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대 초반에 부모님의 영향으로 안식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 저는 화잇 부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고 이 사람의 글로 인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기 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 때가 많았으며 혼란스럽게 느껴져서 이 사람이 참된 선지자인지 아닌지는 내가 먼저 성경을 이해한 다음에 판단하겠노라고 하면서 계속하여 미루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 정서적으로 너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서 일반적인 글을 이해하는 능력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는 능력도 매우 부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안식일 교회를 꽤 오래 다닌 것은 십계명이 여전히 유효하며 안식일이 참된 예배일이라는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십계명은 새 계명 안에 포함되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안식일 교회를 다니고는 있으나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그것은 제가 성경의 가장 기초적인 복음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거의 깨닫지도 못한 채 조사심판이라는 교리를 배웠기 때문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안식일 교회에서는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과 같은 예언서를 연구하고 그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이 거의 80%였으며 그러한 설교의 중심은 조사심판을 하는 교리였기에 그 교리에 대한 설교를 듣는 일은 잘 이해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은혜가 되기 보다는 부담감과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볼 때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문제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나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고 계시고 말씀을 하나라도 어기면 벌을 내리시기에 할 수 없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그런 신앙은 너무 하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의 기초적인 복음도 깨닫지 못하고 있어서 어린 아기처럼 우유를 먹어야 하는데 계속하여 딱딱한 음식을 억지로 먹여서 소화불량에 걸린 어린 아이같은 상태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습니다. ( 그러한 중에 이상구 박사님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되어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 나중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들이 교리적인 갈등이 생겨서 문제가 생김과 동시에 저는 저의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안식일 교회를 나가지 않고 홀로 신앙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조사심판이라는 교리는 저의 마음을 매우 무겁게 하는 짐과 같이 여겨졌으며 그 교리와 연관된 성소 교리 등은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 언젠가는 제가 성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 때에 그러한 교리들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하겠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십여년도 넘게 흐른 후 어느 날 제가 성경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성경 전체를 읽는데 약 일주일 정도가 걸렸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위주로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 속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죄로 인해 저의 영적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가 오랫동안 나중에 읽어 보려고 지니고 있던 예언의 신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 문제인지가 너무나도 잘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화잇부인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갈 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결론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개인적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을 깨달은 바로는 죄인이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38년된 병자가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낫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어서 그가 나은 것이지 그의 어떠한 노력으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듯이 나면서부터 죄인인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없는 영적 불구에서 치료함을 받아 의를 행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는 길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어떠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38년 된 병자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지요?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베뎃스다라고 하는 연못에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에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소문을 듣고 베뎃스다라는 연못가에서 그 기회를 노리는 일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잇부인의 가르침대로라면 이 병자가 개인적으로 노력을 하면 차츰 차츰 병이 나아서 걸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이며 진리인가요? 또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선지자라면서 어째서 성경의 가장 기초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도 EJ 와그너와 존스 라고 하는 다른 신도의 말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우리의 지력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모호하게 진리를 설명하거나 가르치지 않으나 화잇부인은 이런 말 저런 말을 마구 혼합시켜서 진리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고 혼란스럽게 합니다. 다음의 글을 하나 예로 들어봅니다. 이 글이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시면 댓글로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마음속에 산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진리가 하늘로부터 온 능력으로 전파되어야만 한다. 예수께서 그대의 노력을 통하여 역사하셔야만 그대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시작했다가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역사하셔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화잇 부인의 글은 거의 다 이런 식입니다. 이런 종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거부감이 듭니다. 성경은 이러한 믿음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게 됨으로 어린 아이가 그 부모를 신뢰하고 믿는 것처럼 믿으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 이렇게 복잡하게 무슨 노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발휘되거나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화잇부인을 참 선지자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 부분이 너무나 답답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그저 어린 아이가 그 부모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님이시라는 것을 느끼므로 부모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없이 부모님을 사랑하고 믿기에 부모님의 말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지 하기 힘든 일을 시키셨으나 순종하면 부모님이 자신을 칭찬해 주고 자녀라고 인정해 줄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노력을 해서 따라야 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화잇여사는 자꾸 인간의 노력을 끼워넣으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순수한 진리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지 노력으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이 죗된 육신의 본성을 유혹해 우리를 죄에게 굴복시키려고 역사하기에 마음의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육신이 죽기 전까지 계속하여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지 이러한 유혹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어떠한 재능이나 능력을 활용하여 애쓰고 노력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던 그 사랑을 깨달음으로 그분의 은혜가 내 마음 속에 늘 머물러 있게 하므로 나의 안과 밖에서 이르러오는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므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아가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날수록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커지게 될 것이며 믿음이 커질수록 죄의 유혹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커질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십자가를 참으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일 외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은 그가 어떠한 정신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를 나타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같이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의를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의 그 믿음을 계속하여 유지해나가면서 더욱 더 믿음이 자라나게 될 때에 그분의 형상이 내 속에서 이루어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잇부인의 가르침에는 믿음을 이야기하다가도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을 슬쩍 끼워넣어 마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품성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다음은 화잇 부인의 이러한 가르침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점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평강 중에 주님을 뵐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녀야만 한다. 모든 생각마다 그리스도의 뜻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위대한 사도에 의하여 표현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진지한 노력 없이는 결코 획득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전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매일 외적인 악과 내적인 죄를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2년 5월30일자.
이 글에서 화잇 여사는 "모든 생각마다 그리스도의 뜻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거듭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진 자로 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화잇부인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기도 합니다. 다음이 그 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하는 완전하고 거룩한 우리의 모본이시다. 우리는 결코 그 표본과 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따라 그 모본을 모방하여 닮을 수 있다."( R&H, 1895. 2. 5 )
앞전에 올린 글에서는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녀야 한다 라고 해놓고는 여기서는 우리는 결코 그 표본과 같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따라 그 모본을 모방하여 닮을 수 있다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행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이 죄인이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길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겔 11:19 내가 그들에게 한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겔 11: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런데 화잇부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죄인 측에서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해야만 복을 주시거나 구원을 해 주신다는 식으로 설명하므로 이상구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조건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화잇부인의 글로는 다만 피조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하는 종이고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독재자와 같은 분이라고 여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시므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하는 것은 맞으나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처럼 사랑하시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므로 그분의 말씀에 억지로가 아닌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잇 부인은 죄인이 율법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게 해 주심으로 그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로 나게 해 주심으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자게 되게 해 주시는 것이지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고 구원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다가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