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김진복님의 질문에 대한 답 글입니다.
그동안 저의 생각은 결정권은 인간 스스로에게 맡겨진바 되었고 하나님 스스로도 그 인간의 선택권을 100%인정해 주시고 그분의 품성을 인하여 그러한 권리를 부여하기로 결정된바가 되었기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인류 타락이전에 아담에게서 화와가 분리되고, 사도바울의 복음의 비밀이 그러한
것이라면, 그동안의 저의 생각과 관점이 좀 잘못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사들의 경고(루스벨의 유혹)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미 주어진바 되었는데, 그러한 경고는 이미 하와를 분리해 내실 때 앞으로의 일이 결정이 나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다의 예수님을 판 이야기에서도 이미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아셨음에도 돌아오라고 예수님께서는 수차례 호소하는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에서도 닭이 울기 전에 3번 부인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 이러한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과연 이러한 성경상의 의문들을 어떠한 관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될지가 분명하게 서지 않습니다.
화잇부인의 "유한한 것 넘어의 무한한 것이 있다"라는 말씀을 이곳에 적용해야할까요? 그래야하는 것이 맞고,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하늘의 지혜와 은혜를 구하면서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도 저도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피가 흐르는 십자가 밑에 샆을 하나 들고 서서 이러한 의문들을 땅을 파고 뭍어 버리겠습니다.
답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주어지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다 아시면서도 조건 없이 주십니다.
필요하건 불필요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으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조건이 없이 주신다는 말은
우리 죄인들에게는 상당히 비합리적으로 들리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거부하더라도 사랑을 주신다는 것,
거부할 줄을 미리 아시고도 그래도 무조건 주신다는 것,
거부당하시는 고통을 아시고도.
그래도 주시는 사랑!
땅의 논리로는 설명될 수가 없지만
하늘의 진리인 그 사랑!
이 사랑은 하늘에서는 이룬 하늘의 “뜻”이지만
땅에서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 속에서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사랑은 끊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 죄인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논리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거부하거나 그냥 삽으로 묻어버리려고 하지요.
삽은 보화를 발견하는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이마에 땀이 흘러야, 땅의 논리에 진땀이 나야 채소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채소는 가시와 엉겅퀴에 싸여있지요.
이 채소는 하늘의 진리, 곧 생명이신 그리스도, 곧 조건 없으신 사랑이시지요.
삽을 들고 그 가시와 엉겅퀴, 곧 나 자신 속에 엉켜 있는 땅의 논리와 싸우십시오.!
만약 우리가 거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을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을 참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변함없이, 조건 없이 흐르십니다.
사랑은 무엇인가가 가로막고 있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방해가 있을 때에는 더 강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롬5:20)
그러나 강제하시지는 않지요.
그렇게도 주시고 싶지만 강제로 받게 하시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사랑은 무례히 행하시지는 않으시거든요. 그리고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시지는 않거든요.
바로 이것이 그분의 공의랍니다.
모든 것은 끝날지라도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만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은 그 사랑 속에서만 쉼이 있지요.
고전13:8 사랑은 결코 시들(끝나지)지 아니하나(Love never fails), 예언들이라도 끝이 올 것이요,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며, 지식도 끝나게 되리라.(한글KJV)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돌아 왔지요.
아담과 화와도 돌아 왔고요.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실패하거나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에게도, 가인에게도, 바로에게 주신 사랑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사망 때문에 초래되는 그들의 최후의 멸망의 고통, 그 둘째사망의 영원한 분리의 고통을 그들은 실제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고통을 체험하면서 마침내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통이 자기들을 그 둘째사망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한 고통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악인들일지라도 마침내 이 위대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그들의 멸망을 당연한 그들 자신들의 선택의 결과임을 인정하며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시며 그렇게도 끈질기게 사랑 받기를 거부해왔던 그들에게도 끊임없이 사랑을 끝까지 변함없이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사하며 멸망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인들은 목격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곡하사는 모습을!
그들을 사랑 주시려고 창조하신 창조주의 눈물, 그 십자가의 피눈물 속에서--
창조주의 고통 속에서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악인들일지라도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생명을 거부하고 확고하게 사망을 선택한 그들을 강제로 생명으로 이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다우신 행위, 곧 공의로운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으로서는 공의로운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심판에서까지도 조건 없는 사랑은 변치 않고 설 것입니다.
사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모든 일들의 종말을 아시지만, 사단이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셨지만 그 사단에게도 변치 않는 사랑을 주시고 계십니다. 무참히도 거부 당 하시면서도!
죄인에게는 위선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거신 사랑인 것입니다.
인간의 땅의 논리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오직 하늘의 논리, 성령으로만 알 수 있는 진리로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만일 사단이 반역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창조하지 않았다든가, 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처단해버렸다면 그 하나님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