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앞에서

by 가파 posted Oct 03,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초기로 텃밭 무성한 풀을 베어내다 풀숲에 숨은 푸른 노각 두개, 지난 여름 모든 밭을 정복해 버릴 기세로 뻗어가던 노각도 구월도 하순에 접어드니 잎을 다 잃은 채 주름 같은 누런 덩굴만 땅가죽에 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풀 숲에 몰래 맺은 저 두 개는 저들의 꿈일지도.

현미밥 김치 몇 조가리 뿐인 점심에 자연은 찬 하나 더 내어준다.

초록을 잃고 누렇게 변색된 뽕잎 대여섯 장을 손으로 훑어 물에 행구고 커피포트에 넣어 끓였다. 노랗다.

구수한 향기 있어 그간 즐겨해온 모든 차를 밀어낸지 오래다.


가을 햇살을 안은 호박꽃은 더 노랗게 피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벌들이 윙윙 거린다. 

세 개의 태풍이 줄기와 잎을 분질러 놓았는데도 몇 남지 않은 잎을 모아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모양이 우리 인생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평안한 삶만 있으랴,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꽃을 피워낸 호박같이 살아 볼 일이다.


또 한 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해마다 한 두 번 설악을 찿았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갈 수 없는게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누렇게 익어가는 제주는 그만이 가진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어제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고사리가 자라던 넓은 들은 붉은 억새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시 봄이 올 것이다. 

대지는 찔레꽃과 산딸기와 고사리를 또다시 내어 줄 것이다. 아름다운 고사리밭을 알려준 님이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 언제 한번 같이 걷자하신다.


바람은 대양을 건너와 지치지도 않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오름의 풀들과 장난질, 파란 가을 햇살이  능선으로 쏟아진다.


지나온 시간 마디 마디 사계절 같아 저리 고왔을 것을 돌아보면 회색빛, 그리 잘 산 것 같지는 않아 울적한데

이제 인생의 시계는 가을, 마음은 청춘이지만

머리칼은 반이 날아가고 전부라 생각했던 가치들은 해변에 밀려온 낡은 페트병 처럼 낡아져 뒹구는데 가을은 그저 깊어만 간다.

내 생명의 한 토막 가을이 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