년에 조사 심판과 죄를 도말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온 모든 사람들은 다 이 엄숙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다 같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계 20:12) 심판을 받아야 한다.”- 대쟁투, 486.

    ③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조사심판을 하시며, 마지막 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하늘 성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그들의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 주님께서는 하늘 지성소에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중보의 사업을 하고 계신다.”- 전도, 223 ; 리뷰 앤 헤랄드, 1883년 11월 27일

    2. 하늘에 책들(생명책/기념책/기록책/사망의 책)이 있는 이유 – 2015.11.14.(토) 설교 참고.

    “(9)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 (10)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 단 7:9~10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계 20:12
    1) 하늘에 책들이 있는 이유

    ① 하늘에 왜 책들이 있을까요? 하나님을 모든 것을 아시는데(전지) 책들의 정보가 필요 없는데 왜 하늘에 책들이 있는 것일까요? 이 책들은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보좌를 모셔 선 존재들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천사는 전지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그 정보를 생각해 내기 위해서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 법정 장면에 책들이 있는 목적입니다.

    ② 그리스도 재림에 앞서서 무슨 심판이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사들과 다른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으로부터 얻는 유익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그분이 내리신 결정을 천사들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데려가신 성도 한 사람에 대하여 천사 하나라도 무슨 의혹을 품는다면 온 우주를 경영하는 기초가 되는 사랑의 율법에 손상이 될 것입니다.

    2) 하늘 책들에는 어떤 정보가 들어 있을까요?

    ① 하나님의 백성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시 56:8 ; 말 3:16 ; 빌 4:3 ; 계 20:12~15 ; 계 21:27).

    ② 심판의 목적을 위하여 준비 되었다(단 7:10 ; 계 20:12~15).

    ③ 어떤 이름들은 이 책들에 남아있고 어떤 이름들은 지워질 것이다(출 32:32~33 ; 시 69:28).

    3. 조사심판의 목적(의미)

    1) “조사 심판은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가를 하늘의 주민들에게 계시해 준다. 그것은 또한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러므로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승천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충성해 온 자들이 하늘 나라를 얻을 것을 선언한다.” - SDA 기본교리, 427

    2)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에 나타나리라는 것은 성경적으로 분명한 사실이다(고후 5:10 ; 로 14:10~12). 오늘날 재림교회의 조사심판에 대한 아래와 같은 가르침도 성경적이다.

    ① 조사심판은 본질적으로 조사하는 성격을 가진다.
    ② 조사심판은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의 일생을 검토하는 일을 포함할 것이다.
    ③ 조사심판은 인간들이 살아간 일생에 대하여 당시에 심판을 내리신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들의 유익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④ 조사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가질 수 있었던 하나님의 받으심에 대한 확증을 위협하지 않는다.






    3) 조사심판은 악이 영원하지 않음을 증거 합니다. 우주적 이원론(선악이 영원히 공존한다는 생각)은 거부되고,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로 확증됩니다. 악은 종식되고, 그 후 그분의 자비와 공의를 찬양하는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피조물들의 환희의 외침이 이어집니다. 자비와 공의를 통해서만 죄와 악은 근절될 수 있습니다.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의 봉사가 끝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망과 원수들의 세력에서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러 오실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사탄을 상징하는 아사셀이 온 우주에서 죄와 악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식될 것이고, 그를 멸절하라는 명이 내릴 것입니다. 불화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승리는 절정에 달하고 거룩함과 부정은 영원히 분리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조화가 회복된 우주를 지배할 것입니다.

    4. 조사심판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무엇인가?

    ①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롬 3:20~24

    ②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도 완전하다. 우리 내면으로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이제 우리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의를 주시는 대가로 단 한 가지를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롬 3:22).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순간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결함이 많지만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의 때문에 우리가 완전히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신다.

    ③ “그는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 그는 우리 죄를 벗기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다.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 - 정로의 계단, 62

    ④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은 우리 과거의 죄들과 현재에 진행 중인 우리가 범하는 죄들 모두를 담당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현재 범하는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경험으로써 우리는 혼인이나 입양의 법적 상태와 유사한 영구적인 관계를 예수님과 맺게 된다. 남편과 아내가 혼인 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기는 하지만, 한편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는 어떤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때마다 혼인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합법적으로 입양된 아이가 부모를 거역한다고 해서 그때마다 법적으로 “파양”되는 것이 아니다.

    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도 깨어질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매번 죄를 범할 때마다 그런 것은 아니다. 계속 죄를 범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혼인을 맺고 있으며, 여전히 그 가족에 입양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신부이며 그분의 자녀이다.

    ⑥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여정에 예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곁에서 함께 걸으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은 우리가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때다마 우리의 손을 놓으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분은 몸을 굽혀 우리를 일으키시고, 계속해서 우리 곁에서 동행하시고, 다음번에 그 시험이 다시 올 때는 이겨낼 수 있도록 도우신다.
    ⑦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의향과 노력을 인간의 최선의 봉사로 받아들이시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공로로써 그의 결함들을 메꾸어 주신다.” - 1기별, 382

    ⑧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롬 5:1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심판

    ① 많은 사람들이 조사심판에 관해 생각할 때 두려움을 갖습니다. 매 순간마다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완전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며,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말하고, 계속해서 불안한 상태에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②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은 우리의 평생에 걸쳐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를 받으실 만하게 만드는 의를 제공하신다고 확증한다.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그분께 순종하는 데 헌신한다면 설사 우리가 실패할 때에라도 그분의 의는 우리를 덮으신다는 확신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고, 이러한 실패들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미칠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③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두려움에 근거하여 심판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행함으로 맏미암는 의’의 신학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는 것이 그가 “매 순간 바르게 사는 것”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올바르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경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그러나 올바르게 사는 것이 그분께서 우리는 받으시는 조건은 아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근거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일생의 다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심판 때 우리의 이름이 올라오는 때에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④ 우리가 심판 때 하나님 앞에서는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잠들어 있는지(우리가 심판 전에 죽었다면), 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여부에 달려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얼마나 잘 살았는가, 즉 우리의 선한 행실에 달려있지 않다.

    ⑤ “신자로서 우리는 심판의 매 국면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다. 바울의 마씀으로 우리는 확신한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우리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안심은 우리의 구주이며 심판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 신실한 자들은 주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분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분이요(요일 1:9), 우리의 하늘 중보자이시고(딤전 2:5 ; 히 9:15; 12:24), 우리의 빚에 대하여 우리 편에 서는 분이며(히 10:12~14), 그분의 공로로 우리는 담대하게 심판을 맞을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 4:16) 수 있다. 그분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요일 2:1)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중보자, 대언자이시며 대제사장과 맺은 관계가 우리를 심판 날에 담대하게 만든다.”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학편람, 845.

    3) 심판 때 우리의 행실은? - 2016.05.28.(토) 설교 (대속죄일과 그 원형) 레 16장, 23장, 쟁투, 399, 420, 422, 613, 660, 673 읽고 올 것.

    ① 심판 때 우리의 행위는 쓸모가 없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아래 성경절과 같이 우리의 행위가 심판에 고려된다는 사상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②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 전 12:14

    ③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고후 5:10

    ④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도말되기를 원치 아니하는 모든 사람은 그들의 은혜의 시기가 얼마 남지 아니한 오늘날 죄를 슬퍼하고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해야 한다. 그들은 심각하고 철저하게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부허(浮虛)하고 경박한 정신은 반드시 버려져야 한다. 지배권을 장악하고자 일어나는 악한 경향들을 이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 앞에는 반드시 격렬한 투쟁이 있다. 준비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할 일이다. 우리는 단체적으로 구원을 얻지 않는다. 사람의 순결과 헌신이 다른 사람의 그런 특성의 결함을 보충해 줄 수 없다. 비록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의 사건을 조사하시기를 마치 세상에 그 한 사람밖에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세밀히 하실 것이다. 모든 사람이 조사를 받되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야 한다.” - 쟁투, 489.

    ⑤ 성경과 엘렌 화잇의 저술들에서 공히 이와 같은 진술들을 평가할 때에는 그 진술들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심판 때에 구원 받는 자들의 입지는 결코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을 덮고 있다는 사실에 항상 근거한다.

    4) 심판 때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 – 2016.04.22.(금) 설교 원고 참고 할 것.

    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동안, 사단은 그들을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고소한다. 사단은 그들을 의혹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자 진력해 왔다. 이제 그는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 그들의 품성의 결함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한 점, 곧 그들이 구속주의 영광을 더럽힌 것과, 바로 그 자신이 그들로 범죄케 한 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 쟁투, 484

    ②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와 믿음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주장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한 손을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 드시고 “내가 저희 이름을 압니다. 내 손바닥에 저희 이름을 새겼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충성된 백성들을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기 위하여 당신의 의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엡 5:27).” - 쟁투, 484

    5. 조사심판이 주는 교훈

    1) 심판은 은혜의 복음이다.

    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 단 7:22

    ②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 단 7:26

    ③ 다니엘 7장에 소개된 심판의 대상은 성도 (20-22, 25-27절)와 그리스도교 체제로 자칭하는 작은 뿔 (26절), 즉 참 하나님의 백성과 믿는다고 공언하면서 반역하는 두 종류의 사람을 다 포함한다(마 22:1-14). 이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7:22)과 원수들에 대한 파멸을 선언(7:26)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심판은 언제나 의를 옹호하고 불의를 정죄하는 것이듯이 재림 전 심판의 목적도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성도를 옹호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작은 뿔을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7장의 심판의 본질은 정죄가 아니라 속죄이며, 징벌이 아니라 보상이며, 멸망이 아니라 구원인 것이다 (7:22, 27; 8:14).
    ④ 조사심판의 교리가 십자가를 무효화시키거나 복음을 부인한다는 주장은 성경을 오해한 것이다. 재림 전 심판은 그리스도가 갈바리에서 성취하신 것을 더욱 완성시켜 주는 것이다. 제물의 피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속죄일을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었듯이 십자가의 보혈만이 하늘 대속죄일을 통과하게 해 줄 수 있다.

    ⑤ “재림 전 심판은 인간 중심이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이다. 결정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개인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것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이다.” - Norman Gulley, "Daniel's Pre-Advent Judgment in Its Biblical Context," in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991): 59.

    ⑥ 심판 때에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이다. 우리가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조사심판을 이해하고 가르칠 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이 교리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약화시키는 가르침이 되고 만다. 조사심판은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십자가의 보혈과 연결되어 이해되고 소개되어야 한다. 하늘 지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은 십자가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십자가의 구원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이해함으로 더 부요해지는 것이다.

    2) 중보의 은혜를 힘입어 죄를 떠나야 한다.

    ①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히 4:14~16

    ②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에서 봉사하시는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그곳에 들어가 중보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쟁투, 433). 대제사장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다(1보감, 525).

    ③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이 신성과 인성을 연결시킬 하늘의 전류로 충전되기까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탄원하셨다. 예수께서는 끊임없는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으셨는데 이는 그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이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 소망, 363

    ④ 남은 백성은 죄 가운데 있으면서 용서만 구하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는 은혜를 힘입어 날마다 죄에서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늘 지성소에서 죄가 도말되는 동안, 우리 몸의 성전에서도 죄가 도말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하늘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동안 우리는 정결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쟁투, 425).

    ⑤ “하늘에서 조사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회개한 신자들의 죄가 성소에서 도말되고 있는 동안,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 쟁투, 425

    ⑥ 우리는 이미 받은 빛을 따라 날마다 더욱 온전한 순종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지성소 법궤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삶에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참 부흥과 개혁을 경험하게 된다(사 58; 말 3:10; 마 25:31-46).

    ⑦ “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그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초대 교회가 가졌던 믿음과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 쟁투, 478


    3) 심판을 묵상하고 깨어 준비해야 한다.

    ① 우리는 하늘 지성소에서 진행되는 조사심판의 광경을 자주 묵상함으로써 주의 재림을 위해 깨어 준비해야 한다(마 24:44; 25:13).

    ② “그러므로 심판이 시작되어 책들이 펴질 것과 마지막 날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서야 할 엄숙한 광경에 대하여 각 사람은 다니엘과 같이 자주 심사숙고하는 것이 참으로 긴요하다.”- 쟁투, 488

    ③ “심판 때에 기록한 책들을 펼치면 예수님을 믿은 모든 사람들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 우리의 대언자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처음 생존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사건을 제시하신다. 각 사람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모든 사건이 세밀히 검토된다. 어떤 이름들은 가납되고, 어떤 이름들은 거절된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채 기록책에 죄를 남겨두고 있으면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그들의 선행의 기록도 하나님의 기념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출 32:33)고 선언하셨다. 선지자 에스겔은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면 …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겔 18:24)라고 말한다.’”- 쟁투, 482

    4) 현대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 2014.12.06.(토) / 2015.07.19.(토) 설교 참고

    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위해 주신 예언의 기별을 전파해야 한다(단 7-12; 계 12-14).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조사심판을 십자가와 연결하여 전파해야 한다.

    ②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소 문제와 조사심판에 관한 문제를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크신 대제사장의 위치와 사업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이 시대에 필요한 신앙을 활용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차지하기를 바라시는 그 위치를 채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 그런 문제에 대한 빛을 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위대한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하늘에 있는 성소는 사람을 위하여 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업의 바로 중심이 된다. 그것은 세상에 사는 모든 영혼들과 관계가 된다. 그것은 구속의 계획을 밝히 보여 주고, 시대의 제일 마지막까지 우리를 데리고 가서 의와 죄 사이의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나타내 보여 준다. 모든 사람이 이 문제를 충분히 연구하여 그들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능히 대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쟁투, 488~489

    ③ 예언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곧 마치려 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세상에 이 복음을 신속히 전파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계 14:6-12; 마 24:14). 우리는 약속하신 늦은 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원한 복음을 세상에 능력 있게 전파해야 한다(행 1:8; 눅 11:13; 행 2:38; 행 5:32; 갈 3:2, 5; 엡 5:18; 사 60:1; 마 24:14; 28:18-20; 계 14:6-12; 18:1-4).

    ④ “영원한 복음”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 1:29)을 통해서 죄를 용서 받고 정결함을 받는다는 소식이다 (요일 1:9). 이것이 속죄소의 경험이다. 이러한 지성소에서 베풀어지는 대속죄일의 심판의 기준은 법궤 안의 율법이다. 그 율법의 중심은 넷째 계명, 안식일이다. 안식일을 준수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다.





    ⑤ 이제 구속의 마지막 과정인 하늘 대속죄일 봉사를 통하여 구속의 역사는 종결되려고 한다. 이 때 하늘 지성소에서 주시는 마지막 초청이 세 천사의 기별이다. 이 엄숙한 하늘 성소의 대속죄일의 의미를 깨닫고 경험하는 백성이 마지막 성도이다 (계 14:12).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이러한 예언적 신분과 역사적 사명을 자각한 무리이다. 그들은 마지막 세상을 향하여 ‘영원한 복음’을 큰소리로 외친다. 그들에게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지킴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전파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외치고 준비하도록 경고한다. 하늘 지성소 봉사가 마치면 주님은 재림하시어 우리는 하늘 초막절을 하늘 예루살렘에서 지키게 될 것이다 (슥 14:16; 히 12:22; 계 7:9-17). 그 이후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범죄와 함께 시작된 성소는 그 존재와 기능이 끝나게 될 것이다 (계 21:22). 천년기 동안 악인들의 조사심판을 마친 후 구원 받은 성도들은 불 심판으로 새롭게 된 지구로 되돌아 올 것이다(계 21:1-4).

    5) 영화를 경험해야 한다. - 2015.10.17.(토) 설교 참고.

    ① 하늘 대속죄일 봉사는 십자가 사역의 완성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하늘 지성소 봉사는 신자들의 영화의 경험을 가리킨다. 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그분의 율법과 붙어 있었다. 남은 백성이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첫째 천사의 기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계 14:7)고 말씀한다.

    ② 그러면 영광의 본질은 무엇인가?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영광은 자아 희생적(自我犧牲的) 사랑의 영광임이 드러날 것이다. 갈바리에서 비쳐 나오는 빛으로 볼 때 자아를 부정하는 사랑의 법칙이 이 세상과 하늘의 생명의 법칙임이 드러날 것이다 … 예수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주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영광임을 알 수 있다 …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이기적인 율법으로 나타낸다. 그는 우리 인간이 그 율법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애는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 소망, 19, 23

    ③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④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본질인 사랑의 봉사를 삶에 실천할 때, 우리는 율법과 함께 붙어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남은 백성의 사명이다. 예수의 생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애를 살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⑥ 우리는 대속죄일 시기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의 지성소 봉사를 통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남은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미 받은 빛을 따라 날마다 전체적인 순종으로 나가야 합니다. 지성소 법궤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회복함으로 참 부흥과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2016년 5월 20일(금) - 조사심판 2 – 각 시대의 대쟁투 중심으로 살펴 보는 조사심판
    2016년 5월 23일(화) - 조사심판 3 - 조사심판 질문과 답변
    2016년 5월 28일(토) - 대속죄일과 그 원형 – 마지막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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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e 2016.07.20 13:31
    14년 어느 봄날 내 나이 50세가 되어 드디어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16년 6월에 드디어 명확해진 진리, 영원한 복음을 함께 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죄 없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면 손을 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답은 손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모르거나 이해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예수를 안 믿는다는 뜻이다. 현 기독 교인들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왜냐 하면, 이를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 정말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도 단지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길 바란다. 원한다. 구원받길 추측한다’는 것과 꼭 같다. 정말 진실로 믿는다면 나를 변화시키고 펄쩍펄쩍 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내가 구상한 것도 아니요. 나에게 진리를 깨우쳐 주신 그분에 의함이요. 이를 글로써 현대의 손쉬운 인터넷을 통해 바로 언제나 필요할 때 복사하고 옮겨서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자!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이것은 녹음과 기쁨으로 소리를 글로 옮겨 적어 함께 나누어 놀라운 진실을 함께 하고 싶은 심정뿐이다. 성경에 무시무시한 율법이 있다 '간음한 자는 잡아서 돌로 쳐 죽이라'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는 율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즉, 그 진정한 뜻을 네가 아느냐 이다. 돌로 치라는 말의 뜻이 무엇 인가.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 뜻을 돌로 쳐죽이라고 하니까 짱돌을 집어서 들고 그 간음한 여자를 대리고 예수께 왔던 것이다. 그분이 누구 인데? 그 분이 바로 율법을 주신 분인데 말이다. 그 분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모든 죄인 대신에 자기가 피 흘려 죽어신 분이다. 그런 분이라면 정말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이 진짜 그런 뜻으로 썼을까? 아니다. 그래서 정말 큰 깨달음을 얻은 엘렌화잇은 율법은 하나님 품성의 사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성은 사랑이다. 그 율법은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라는 놀라운 복음을 전했다. 율법이 명령이지만 명령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품성으로는 명령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르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신다. "너희중에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 말은 그냥 너희중에 나쁜짓 안한 사람이 있으면 쳐봐라 이런 말이 아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죄없는자가 돌로 치란 말은 무슨 뜻일까. 죄없는자. 죄 없는 자가 있는가? 없다. 그럼 아무도 돌로 치지 말라는 뜻이겠네! 그러나 분명히 율법은 돌로 쳐 죽이라 그랬다. 죽인다는 것도 이상하고 돌로 친다는 것도 이상하고!.. 자기는 모든 죄인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분이 이렇게 죄를 지었다고 돌로 쳐 죽이라?? 그것은 그분의 품성의 사본이 아니다. 그렇지 않는가? 그러면 그 은혜로우신, 자기가 대신 피흘려 죽어실 만큼 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하라고 한 분이 그 죄인을, 그런 죄를 범했으면 돌로 쳐 죽이라. 그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결국 어떤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오직 도덕적인 율법에, 의무적인 요구. 즉, 하나님이 율법은 도덕적이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는 의무적 요구가 있다. 율법이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대속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라는 것은 말이 좀 안 된다. 그렇지 않는가? 대속의 본질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도 사랑이다. 그래야만 대속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지. 의무적인 요구들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율법을 안 지켜도 죄가 많은 곳에 더 사랑을 부어주면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어도 기꺼이 지켜 주게 된다. 내가 그 사랑이 너무 좋아서 자진해서, 감동해서 순종하게 될 때 정말 은혜와 율법의 순종이 하나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은혜와 율법이 명령과 약속이 하나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가르치면 정말 순종이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자.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니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 돌을 놓고 떠납니다. ‘그 돌하고 이 돌하고 좀 아닌 것 같다. 확실히 아닌 것 같다’고 느끼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떠난다. 예수님이 여자보고 뭐라고 말하는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여자는 회개 했는가? 예수님이 땅에 무언가 썼다고 했다. 무엇을 썼을까? 그들의 죄를 썼을 것이다. 그들의 죄는 무슨 죄일까? 그 돌이 예수라는 것을 몰랐던 죄를 쓴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간음한 다윗을 돌로 쳤다' 라고. 다윗을 용서했지 않는가 이다. 그러면 다윗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하지 않는가?. 다윗이 돌에 맞았는가? 안 맞은는가? 맞은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는데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다윗을 용서했다'라고 썼을때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보고 무엇을 느끼겠는가? "아! 그렇네! 돌로 쳐 죽이라 그랬는데 용서했네!" 그러면 돌로 쳐 죽이는 것과 용서하는 것과는 같은 뜻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헷갈려 하며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돌을 놓고 갔던 것이다. 예수님이 쓰시는 것을 보고 누가 그 돌이 예수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았을까? 그 여자이다. "간음한 다윗을 용서 하실 분이 바로 이분이었구나! 아! 이분이 바로 돌이었구나! 그러므로 이분은 다윗을 용서하신 분이므로 나도 용서하실 것이구나!"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을 보니까 살아있지 않는가! 죄와 사망의 율법이 그 여자에게는 성령의 생명의 율법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참 뜻을 알게 된 것은 바로 회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참 뜻임을 엘렌화잇이 1888년 이후에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배영한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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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e 2016.07.20 13:42
    율법은 형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계가 있고 법계 안에는 10계명이 있다. 법계 두껑에는 무엇이 있는가? 시은자가 있다. 시은자의 기능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은혜는 무엇을 근거로 베푸신다는 뜻인가? 법계 안에 계명이 있다면 은혜는 무엇을 근거로 베푼다는 뜻인가. 율법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 율법을, 계명을 근거로 해서, 계명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푸노라 하는 것이 지성소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 지성소가 어떻게 되었는가? 다니엘 8장을 읽어 보면 사단이 즉, 작은 뿔이 들어와서, 작은 뿔의 세력이 들어와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훼파했다고 하는데 . 어떤 신학자의 해석으로 실재로 제사라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즉, 안티오크레스 에프파노스라는 시리아 장군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파괴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다. 물론 또한 1844년 2300주야의 끝에 계속 속죄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면 매일 드리는 제사의 내용과 목적은 무엇인가? 매일 드림은 어린양이 죽는다는 내용인데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신다는 것을 매일매일 기억 하도록 하는 제사이다. 이것을 파괴한다는 것은 '다 이루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로 말미암아 구원을 하신다는 그 진리를 사단이 파괴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인간이 율법의 행함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지성소가 파괴되었다. 더럽혀졌다. 거짓으로 더럽혀졌다. '다 이루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로 말미암아 구원을 하신다는 그 진리를 사단이 파괴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지성소 속에는 더 이상 예수가 안 계신다. 매일 드리는 제사. 매일 피 흘리시는 예수가 없어진 것이다. 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훼파했으니까. 그리니까 이 지성소는 어느 날부터 누가 들어가셔야 되게 되어 있는가? 예수님이 다시 그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다시 확립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1844년이 이미 십자가에서 끝난 다 이루신 속죄를 계속하기 위하여, 조사심판을 하기 위해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왜 들어가셨겠는가. 그 사단의 거짓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가 없어진 것.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가 없어지고 그 지성소 안에는 행함으로 말미암은 義만 남은 것이다. 그것을 다시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로 다시 본래되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예수께서 들어가셔야만 한다. 그래서 1844년에 예수께서 지성소로 들어가셨다고 믿는다. 사단에 의해 더러워진 지성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정결"이란 단어는 1888년 이전에 엘렌화잇의 글에는 속죄할 때 정결이란 단어로 해석했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 이후의 지성소. 즉, 이미 휘장이 찢어져버린 지성소에서는 더 이상 속죄, 정결의 속죄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정결"이란 것은 "속죄"의 뜻이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본을 찾아보면 그 "속죄"란 단어가 “속죄”가 아니다. 그것은 "올바르게 하다, Justification"이다. 즉 틀리게 변질된 지성소를 올바르게 회복시키다 라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정말 지성소로 들어가서 행함으로 말미암은 義를 나타내던 지성소에 다시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한 엘렌화잇을 선지자로 그 사명을 띄게 하시려고 선지자로 삼았다. 그리고 지성소에서 또 회복해야 될 것은 10계명이었다. 그 당시 지성소에서는 무엇이 없어졌던가? 두 돌판에서 안식일 계명이 사라지고 없었다. 따라서 안식일 회복, 10계명 회복에 사명을 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엘렌화잇에게 꿈에 계시를 보여준다. 천사가 엘렌화잇을 지성소 안으로 들여보낸다. 들어가 봤더니 그 두 돌판 계명중 네번쩨인 안식일 계명이 환하게 빛나더라는 것이다. 즉 '나의 선지자 엘렌아! 너는 이 계명을 회복하라' 라는 뜻이다. 따라서 엘렌화잇이 제일 먼저 착수 한 것이 안식일 회복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회복하지는 못했었다. 이때 엘렌화잇의 설교를 아주 좋아하고 자기도 열심히 공부하던 젊은 의사이면서 목사가된 와그너 목사가 엘렌화잇이 주장하는 조사심판 등의 이론을 보고나서는 "아하!! 이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았다. 즉, 로마서 8장에 나오는것과 다른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는 내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성령의 생명의 법을 가지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때까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율법. 구원을 받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 안지키면 벌받게 되어 있는 그런 율법 즉, 몽학선생 아래 더 이상 있지 아니하고 이 율법을 자세히 보니까 그 안에 사랑이 가득하더라. 그래서 이 사랑을 내가 율법속의 사랑을 깨닫고 보니까 나는 너무나 기쁘다’라고 와그너는 고백하였다. 엘렌화잇은 1888년 10년전인 1878년에 '율법에는 범죄자를 용서할 힘이 없다. 즉, 율법은 용서할 힘은 없지만 정죄할 수 있는, 벌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라고 하였으며 , 1876년에 쓴 글에는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 하나님은 율법을 만들고 집행하신다. 즉, 형벌을 내리신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에 형벌이 없다면 율법은 힘이 없다'라고 썼다. 그러나 진실은 무엇인가. 율법에 사랑이 없다면 율법에 힘이 없다고 해야 하지않는가.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가 아닌 사랑의 통치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다 보면, 그 사랑을 받다 보면 우리는 도덕적으로도 더 우수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던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이고 율법에는 형벌이 있다고 하는 이 주장은 엘렌화잇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닫기 전인 1888년 이전의 견해 이었다. 1888년 이전에 계명은 즉, 도덕법은 아직도 의무적으로 지켜야 된다라고 이야기 했고, 이 몽학선생에는 도덕적 율법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가 지켜야 될 의무가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음이 즉,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는 믿음이 오기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얽매인바 되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 즉, 그 당시 율법이 몽학선생으로서 우리를 얽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라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를 얽매는 몽학선생 아래 더 이상 있지 아니하도다 라고 바울이 외쳤다. 즉, 이전에 이야기했던 와그너 목사하고 엘렌화잇과 다른점이 무엇인가 하면 엘린화잇은 도덕법은 몽학선생에 포함되지 아니한다이고 와그너는 모든 율법은 다 몽학선생이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 얽매이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은, 그 사랑으로 감동을 받아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마음속으로 부터 솟아나는 그 순종심으로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고 와그너 목사는 부르짖었다. 그러니까 엘린화잇은 당시 59~60세쯤 되었고 이때 와그너는 31~32세 정도였다. 이 젊은 목사가 건방지게 엘렌화잇에게 도전을 한 것이다. 엘렌화잇은 기분이 언짢았다. 와그너는 도덕법까지도 몽학선생이라고 외쳤으니까 교회가 흔들거리기 시작 했다. 그래서 심지어 엘렌화잇은 와그너에게 '그것을 너무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좀더 심사 숙고해라' 라고 편지까지 띄운다. 그런데 대총회장이 와그너 목사를 불러서 지금 교회가 흔들거리니 와그너말을 믿는 사람도 생기니까. 즉 교회의 분열조짐이 보이니까 대총회장이 와그너 목사에게 '자제해라. 선지자 엘렌화잇이 가르친대로 가르쳐라'라고 했을 때 와그너의 대답은 "대총회장님! 내가 천주교 교인이라면 그렇게 하겠다. 왜? 교황이 모호하다면 모호하다고 믿을테니까 그러나 나는 재림교인이다. 모든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내가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기별은 엘렌화잇이 주신 기별과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여 매우 심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혀 대총회장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총회장은 엘렌화잇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내말을 안 들어니까 당신이 직접 와그너 목사를 설득해서 더 이상 이 교회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해 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2년 동안 약 4~5차례 편지를 하였으나 엘렌화잇은 일체 그기에 대해 답장을 하지 않는다. 아마 엘렌화잇은 기도를 했을 것이라 생각 된다. 엘렌화잇은 2년동안 와그너 목사가 외치는 그 주장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1888년 그 유명한 미네아폴리스 대총회가 열린다. 그 때는 미국 전국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서 성경공부도 같이 하고 여러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약 2주동안에 걸친 대총회이다. 그기에 엘렌화잇은 와그너 목사가 왔으면 좋겠다. 여기와서 자기의 입장을 좀 밝혔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대총회장은 그게 싫었다. 그래서 엘렌화잇의 요청에 대총회장이 전혀 반응을 안했고 대총회장의 입장으로서는 와그너를 빨리 제거했으면 좋았다. 그래서 와그너 목사가 대총회에 와서 성경강의를 하고 설교하는 것을 전적으로 반대했다. 그런데 엘렌화잇은 와그너를 좀 부르면 좋겠다. 난 와그너의 말을 듣고 싶다. 이때 대총회장은 그 요청에도 불구하고 와그너 목사를 안부를 수가 없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모리슨 목사라는 젊은 목사를 시켜 “엘렌화잇의 글을 전부 뒤져라!. 뒤져서 와그너 목사가 하는 말에 반대가 되는 문구를 찾아라”라고 해서 모리슨 목사가 드디어 찾아냈다. 즉, 와그너가 주장하는 것과 엘렌화잇이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가 되는 것. 즉, 엘렌화잇이 1882년 사도행적194페이지에 쓴 글을 찾아 낸다. 그래서 그 글을 엘렌화잇에게 가져다 대밀었다. 와그너는 이렇게 주장하는데 당신은 이렇게 기록했다라고. 이때 엘렌화잇의 대답이 무엇이었냐면 "나는 결정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결정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썼을지라도 실수일 수 있다. 나는 와그너가 맞다면 와그너쪽으로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와그너 목사를 불러서 2주동안 엘렌화잇은 와그너 목사의 강의를 모두 듣는다. 그래서 엘렌화잇은 2주동안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사람들이 졸갑증을 낸다. "선지자님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으니 "아직도 미정이다" 라고 하고 2주 강의가 막 끝나자 마자 엘렌화잇은 "와그너 목사가 맞다"고 했다. 이때 교단이 난리가 났다. 대총회장을 위시하여 그 교회의 쟁쟁한 지도자들이 전부 엘렌화잇이 좀 이상해졌다. 변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어린 와그너에게 농락당했다라고 했다. 얼마나 창피 하겠는가. 그러나 엘렌화잇은 어떻게했는가. "급하다. 대총회 행정적으로는 자기의 이론의 정정을 허락을 하지 않을테니까 와그너 목사와 순회 전도를 하면서 전해야겠다" 하고 엘렌화잇과 함께 미국 순회 전도회를 하기 시작한다. 돌아다니면서 와그너가 외치고 엘렌화잇은 와그너 목사 말이 맞다고 주장 한다. 대총회장은 큰일 난 것이다. 거의 2년을 하다가 대총회에서 결정을 내린다. 아무래 안되겠다. 그래서 엘렌화잇이 호주로 보내지고 와그너 목사는 저 영국 스코틀랜드 시골로 보내졌다. 그래서 이 운동이 식어 졌다. 그러나 이 운동은 반드시 계속되어야만 했다. 엘렌화잇은 선지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그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잃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자기가 가르쳤던 것을 "난 생각이 바뀌었다"라고 하니까 신뢰가 떨어져 버렸다. 이것을 무릎쓰고서라도 엘렌화잇은 진리를 옹호 했다. 진리를 위하여!! 이 교회역사. 조지나이트 교수가 쓴 앤드루스의 교회사를 쓴 문헌들을 보면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렇게 수모를 받고 그리고 사실상 쫒겨나갔는데도 엘렌화잇은 전혀 대항하지 않는다. 엘렌화잇은 자기가 안식일 교단의 교인이기 때문에 대총회의 결정에 나는 승복한다고 하고 호주로 갔다. 호주에 가서 9년을 그 곳에 있으면서 쓴 책이 '시대의 소망'이다. 그래서 '시대의 소망'을 봐야 한다. (배영한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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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e 2016.07.20 14:02
    이’시대의 소망'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9년동안 이 안식교단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선지자는 쫓겨났고 교회 영적 지도자들이 서로 싸웠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엘렌화잇을 다시 불러라 하여 그래서 엘렌화잇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교회가 너무 혼란이 심해 행정적으로 바로 잡는데도 큰 힘이 들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 놀라운 1888년 교회의 운명이 달린 그 기별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중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이 와그너 목사가 젊어서인지 젊은 나이에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와그너가 1888년 엘렌화잇을 깨우쳤던 그 기별이 신뢰할수 없는 기별인 것 처럼 오해를 받아서 파묻히고 만다. 이러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1888년의 그 하나님이 주신 기별을 다시 우리 한국에서도 빛을 보게해서 이제 새롭게 우리교단이 엘렌화잇의 새로 다시한 예언을 통해 정말 부흥하도록 해야 한다. 엘렌화잇은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는 손에 손잡고 행한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보충한다. 그리스도의 義의 복음이 없는 율법은 죄인을 구할 수 없다'고 썼다. 1888년 이전에 엘렌화잇이 쓴 글에는 '율법에는 죄인을 용서할 힘이 없다'고 했고 지금은 '복음이 없는 율법은 죄인을 구할 수 없다' 즉, 복음이 있는 율법은 죄인을 구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엘렌화잇의 율법에 대한 견해가 갑자기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점진적 계시. 즉, 천천히 또박또박 다시 깨달음을 받아서 발전해나가는 점진적 계시가 아니라 1888년을 기점으로해서 엘렌화잇이 변화된 것은 점진적이 아닌, 사도바울의 다마섹 경험을 한 것과 같은 그런 체험을 한 것이다. 복음과 율법은 완전한 전체이다. 율법을 사랑으로 인식하면, 율법을 약속으로 인식하면, 우리마음에 순종심이 발로된다. 그러나 율법을 의무로 인식하면 율법주의가 된다. 1900년 엘렌화잇이 쓴 글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하시고 공평한 사랑과 자비가 구현된 것. 즉, 구원의 완성이 된 것을 보게 될 때 "다 이루었다"를 보게될때 죄인의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고 싶은 고마운 마음이 생기게 된다' 라고 썼다. 그래서 드디어 율법에는 구속력이 있고 의무적으로 순종하기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라는 이러한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당신의 품성의 사본인 율법가운데 나타났으며 인간이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化할때까지 주님의 변화케 하시는 능력이 영혼을 감동시킬 것이다' '모든 세계를 존재하도록 불러내신 창조력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생명을 낳게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명령은 하나의 약속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에 의지하고 심령이 명령, 이 약속을 받아 들이면, 이로 인해 무한하신 그 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이르러 오게 된다. 이와 같은 일로 사람의 품성이 변화되고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이다' 라고 썼다. 이 것은 곧 요한복음15: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 제1호는 "빛이 있으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기에게 한 명령으로 나는 빛이 있게 이 흑암속에, 공허속에 내 사랑이 있게 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했는데 이것도 누가 누구에게 한 명령인가? 죽은 사람이 명령을 알아 듣지 못한다. 이것은 나는 나사로를 ,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어 걸어 나오게 하겠다는 자기한테 한 약속이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명령은 약속인 것이다. '정로의 계단'에 이렇게 엘렌화잇이 썼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하고 의무적으로 지키려하고, 옳은 품성을 닦아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자칭하는 자들이 있다 ' 현재의 우리들을 일 컫는 것 같다 ' 저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달음으로 감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무적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을려고 하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은 깨달음으로 감동하지 못하고 다만 저들은 천국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인해 의무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이행하려고 한다. 이러한 신앙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신앙이다'라고 썼다. 이와 같이 초기 1888년 이전에 쓴 글과는 180도 다르다. 이것은 점진적으로의 엘렌화잇의 견해가 바뀐 것 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율법에 나타나신 것과 같은 하나님의 품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품성이 나타나 있다. 당신의 율법은 당신의 품성의 사본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이었고 동시에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라고!. 그렇다!. 그래서 율법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은 사랑이고 율법은 공의이다라고 하지 말자. 공의라는 말의 뜻이 너무너무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 율법, 복음, 품성은 같은 의미 이다. 신학교 교수들이 학생들이 하는 질문가운데 가장 질문을 안해주었으면 하는 질문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이다. 그러나 이제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엘렌화잇은 義를 다음과 같이 정의 했다. '義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 하는 것이다'라고. 이 말은 다시 말해서 義는 公義하고 같은 말이다 (의=공의=righteousness). 공의라고 할 때는 어떤 공식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義는 義이다. 義는 율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義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시편4:1, 7:17, 17:1 , 17:15, 35:24, 143:1, 143:11 참조하기 바람)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이며....' 따라서 공의도, 사랑도, 율법도 같다는 말이다.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즉, 계명이 곧 사랑이다 . 계명대로 사랑할 것이다. 나의 명령, 계명이 영생인줄 알라. 이 명령을 받아 들이면 그 분의 생명이 된다. 모든 명령, 율법은 하나의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義는 사랑이다. 義는 계명에도 나타나고 그 계명. 율법에는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그 계명에는, 그 율법에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면 義나 사랑이나 공의는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義와 율법은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義도 사랑이요. 율법도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공의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義와 율법이 분리되면 사랑과 공의도 분리된다. 즉, 義가 사랑이고 율법은 공의이지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과 율법은 분리되어 버린다. 그러면서 균형을 취하라고 한다. 엘렌화잇의 '시대의 소망'에 '사단이 주장하기를 모든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한다. 이것이 사단의 공의 이다. 우리는 사단의 공의를 이야기 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엘렌화잇은 그것은 사단의 공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의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하신것처럼 면제해 주신다면 그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사단이 주장하는 것이다 ' '사단은 하나님께서 아직도 죄인들에게 은혜를 나타내시고 계시므로 그분은 공의로워질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엘렌화잇은 주장했다. 우리는 이러한 선지자를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대의 소망'에서 이렇게 기록 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단의 공의와 하나님의 공의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왜? 우리는 십자가의 구속의 계획 즉, "다 이루었다"를 복권 당첨된 만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사단의 공의를 정의 하면 범법자를 형벌하는 것이 공의다 그리고 범법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공의가 아니다. 이것이 사단의 결론이다. 자! 우리는 빨리 이것이 알려져야 한다!. 엘렌화잇의 글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인지. 이것은 재림교인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모든 교인들에게도 , 기독교인에게도 필요하고 이것은 온 세상이 알아야 되는 영원한 복음이다. 이사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사야44:22와 같이 죄는 용서되었고 구원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교단은 죄의 용서와 죄의 도말 즉 속죄와 분리했다. 즉, 십자가에서는 죄의 용서가 되었으나 죄는 아직도 도말 되지 않았다. 죄의 도말은 지성소에서 지금도 도말중에 있다. 죄가 기록되었으니 죄를 지워야 한다는 이단적 발상을 하고 있다. 속죄란 죄를 용서한다. 죄를 취소한다. 죄를 도말한다. 죄를 없앤다. 모두 같은 말이다. 디모데 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전부터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즉 자격이 없어도 베푸는 은혜로 , 즉, 구원은 자격이 없어도 주는 은혜대로,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은 전적으로 사랑으로 구원을 주셨다. 그러나 아직도 죄는 도말되지 않았다고 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정죄는 면했지만 (이것이 조사심판 교리의 핵심이다) 피로 정죄는 면했을 지라도 우리들의 죄는 도말되지 않았다고 한다. 용서와 도말은 같은 뜻이다. 그런데 이것을 누군가 용서와 도말을 서로 두 다른 사건으로 나누어 버린 것이다. 이사야 44:22에 완전 도말하여 구원했다는 피눈물나는 호소를 등뒤로 돌리고 십자가에서는 정죄는 면했지만 앞으로 회개할 일이 많지 않느냐. 너희들의 모든 죄들이 지금 책에 다 기록되어 있다라고 한다. 책에 기록하는 사람들은 왜 기록하는 것인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하기 위해서란 말이다. 즉, 혹시 빠진게 있어서 안 놓칠려고, 그래서 기억하기 위하여 기록한다. 하나님이 그런 분일까요? 성경에는 뭐라고 했나? 내가 네죄를 다 도말하였느니라. 그리고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 하리라 즉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 하리라 고 기록되어 있다. 재림교단에서 가르치는 조사심판의 핵심이 죄가 기록되어 있답니다.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것까지 지워야 된다는 것이다. 그 말은 무엇인가? 제단에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는 죄가 지워지지 않았다 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이해하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십자가에서는 용서는 받았으나 도말은 되지 아니 하였다이다. 무엇을 도말했는데? 책에 우리들의 죄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회개한 죄는 도말되고 회개하지 않은 죄는 그대로 남아서 나중에 최종 운명을 결정하는데 나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엘렌화잇의 글이다. 내가 그것을 처음 소개 받았을때 앨랜화잇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어!! 이상한 소리를 했네.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 할 수 있는가!! 십자가가 뭐 그렇냐? 십자가에서는 회개를 요구하고 하나님이 피흘리셨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피를 받아 들이면 우리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회개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십자가 이다. 회개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너의 죄의 책에서 너의 죄를 지울 것이다라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러나 1888년 이후에 엘렌화잇이 평소에 하던 복음하고 1888년 이전의 엘렌화잇이 주장하고 있었던 조사심판 이야기기 하고 다르다. 그런데 이 차이점을 과감하게 명확하게 밝히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었으나 그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이었으나 교단에서 제거 했다. 잘렸던 것이다. 이의를 제기 못했다. 왜냐하면 조사심판은 이 안식교단의 근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조사심판은 명확하게 십자가와 상반대므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교단이라면 이단이다. 그러나 이 교단의 창시자 엘렌화잇이 옛날에는 조사심판을 가르쳤지만 1888년 이후의 '시대의 소망' 이나 글들을 보면 더 이상 조사심판을 가르치지 않는다. 엘렌화잇은 자기의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느니라라는 히브리서 9:12를 '시대의 소망'에 직접 인용까지 했다. 모든 속죄는 십자가에서 끝났다고 엘렌화잇이 선언하였다. 그래서 대총회에서는 안식일 교단이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 월터마틴의 요구에 의해 만든 기본교리27에 안식일 교단이 이단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안식일 교단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단이면 어떠냐. 왜 옛날 가르침을 희석시키느냐라고 에멜 안드레슨을 필두로한 미국 개인 보수선교 단체가 일어나서 대총회를 매우 힘들게 했다. 이 후 아마도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것 같은 피어슨 대총회장으로 새로 바뀌면서 기본 교리27의 출판을 중지하라고 했을 정도로 안식일 교단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이 후 조사심판에 대해 권위 있는 SDA의 성경주석 책을 만드는데 편집장이 부편집장인 레이먼 코트렐 교수에게 의뢰를 했는데. 특히 다니엘 8장의 2300주야와 조사심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확실히 해서 주석을 만들어라고 지시했고, 레이먼 코트렐은 열심히 해서 드디어 발견한 것은 "성경적으로는 조사심판을 합리화 시킬 수 없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조사심판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라는 것이 현재 오늘날 우리교단의 입장이다.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보는 성소론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닫고 유대인들이 보던 행함으로 말미암은 義의 성소론을 완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의 성소론으로 바꾼책이 히브리서이다. 바울은 “와!! 내가 이 성소론을 완전히 엉터리로 보고 있었구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믿고 있던 성소론은 '속죄양의 피로 용서는 받았으나 지성소 봉사에 가서는, 즉, 성소봉사 동안은 개인과 개인의 죄를 회개하라. 그리고 성소봉사가 끝나서 지성소 봉사가 시작할때는 너와 하나님 사이의 죄를 회개하라.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유대교의 성소론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이미 다 끝났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속죄는 다 끝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레이먼 코트렐 교수가 평집장에게 보고 했다.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이다. 현재까지 히브리서에는 조사심판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윌리암 존슨이 쓴 히브리서를 보면 '조사심판은 히브리서에 나와 있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1844년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대속죄일 즉, 지성소 봉사에서는 회개해서 구원을 결정하는 날이 대속죄일이다. 따라서 무엇하고 비슷하게 들리는가? 우리교단이 근간이라고 말하고 있는 조사심판하고 다를 것 하나도 없다. 왜 십자가가 대속죄일에 가서 그렇게 되어 버렸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전에 심판은 있다. 즉, 분명히 있는데 그 심판은 재림전 심판이다. 그 심판은 속죄과정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심판이다. 성소봉사는 제단부터 지성소까지 100% 피의 은혜이다. 피의 은혜가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속죄만 하고 구원만 하는 것이다. 구원을 끝내야만 즉, 죄를 없애고 구원을 해 놓아야만 심판을 할 수 있다. 왜? 구원을 하지 않으면 심판할 이유가 없다. 왜? 인간들은 모두 죄인인데, 모두 사망에 거하고 있는데 모두 정죄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3:17에 내가 세상에 온것은 심판(Condemn;정죄)하러 온게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한다. 왜? 너희들은 이미 정죄속에, 사망속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심판(judgement)하러 왔겠는가. 일단은 무엇을 해놓고 보자는 것인가? 즉, 구원을 해놓고 심판(judgement)이 필요하다. 그것은 주관적일 수 없다. 특히 그것은 사단 때문에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즉, 우리를 봐라. 하는 꼴을 봐라, 행위, 행동하는 것을 봐라. 사단이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구원받을 사람이 아니다. 즉, 그것은 행동으로 행위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은 구원이 이미 끝난 다음에 일이다. 그러면 구원이 끝난 다음에 행위로 판단하려면 어떤 기간이 필요하지 않는가? 그 기간 동안에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기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 이 기간이 심판(judgement)의 기간이다. 그래서 이사야 44:22 다음에 이사야 44:23에 하늘아 노래할 지어다 라고 기쁘한다. 100%은혜로 구원 했지 않는가! 우리의 공로, 우리의 회개없이 구원을 하지 않았는가? 대속죄일이 끝나고.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부르짖었을때 대속죄가 끝나고 우리의 삶은 초막절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 우리교단은 아직도 우리가 초막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안식교단은 아직도 초막절이 아닌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의 죄는 도말되지 않았다고, 우리들의 구원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견해이고 이는 십자가의 상반대는 가르침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교단의 굉장한 슬픈 일이다. 초막절은 노래하고 잔치하는 절기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의 절기이다. 그래서 이 초막절에는 잔치에 누구를 초대하라고 했는가. 이방인도 초대하라고 한다. 즉, 하나님도 모르는 이방인도 초청하라고 했다. 그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어린양 예수는 피흘려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초대하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대속죄일의 기쁜 소식을 그들 이방인들에게 가르쳐서 같이 기쁘해라는 것이다. (배영한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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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e 2016.07.20 14:04
    . 1888년 엘린화잇이 와거너 목사를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닫고 세 천사의 기별이 다시 태어나게 된다. 1888년 이전에는 엘렌화잇이 얼마나 조사심판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에 반대되는 글을 많이 썼던가!! 그러나 1888년 후에 바뀐것은 증명할 수 있다. 조사 심판은 더 이상 십자가와 일치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안식교 교단에 근간이 될 수 없다. 조사심판이 바뀌지 아니하면 안식교의 근간은 너무나 불안정한 근간이 된다. 안식교의 근간은 사실상 조사심판과 세 천사의 기별이라고들 한다. 부편집장인 레이먼 코트렐 교수가 편집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사심판이 성경적으로 증명 불가능하다' 라고. 편집장이 보고 받고 미국 전국의 성경 교수들에게 편지를 하여 다시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따라서 총 27명에게 편지하여 도움을 청한 결과 '우리도 조사심판이 성경적으로 증명 불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안식교 교단은 큰일난 것이다. 큰 문제이다. 교회근간이 되는 조사심판이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니!! 이 문제를 대총회장에게 보고를 했다. 대총회장도 보고를 받고 큰문제로 인식했다. 그래서 대총회장이 안식교 교단의 최고의, 세계적으로 최고 신학자 14명을 모아서 다니엘서의 예언 해석의 문제점 (조사심판 예언의 문제점) 관련 집중적으로 연구하라고 하여 5년간 연구를 깊히 한 결과 '불가능'으로, '성경적으로 해석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냈다. 다니엘서 문제에 대한 조사 위원회의 5년후의 보고서를 정식으로 제출되면 교단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하고 끝나버렸다. 조사심판에 대한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엘렌화잇은 1888년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탁 받아 들이면서 “와!! 바로 이것이야 말로 진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고 말했다. 윌리암 밀러의 조사심판의 주장이 안식교의 근간이라고 하는데 윌리암 밀러는 자기자신의 기별을 사실 폐기처분한 사람이다. 그러나 엘렌화잇은 윌리암 밀러의 뿌리를 꽉 박고 있었다. 따라서 엘렌화잇의 1888년 이전 옛날 세 천사의 기별은 이러하였다. 1) 첫째천사의 기별은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이다. 예수님은 곧 오신다 이다. 윌리암 밀러는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을 심판으로 보았다. 그래서 곧 심판은 온다 이고 2)둘째천차의 기별은 재림운동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는 바빌론이다. 그러니까 그런 교회는 다니지 말고 나오시오! 그리고 재림운동에 참여 하시오! 라고 했다. 그 당시의 첫째 천사와 둘째 천사 기별은 요즘은 사용불가이다. 웃기는 세천사의 기별인 것이다. 즉, 3)셋째 천사의 기별은 곧 오신다. 그때가 1843년 10월 22일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 안 왔다. 그래서 엘렌화잇이 수정했다. “아!!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조사심판을 하신다”라고 했다. 엘렌화잇은 그때 조사심판이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주장하고 윌리암 밀러에게 보고 했다. 윌리암 밀러는 동의 하지 않는다. 엘렌화잇은 또 안식일을 발견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윌리암 밀러는 반대했다. 윌리암 밀러는 죽었고 엘렌화잇은 초기 문집에서 이렇게 썼다. '윌리암 밀러는 세 천사의 기별, 특히 새째 천사의 기별. 즉, 조사심판과 안식일은 거부하고 죽었지만 나는 그가 재림의 날 부활하여 구원 받을 것을 확신하다. 그리고 밀러의 무덤을 천사가 지키고 있다' 라고 했다. 엘렌화잇은 윌리엄 밀러가 이 기별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고 주위의 사람들로 부터의 압력에 의해 거부당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주위의 사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반대 한 것이다. 그래서 세째 천사의 기별은 조사심판이 되었고 이것은 1888년 이전의 세 천사의 기별이다. 이 기별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대로 오늘도 이 세 천사의 기별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 아무도 받아 들이 수 없다. 조사심판이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다. 오늘의 셋째 천사의 기별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이다. 이것은 엘렌화잇이 바꾸었다. 언제인가? 1888년에. 왜?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알았으니까 바꾼 것이다. 1888년말 어느날 엘렌화잇은 외쳤다. “참 새째 천사의 기별이다. 난 진짜 셋째 천사 기별을 발견했다” 라고 했다. 그 동안 1844년의 조사심판을 예언하고 1888년의 44년 동안 가르쳐왔던 셋째 천사의 기별이 변해 버렸다. 왜?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 때문에 변했다. 그러면 조사심판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는 같다 인가, 틀리다 인가. 틀리다 이다.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1888년 이후는 조사심판이 셋째 천사의 기별이 아니다. 왜? 무엇 때문에? 1888년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닫기 전에는 조사심판이 셋째 천사의 기별인 것으로 잘못 알았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탁 깨닫고 야!! 이게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하고 자기의 조사심판 기별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의 기별과 일치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는 회개이고, 순종이고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않고 100%은혜로 죄를 도말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심판 기별에는 이 말은 못하게 되어 있다. 지금 현재 반박하는 사람들의 글들을 보면 '걱정하지 마라. 이 심판이라는게 모두 옹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검사는 사단이고 판사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 변호사니까 검사를 따 돌릴 수 있다. 판사와 변호사는 부자지간이니까 그러니까 뭘 걱정하느냐'라고 한다. 그러나 심판이란 것이 객관적이라야 한다. 사단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사단이 뭐라고 할까? 픽 웃는다!! 그게 뭐가 심판이냐라고!! 그것은 공의롭지 못하다. 심판은 공의로운, 객관적인 차원에서 진짜 이 사람의 행위가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고 있느냐, 없느냐를 객관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객관적이란 것은 생각이 어떻든 말든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아니냐 이다. 행위로 나타나느냐 . 안 나타나느냐 그것이 심판의 기준이다. 엘렌화잇은 리뷰엔 헤럴드에 '여러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의 기별이 세째 천사의 기별인지 묻는 질문을 나에게 보냈다. 나는 그 기별이야 말로 참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라고 했다. 지금까지 가르쳐 왔던 조사심판은 참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1888년 셋째 천사의 기별이 바뀐 것이다. 즉, 조사심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義로 바뀐 것이다. 1888년에 내려진 더 중요한 결론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는 십자가의 피를 믿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회개했던 안했던 상관없이 구원한 것이고 조사심판는 십자가를 너무 축소시킨것. 십자가와 상반된 것이라는 것이다. 1888년 안식교단의 근간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엘렌화잇이 이루어 놓은 위대한 업적이다. 이래서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는 요한계시록 10:10-11에 나오는 것 같이 다니엘서의 작은책 두루마리를 천사가 갔다 주었는데 선지자가 먹었다. 잘 먹어니까 1844년 세 천사의 기별이 나왔다. 조사심판이 나왔더니 엘렌화잇이 먹어보니까. 그런데 뱃속에 들어가니까 영 불편한 것이다. 그러다가 1888년 다시 예언한 것이다. 윌리암 밀러가 틀린것을 엘렌화잇이 고쳤다는 것이 요한 계시록 예언에 결코 적용할 수는 없다. 왜? 계시록 10:10-11에 나타난 십자가의 "내"라는 것이다. 그 "나"는 같은 사람이고 같은 선지자가 먹고 같은 선지자가 배가 아팠다. 그래서 내가 배가 아파서 다시 예언해야 했다. 그래서 1888년에 드디어 십자가에 영광을 돌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셋째 천사의 기별로 다시 예언하게 된 것이다. 안식교단은 재림전 심판을 지성소로 끌어왔다. 이것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분명 심판은 있다. 그러나 이 심판은 재림전 심판이지 조사 심판이 아니다. 히브리서에 재림전 심판이 나와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조사심판을 구체화하고 있지 않다고 우리교단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는 있다. 즉, '죄를 회개하고 속죄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하늘에 있는 기록책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지성소에서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틀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재림전 심판에서 하면, 즉, 구원을 해놓고 하면 좀 이해를 할 수는 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연달아 이러한 말을 하면 안 된다. 즉, 십자가는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없다. 이것은 지성소에서 하는 것처럼 심판이 은혜를 받을만한 자인가 아닌가를 구별한다는 것.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다. 이런 조사심판에 대한 엘렌화잇의 글은 1888년 이전에 한 것이다. 이대로 계속했다면 정말 한심한 것이다. 그런데 할렐루야!! 성령으로 엘렌화잇을 깨워서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마음에 받아들인 자들은 영생을 가진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100%은혜로 주신 구원을 믿는다면 너는 영생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며 믿음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지성소 봉사의 조사심판이 끝나야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되는 것이 무엇으로 시작된다? 영생의 시작이다. 할렐루야!! 참 이상한 것은 우리교단에서도 이것을 믿는다고 그런다. 학자들도 그렇다. 윌리암 존슨도 맞다. 그러나 조사심판은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과 우리가 분리되었다가 드디어 화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하나되는 날. atonement, 대속죄일, 화해한 날, 구원한 날 모두 같은 말이지만 대속죄일에 심판이란 말이 없다. 바울의 히브리서는 십자가와 일치한다, 십자가에서 제단 봉사, 성소 봉사, 지성소 봉사가 모두 끝났다. 단번에, 한번에, 순식간에 all at once로 십자가의 피로 끝난 것이다. 즉,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하게도 조사심판은 십자가와도 일치하지 않고 히브리서와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 대한 교단의 공식입장은 속죄 과정에서 최종국면은 심판과정이 아니다. 속죄과정의 죄의 도말 과정에서 최종국면으로 나타나는 것은 구원이다. 마지막 최종 국면인 재림전 심판은 초막절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다. 초막절 동안 사단이 우리를 향하여 정죄를 한다. 베드로처럼 넘어질 수도 있다. 넘어질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가 넘어졌느냐, 안 넘어졌느냐, 즉, 베드로의 죄와는, 베드로의 넘어진 실수와는 상관 없이, 죄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죄와는 상관없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 달라는 것인가 '믿음으로' 이다. 즉 "시몬아 너의 속죄가 모두 끝난 것 알지? 너의 죄는 도말 되었다고!! 죄 걱정마라!!" 베드로는 죄 때문에 기가 팍 죽어 있었지만 그러나 “너의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끝났다. 시몬아 손잡아!!” 하고 단단히 잡고 일어서면 믿음이 증명되는 행위로 나타난 것이고 이렇게 일어났을때 재림전 심판에서의 구원이다. 죄와는 상관 없는 심판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의 심판이다.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조사심판의 회개 했느냐 안 했느냐는 십자가하고 도저히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교단의 속죄 최종국면은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하면 조사심판인데, 이 최종심판은 히브리서에는 구체화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나는 이 조사심판을 듣자 마자 경악했다. 이것이 우리 교단의 공식 입장인데 나는 도저히 동의 할 수 없다. 동의 할 수 있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로서는 심각하다. 성소봉사는 속죄, 구원이고 심판은 초막절이 지나서 봅시다란 말이 옳은데!! 바울의 초기 입장은 속죄봉사의 최종국면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심판이었다.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심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받아들인 후에 구원이다라고 한다. 즉, 속죄봉사의 최종국면은 구원이다. 그러니까 바울도 역시 처음은 조사심판을 믿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발견하고 나서는 속죄봉사, 성소봉사에는 심판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히브리서이다. 우리가 보기에 바울도 엘렌화잇과 꼭 같은 체험을 했다고 본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닫기 전에는 지성소에서, 지성소가 끝인데 끝에 가서 심판해야지 이렇게 되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구원이다' 란 것이다. 세상에!! 십자가에서 도말 하신 것을. 아직도 절대로 도말 될 수 없다라는 이야기는 반드시 다시 예언해야 된다. 그래서 엘렌화잇도 1888년 이전에는 대속죄일. 곧 속죄의 최종국면은 심판으로 봤다. 유대인들과 꼭 같이!! 이제 엘렌화잇은 바울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교단 입장에서는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엘렌화잇의 조사심판을 구체화 시키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즉, 왜 바울이 히브리서에서는 조사심판을 구체화시키지 않았다고 보는가? 바울이 볼 때는 지성소 봉사가 즉, 심판봉사가 아니기 때문에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안 썼던 것이지. 바울이 뭘 몰라서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울은 속죄의 최종 국면을 심판으로 보지 않았기에 조사심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속죄의 최종 국면이 심판이라면 나는 바울이 꼭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속죄과정의 최종국면은 대속죄일이다. 속죄는 제단,성소,지성소에서 이루어진다. 대속죄일은 지성소에서 속죄하는 날이다. 그래서 속죄의 결론은 구원이다. 그래서 제단에서도 구원, 성소에서도 구원, 지성소에서도 구원이다. 심판은 아니다. 심판은 나중에 구원받은 의인 들이 , 즉 엘렌화잇도 말했는데 조사심판은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구원받은 의인들이라 했다. 그러면 그 구원도 결정도 안 났는데 받은 의인?? 구원받은 의인? 이것이 좀 맞지 않다. 애매모호하다. 성경에도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이 아니고 속죄일이다. 매년 칠월십일은 대속죄일이다. 레위기 16:29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라는 말이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혼란스럽게 했고 엘렌화잇으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했다. 대속죄일이 진행되는 동안 약 10일간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스스로 괴롭히라 이다. 스스로 괴롭게 하는 사람은 약간 정신 나간 태양신 숭배자들로 자기 몸을 찢기운다. 하나님은 우리를 스스로 괴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의 확신을 가진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이러한 스스로 괴롭힌다는 단어를 히브리어 원어로 추적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외쳐라" "노래하라" 그리고 "괴롭힌다"란 말도 있다. 자. 해석을 어떻게 할까요? 대속죄일이 구원의 날인 것을 알았다면 노래가 나온다. 이사야44:23처럼 '노래해라'로, '외쳐야'로 그리고 괴롭다. 왜?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어린양이 피 흘렸으니까.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구약성경은 더 복음다운 복음이다. 이것을 우리가 잘못 읽어서 무서운 것이다. 이때까지는 어떻게 이해 했나? 심판중이니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니까 조사심판을 믿는 우리 교단은 아직도 대속죄일에 산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고 잔치하는, 노래 부르고 외치는 초막절을 하늘나라에 가서나 지킬 것 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슬픈 교단이 되어 있다. 인제 우리는 다 함께 초막절을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속죄, 카파르, 죄의 도말, 화목, 용서, 취소 등 모두 같은 말이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서 죄를 약간 덮었고 지성소에 가서 죄를 도말 한다고 한다. 이런 여러가지 설명을 하고 있는데 다 같은 뜻이다. 십자가에서 죄가 용서되고 대속죄일에 죄가 도말 된다는 가르침은 십자가와 대속죄일을 분리시킨 것으로 바울의 히브리서와 맞지 않는다. 바울은 all at once, 순식간에 제단봉사와 대속죄일 봉사가 끝났다. 구원은 이루어졌다. 할렐루야. 노래 불러라. 조사심판은 용서와 도말이 서로 다른 뜻이라고 오해한 가르침이다.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한다는 말과 죄가 도말되었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용서와 도말을 분리시킨 조사심판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라고 선언될 수 있다. 그렇다. 대속죄일. 곧 속죄의 최종국면은 역시 구원이다. 심판이 아니다. 따라서 성소의 기능이 오직 속죄이며 심판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조사심판을 구체화 시킬 수는 없었다. 우리교단은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단지 우리 교단은 이러한 이유를 대지 않고 사도 바울도 1844년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체화 시키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속죄의 최종국면 곧 대속죄일의 속죄가 심판이라는 견해는 본래 유대교의 견해이다. 유대교는 아직도 대속죄일이 최후의 회개, 기회라고 가르치고 있다. 유대교의 대속죄일은 심판이다. 예수의 십자가로 속죄가 끝나고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거부한 견해이다. 왜 유대교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가? 예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결론을 낼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가 없으면 성소봉사의 최종국면은 심판이라는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엘렌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모를때는 조사심판이 있다고 그랬다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닫고 나서는 "없다"고 그랬다. 그러면 "없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엘렌화잇의 글에 그런것을 쓴 곳을 보았는가라고 질문할 때 대답은 "못봤다. 그러나 수두룩하게 있다"고 나는 답할 것이다. 엘렌화잇 스스로 "조사심판은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예언했던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이렇게 쓰지 않았기에 조사심판 옹호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 보다 더 충분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가 없는 유대교의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이 될 수 밖에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몰랐던 엘렌화잇의 대속죄일도 심판의 날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엘렌화잇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어떻게 글이 바뀌었는지 보면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가 있는 히브리서의 대속죄일은 영원한 구속을 이룬 날이다. 영원한 구속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이루어준 구원을 못 뿌리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이 영원한 구속을 이루어 주셨더라도 나는 거부하고 멸망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나님은 거부 당하실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지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속죄일은 속죄의 날이고 심판의 날이 아니고 십자가의 날이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의 피 .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닫고 침례를 받은 그날이 나의 대속죄의 날인 것이다. 그런 다음은 초막절에서 잔치를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1888년 엘렌화잇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깨닫고 쓴 '시대의 소망'을 보면 마치 조사심판이 있는 것처럼 그런 뜻을 가진 문장이 있긴 있는데 이것은 '제사장과' 여기서는 대제사장이란 말이 없다. 왜? 대속죄일은 끝났으니까 대속죄일은 대제사장이 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시대의 소망'에서는 '제사장과 중보자로서 영원히 함께 거하시느니라' 이 문장을 보고 조사심판 옹호자는 끝까지 영원히 조사심판을 하는 것처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속죄와 중보는 다르다. 성소에서 하는 일은 속죄, 카파르이고 중보는 헬라말로 '엔툼카노'인데 '간구하다, 설득하다, 달래다, 보호하다, 격려하다, 상담하다, 의논하다' 이다. 그래서 우리가 초막절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고 있을 때 "걱정마! 내가 구원해 주었쟎아! 힘내야지!" 이것이 보혜사 성령의 간구하시는 중보이다. 속죄는 끝났다. 자꾸만 그것을, 강구를, 중보를 자꾸만 조사심판에 갔다 붙힐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재림전 심판에서 심판의 과정에서 하는 것을 우리교단은 질적으로 재림전 심판과 즉, 초막절 이후에 올 재림전 심판과 대속죄일에 하는 속죄과정을 이렇게 오버렙핑, 즉, 겹쳐났기 때문에 자꾸 그러한 오해를 하는 것 같다. 1888년 이후의 엘렌화잇의 견해인 '시대의 소망'에 있는 말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큰 희망이 이루어 졌다.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렸다' 여기의 열렸다는 무슨 말인가?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없다는 말이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있는 한 지성소로 가는 길은 통행금지이다. 들어가면 죽는다. 이제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문은 활짝 열렸다. 왜? 휘장은 찢어졌다. 언제 찢어졌는가? "다 이루었다" 할 때이다. '새롭고 산 길이 만민이라’ 누구를 위하여 회개를 해야 한다던 엘렌화잇이 줄까지 쳐가며 '만민이라'고 까지 썼다. 만민이란 누구든지 이다.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면 O.K이다. 제사장은 할 일이 끝난 것이다.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시은자에 뿌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을 때 그 피는 하늘성소의 시은자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단은 그 피를 들고 들어가서 AD31년에 성소로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무려 1810년 동안 성소 봉사 하시다가 그 다음 1844년에 드디어 구름을 타고 왔다!!고 한다. 다니엘 7장에 나온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는 일은 어디하고 어디를 왔다갔다할때 인가? 땅과 하늘이다. 그런데 성소에서 지성소로 가는데 구름을 타고? 좀 그렇지 않는가? 이 말 때문에 조사심판을 합리화 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에 어떤 신학자에게 물어보니까 이게 정말 이상하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분도 "저도 참 힘든데 엔두루스에서 배우기는 실재로 구름을 타고 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기능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성소봉사에서 지성소 봉사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성경에 '구름을 타고'의 성구 찾기를 하면 네 번 나오는데 구름을 타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모두 하늘과 땅 사이이다. 계시록20:12에 심판에는 책들이 펴져 있는데 라고 나와 있는데. 왜 책들이 펴놓고 심판 하는가. 하나님의 율법대로 해야 하니까 율법책이 펴져 있지! 어떻게 죄의 책이 펴져 있겠는가! 율법에 따라서 이 사람이한 행위가 믿음을 증명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자들이 큰자나 작은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있고 (율법책) 또 다른책(산자를 기록한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엘렌화잇의 글 중에 '더이상 죄많고 슬픔에 찬 인간들은 대제사장이 나오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라고 썼다. 대제사장이 나와 버렸으니까. 십자가에서 끝났으니까. 엘렌화잇이 이렇게 기록 했다는 것은 엘렌화잇이 아직도 조사심판이 옳다고 믿고 있다는 말인가? 더 이상 안 믿는다는 말인가? 더 이상 안 믿는다는 말이다!! 조사심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면 엘렌화잇이 더이상 안 믿는다라고 썼습니까"라고 질문을 안 했으면 좋겠다. 이것보다 엘렌화잇이 썼던 말 중 더 은혜로운 것은 없다. 더 확실하다. '이제부터 구주께서는 모든 하늘에, 하늘에서 제사장과 시은자로서 직무를 수행하실 것이었다. 이제 죄를 위한 모든 희생과 제사는 끝났다'라고 쓰신 것은 바로 히브리서와 일치 한다. 끝났다라고 하는 말을 엘렌화잇은 히브리서 9:12를 인용했다. 엘렌화잇이 히브리서 9:12절을 직접 인용했다. 이것은 조사심판을 더 이상 안 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다시 예언했다는 말이 아닌가? 옛날 주장한 1844년부터 아직도 대속죄일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인가? 안 믿는다는 말인가? 안 믿는다는 말이다. 엘렌화잇이 이런 분이기 때문에 1888년에 조사심판을 폐기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 예언한 것을 수정하시고 1888년에 다시 예언한 것이다. 리뷰엔 헤럴드의 편집장인 윌리엄 존슨은 히브리서에 대해 이렇게 평가 했다.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을 위해 단번에 제사로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처리 하셨다.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우리가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갈바리(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처리하셨다는 절대적 확신을 준다" 윌리엄 존슨이 이 말을 하고 연이어서 ‘그래서 엘렌화잇은 1888년에 조사심판 이론을 폐기했다’ 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그리스도께서 1844년까지 하늘 성소 첫째칸에서 봉사하시고 구약의 대속죄일의 원형인 둘째칸에서 조사심판 사역을 1844년에 시작 했다는 것은 재림교회의 전통적인 견해이다. 십자가에서 단번에 모든 속죄를 위한 희생과 제사가 끝났다고 밝히고 있는 히브리서의 논증은, 조사심판이 없다고 하는 히브리서의 논증은 재림교회의 성소 교리를 배격한다가 맞는가, 배격하지 않는다가 맞는가? 배격한다가 맞는데 그런데 이것을 조사심판과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러니까 교단과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가 끊어지고 만다. 나는 어떤 결정적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라고 하면 교단측은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에 이러하다, 저러하다라고 단정적, 단답형 답을 줄 수 가 없다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 교단이 왜 히브리서는 조사심판 교리를 배격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드는 것은 ‘히브리서가 기본적으로 시간의 관점에서, 본 성소교리는 1844년의 사건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들지만 나는 이렇게 하겠다. ‘히브리서는 조사심판의 가르침을 배격한다. 그 이유는 조사심판은 바울이 알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를 모를 때 예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배영한_4_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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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9 아부지 이야기 1 한병열 2016.07.06 264
» 이상철님 이해하십시요. 12 이상구 2016.07.02 1195
3727 안녕하세요 이상구 박사님...그리고 계신 선생님들 2 해피맘 2016.06.26 644
3726 중국 연길에서 참가하실때 양양 공항 이용하세요! 이은숙 2016.06.25 530
3725 서울에서 뉴스타트센터 오시는 길이 빨라집니다. 이은숙 2016.06.25 430
3724 재림마을 토론방에 올린 것을 여기에도 올립니다 4 한병열 2016.06.23 862
3723 책 잘 읽었습니다. 1 신나게 2016.06.22 352
3722 박사님 할아버지~ 저 최윤서에요 1 이은주 2016.06.19 437
3721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4 이상구 2016.06.19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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