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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의 경우

우리들이 성경에서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는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영적지도자들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성경을 통하여 그 영적지도자들을 본받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야 한다.

우리들은 항상 누구누구를 본받아야한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욥도, 입다도, 삼손도 모두들 믿음의 사람들이요 뛰어난 영적지도자들이었지만 한사람도 완벽한 사람이 없었다.

완전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그 형상, 곧 품성을 상실해버렸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에서 그분의 품성을 주목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입다와 삼손이라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너무나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치명적인 부족한 점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입다의 경우를 보자.

입다는 기생의 소생으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잡류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셨다.

삿11: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그러한 입다는 자존심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삿11:7]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리고 장로들의 요청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겸손히 받아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는 너무나 당당하게 온 길르앗 백성들의 머리가 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길르앗으로 돌아 왔다. 다시 말하면 입다가 취한 입장은 자기가 암몬족을 물리쳐서 전쟁을 이기는 대가로, 즉 은혜를 베푸는 조건으로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 일을 통하여 마침내 그동안의 멸시의 울분을 풀고 자기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삿11:9]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사실 성경에서는 기드온의 경우나 다윗의 경우와는 반대로 입다가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명을 받았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는 없다. 그리고 길르앗 장로들이 하나님께 지도자를 간구한 기록도 없습니다.

입다는 아직도 하나님의 조건 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같은 미천한 자를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고 나갔다. 다윗은 승리의 대가로 하나님께 아무 것도 서원하지 않았다. 그의 승리는 그의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의 경우처럼 오직 합창단으로 하나님의 능력만을 찬양하는 믿음으로만 전쟁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입다의 경우에는 다윗이나 여호사밧 왕이나 기드온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는 전쟁 전에 하나님께 승리의 대가로 제물을 바치기로 서원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셔서 자기를 백성들의 머리가 되게 해주시면, 승전 후에 누구든지 자기를 가장 먼저 반기는 식구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는 대가성 서원을 하게 되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번제는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입다의 경우처럼 승리를 조건으로 사전에 번제를 약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에게 바치는 어떤 제물의 대가로 승리를 주시는 분은 결코 아니시기 때문이다. 사사기 5장에서 바락은 여화와의 도우심으로 승전을 한 후에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아무것도 승리를 조건으로 서원하지 않았다.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선택하셨을지라도 자신의 능력 없음을 인정하고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를 시험할 만큼 겸손하였고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누구의 자녀도 제물로 바쳐지기를 원하시지 않으시는 분이다. 오직 유일한 제물은 당신의 독생자이신 어린 양 뿐이다. 입다는 아직도 이 가장 기본적인 하늘의 진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는 모든 이스라엘이 이방신들에 둘러싸여서 이방신들을 섬기며 여호와를 버리고 있었다(삿 10장). 입다의 어머니인 기생도 아마 이방여인이었다. 그러므로 입다도 이방종교의 풍습인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습성에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암몬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부족한 입다를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 당하였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안겨준 전쟁의 승리가 입다에게는 오히려 큰 고통의 선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딸을 허락하시고 또 딸을 빼앗으시기 위하여 입다에게 전쟁의 승리를 안겨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사단은 입다의 이러한 치명적인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무지와 오류를 이용하여 마치 하나님이 전쟁의 승리의 대가로 사람을 번제물로 받으시는 분인 것처럼 일을 꾸며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도록 획책한 것이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2개월의 여유를 허락하셨다. 입다가 그동안 기도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모든 것을 다시 재고해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입다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두 달 후에 자기에게 돌아온 그 사랑하는 딸을 결국 번제물로 바치고 말았다. 입다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입다의 번제도 받으실 수가 없으셨다.

그 두 달 동안 입다가 “하나님 어찌하여 내 딸을 첫 번째로 나를 마중 나오게 하셨습니까?”라고 조용히 하나님께 질문을 던져보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입다야, 네가 혹시 지나치게 의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다정하게 반문하시지 않았을까?

입다는 자신의 영적자존심과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무지의 결과로 빚어진 참담한 상황에 처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삿11: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입다에게 하나님은 엄격하신 엄위의 하나님이었다. 그 하나님은 한 치의 양보도 하시지 않으시는 차가우사며 엄하신 분이었다. 그러므로 한 번 약속을 한 것을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 사랑하는 딸이 자기를 참담케 하는 것처럼 느꼈다.

하나님의 품성을 모르는 죄인은 항상 하나님을 엄하신 분으로 오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눅19: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눅19: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악하다고 판단하시는 기준은 인간이 당신의 자비의 품성을 모르고 엄하신 분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인간사회에서는 선하며 옳다는 평판을 받을지라도 그 선함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한 결과, 곧 하나님이 두려워서 선을 행하였다면 그 선행은 이 세상의 죄인들에게는 선행으로 간주될지라도 하늘의 기준으로는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두려움을 근본으로 한 선행은 즐겁지 않으며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어 사망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는 선일지라도 생명적이지 않는 것은 악으로 판단을 받는다.

사실 입다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어야 햇다. “오 나의 하나님, 내가 어찌 내 사랑하는 딸, 당신이 저에게 주신 이 딸을 번제로 드리겠나이까?, 내가 무얼 잘 모르고 서원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저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단은 입다로 하여금 지나치게 의인이 되고 싶어서 무리한 서원을 하게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사단의 다음 목표는 입다의 무남독녀를 제물이 되게 하여 결국 입다가 하나님이 딸을 제물로 요구하시는 분인 것처럼 오해하게 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게 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하나님께 청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입다가 이렇게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그의 딸이 먼저 아버지를 마중 나가도록 하는 사단의 청구를 허락하시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다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딸을 원망하는 듯한 한탄을 하였다. 승전을 하고도 이러한 비극을 불러온 입다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그가 하나님의 품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실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엘리아도 실수를 범하였다. 하나님께서 갈멜산의 승리를 그에게 안겨주었지만 그는 다시 하나님의 그와 함께 하심을 잊어버리고 아합 왕을 피하여 도망하며 깊은 산 속에 숨어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하여 그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다정한 말씀을 주셔서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우셨다.

기드온은 다음과 같이 자기의 믿음 없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솔직하게 나타내어 보였다.

[삿6:13]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삿6:15]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삿6:17]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수 있는 믿음, 자신의 약함을 나타낼 수 있는 믿음,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은 조건 없이 받아드리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죽는 데에도 함께 갈 것이라고 맹세하며 장담하였다.

눅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그 자신의 연약함이 여실히 드러나 버린 것이다. 베드로의 영적자존심은 무참하게 무너졌다. 사단은 베드로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굴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늬 사랑은 변치 않으셨고 하나님은 베드로를 다시 일어서게 하시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사단의 거짓에 속거나 굴복하지 않고 극복할 수가 있었다.

눅22: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그 결과 베드로는 자기가 아무리 주님을 부인하며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사랑으로 다시 자기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품성을 마침내 실제로 채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체험적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의 품성을 전할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기드온과 입다

기드온은 동족인 에브라임 족속의 트집을 잘 해결하여 동족상잔을 예방하는 겸손과 지혜가 있었다. 그는 에브라임을 원망하기 보다는 칭찬하므로 그들의 트집을 잠재웠다. 그러나 입다는 동족인 에브라임 족속을 원망하며 다시 전쟁을 일으키어 항복을 받기 보다는 그들을 4만명 이상이나 철저히 죽였다. 입다가 에브라임 족속들을 그토록 죽인 가장 큰 이유도 역시 그의 길르앗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을 에브라임이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도 자존심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락이나 기드온처럼 자신의 힘으로는 승리할 수가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중에 사사로 세운다는 조건 하에서 전쟁을 시작하였다.

삿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고 다정하게 부탁하신다. 우리가 불의하며 부족하드라도 사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어달라고 요청하시는 것이다. 지나차게 의인이 되는 이유는 영적자존심, 그리고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전7:16]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바울도 자기가 스데반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를 만나 하나님의 품성을 알기 전까지는 지나치게 의인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갈1: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만약 입다가 베드로나 엘리아의 입장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영적자존심에 억눌려 ‘오버(Over)'하여 스스로 목숨을 던져 자살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마도 입다는 노년에 들어가면서 성령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서 옛날의 자신을 다시 돌이켜보며 그토록 부족했을지라도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여 길르앗을 암몬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돌렸을 것이다. 입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진리에 무지했을지라도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서원한 것을 지켜냈다는 점이다. 그는 부족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정직성을 버리지는 않았다. 입다에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무남독녀 외동 딸 보다도!---

훗날 하나님께서 그를 칭찬하시고 위로하여주셨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 그의 이름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하나님은 한 부족한 인간이 완성품이 되도록 기다리시어 완성품이 되면 그 사람을 도구로 쓰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미완성품일지라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완성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현재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다고 해서 지금 완성품이 되었다고 볼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사사기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너무나 패역해 있었고 주위 이방족속들에 의하여 압제 당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부족하지만 지도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의 유형은 가지각색이었다.

기드온이 가장 성공적인 이상적인 겸손한 지도자이었지만 결국에는 아들을 사사로 임명한 실수를 저질렀다. 바락도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한 성공적인 지도자였다. 그러나 입다와 삼손은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지도자였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부족한 그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성숙시키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었다.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는 품성을 배워야 한다.

순교자 삼손

삼손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사사이었다. 그는 입다와는 달리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께 종신토록 헌신하도록 태어났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레셋의 압박으로부터 구원해 내어야 될 사명이 주어져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다른 강력한 힘을 삼손에게 허락하셨다.

사단도 이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삼손을 강력하게 시험하기 시작했다. 사단은 삼손의 약점을 잘 알았다. 사단은 젊음과 미모와 힘에 넘치는 청년 삼손을 그 힘으로 자신을 과시하도록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는 웅장한 근육으로 장식된 자신의 몸매에 매료되었다. 그 결과 영적인 내면보다는 육적인 외면이 더 중요해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는 자기의 관능적인 외모에 걸 맞는 여인의 외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안목의 정욕에 빠진 것이다. 그가 선택한 이방여인들은 전혀 영적인 내면의 성숙은 찾아볼 수 없는 육적인 관능미만을 나타내는 여인들이었다. 삼손의 영적인 두 눈은 이미 멀어버렸다. 그가 가진 두 눈은 오직 육적인 눈일 뿐이었다.

이렇게 타락한 삼손의 육적인 두 눈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방여인들이 자랑하는 음란한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단은 그를 세속적인 감정과 여색에 빠져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망각하도록 유도하였다. 마침내 삼손은 사단의 최후의 도구인 들리라의 유혹에 완전히 빠져서 나실인의 최후의 증거인 장발의 비밀을 들릴라에게 토로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사명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삼손은 결국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해버렸고 세상을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삼손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삼손은 하나님의 사랑의 눈물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블레셋은 여호와를 떠나 무력해진 삼손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조롱하며 모욕하였다. 두 눈까지도 잃어버린 여호와 하나님의 지도자인 사사 삼손의 초라한 모습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무력한 신 여호와의 상징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삼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신은 말할 수 없이 무시당하고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불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곤고한 모습을 보며 자기들의 신, 다곤 신이 여호와보다 더 강한 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사단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은 슬펐다. 삼손이 타락해버렸고 따라서 불레셋 사람들을 사단이 조작한 다곤 신의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구원할 길이 너무나 어렵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토록 여호와를 모욕당하게 해왔던 옥중의 삼손은 자기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다시 기도하였다.- 이것이 믿음이다. 더 이상 창피해서 하나님을 볼 수 없도록 되어버린 입장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구하였다. 무너져 내린 그의 영적자존심은 그를 더 이상 기도하지 못하도록 유도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랑,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믿는 믿음으로 그 영적자존심을 마침내 극복한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삼손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품성을 알고 있었음이 여실히 나타나는 것이다. 삼손이 믿은 하나님의 품성은 어떤 죄인이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조건 없이 받아주시는 사랑이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삼손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옥중에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단의 시험에 빠진 삼손을 안타까워하셨는지를 말씀해주셨다. 삼손은 하나님의 부드러우신 사랑의 품에 안겨 깊은 통회의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삼손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재인식 하게 되었다. 그는 겸손해졌다. 삼손이 옥중에서 하나님의 품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적으로 알아갈수록,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도 사랑하시는 분임을 이제 알게 되었다. 삼손이 가졌던 불레셋 사람들에 대한 원한도 눈 녹듯이 살아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서서히 삼손의 진정한 영적능력, 곧 그의 품성을 계발하시기 시작하였다.

그의 육적인 두 눈은 뽑아져버리었지만 그결과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영적인 새 눈을 허락하실 수가 있으셨다. 사실 삼손의 두 눈이 없어진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영적으로는 유익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삼손의 고통속의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마5: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조용히 삼손의 가슴은 원수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어갔다. 옥중에서 그의 품성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가고 있었다.

삼손은 자기는 이제 죽는 한이 있어도, 그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무력한 신으로 잘못 알고 있는 상태로 그냥 내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얼굴에 완전히 먹칠을 한 자기 같은 죄인을 아직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불레셋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들도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구원을 받아드릴 수가 있을 것이었다. 삼손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이토록 자기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도 사랑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그러한 삼손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블레셋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 곧 조건 없이,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차고 넘치게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올바로 알게 될 것이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도우셔서 블레셋의 신인 다곤 신 보다 더 강하신 분임을 나타내어 보이신다면 블레셋 사람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참으로 알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삼손은 그의 목숨을 바쳐서 그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블레셋 사람들에 알려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불레셋 사람들을 사단의 거짓 신인 다곤 신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길은 현재 자기의 상황으로서는 자기의 몸을 던져서 여호와가 주시는 힘으로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는 길 밖에는 없었다. 불레셋 사람들이 계속하여 자기의 무력함을 즐기고 있게 되면 그들은 영영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강력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삼손은 하나님의 뜻을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삼손의 마음속에 놀라운 영감이 들어왔다. 자기의 두 눈을 뽑아준 불레셋 사람들이 감사했다. 만약 아직도 그의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불레셋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에 불타고 있었을 것이었으며 아름다운 여인들을 향하여 안목의 정욕에 불타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를 감옥에 가두고 짐승처럼 가장 낮아져서 짐승들이 돌리는 맷돌을 돌리며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겸손을 되찾을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된 것이다.

삿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두 눈을 뺀 불레셋 사람들”

이렇게 성화된 삼손의 마음속에 불레셋 사람들에 대한 옛날의 육적인 분노의 복수심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의 복수는 더 이상 땅의 감정적인 육적인 복수가 아닌 하늘의 영적인 복수였다. 그 하늘의 복수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를 장님으로 만들어 맷돌을 돌리게 한 블레셋 사람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알게 하여 그들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블레셋 사람들의 머리에 숯불을 놓는 것이었다.(롬 12:20) 더 이상 악으로 악을 갚기를 원하는 과거의 삼손이 아니었다. 지금의 삼손은 마침내 악을 선으로 이기는 복수를 원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은 절대로 육적인 복수를 허락하시지 않을 것을 삼손은 알게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서서히 하늘의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 삼손은 옥중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가면서 새로운 영적 눈을 얻게 되었다. 그는 사단이 자기의 육적인 두 눈을 통하여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하여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였음을 깊이 깨닫기 시작하면서 그의 눈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마침내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기 시작했다. 삼손은 두 눈을 뽑힘으로 새로운 눈을 얻게 되었다. 삼손의 가슴속에 성령의 역사로 솟아오르기 시작한 그 감사의 마음으로 인하여 그는 불레셋 사람들을 다시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그는 그 불레셋 사람들이 사단에게 깊이 속아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을 사단의 거짓으로부터 자유케 하여야 한다는 확신이 삼손의 마음속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성화된 마음을 품은 삼손의 입으로 말한 “나의 두 눈을 뽑은 불레셋 사람들”이란 말은 “나를 새로운 눈을 뜨게 한 사람들” 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말은 “나를 하나님께 다시 인도한 사람들” 또는 “아직도 사단에게 속아 있는 나의 형제자매들”이라는 성화된 의미로서 새롭게 삼손의 가슴에 와 닿아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18: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의 두 눈이 뽑히는 고통을 함께 당하실지라도 그 아들을 구원하고 싶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아야 한다.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순교자로서의 삼손으로 변화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했다. 이번만(오직 이번 한번만, only this once, KJV) 힘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한번만 더”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는 자기가 스스로 강하여 힘이 있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상 전혀 강하지 않았음을 절실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마침내 모든 힘이 하나님께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해본일이 없었다. 그는 사자를 죽이고 나서 자기를 강한자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그 당시의 자기의 모든 힘이 자기 자신의 힘인 줄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발휘한 힘과 복수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음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두 눈을 잃은 삼손은 옥중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이다. 이제야말로 삼손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학수고대하시던 바로 그런 기도였다. 땅의 복수가 아닌 하늘의 복수, 원수를 미워하는 복수가 아닌 원수를 사랑하는 복수, 곧 하나님의 복수를 하기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기뻤다.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그는 자기의 육적인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과도 한 형제요 자매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불레셋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을 알게 하여 그들과 하나님 안에서 “함께 있고” 싶었다. 불레셋 사람들도 그들의 죄로부터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 생명이 필요했다.

이것을 위하여 삼손은 자기의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러한 그의 순교자적 죽음은 다곤 신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삼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삼손이 기도하는 모습을 불레셋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 불레셋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이미 삼손을 버렸기 때문에 절대로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절대로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여호와보다 그들의 신이 더 강한 신이라고 믿고 마음껏 그들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이신 여호와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비웃음은 전적으로 생명을 거부하며 사망을 선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의 성전의 기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순간은 불레셋 사람들에게 그들의 선택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망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사단의 거짓을 벗어나서 창조주를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는 큰 깨우침의 순간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삼손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자기들의 하나님임을 블레셋 사람들로 알게 하는 순간이 되었다.

다곤 신전의 무너짐은 큰 성 바벨론의 무너짐을 표상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창주주의 품성의 능력이 나타나신 바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곤 신전을 무너지게 한 힘은 분명히 삼손 자신의 힘은 아니었다. 그 힘은 그 곤고하고 못난 한 죄인에 불과한 두 눈이 뽑혀버린 삼손일지라도 그와 함께 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힘일 수밖에 없었다.

삿16: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다곤 신전의 두 기둥을 미는 삼손의 모습에서는 한 점의 분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모습은 사울의 돌에 맞아 피 흘리면서도 자기의 원수인 사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스데반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삼손의 얼굴은 스데반의 얼굴에 비취었던 하늘의 사랑의 빛, 바로 생명의 빛으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전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불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채를 보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얼굴, 곧 여호와의 품성을 보았다. 삼손은 함께 죽어가는 불레셋 사람들을 향하여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는 너희를 사랑하시는 너희들과 나의 창조주이시다”라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천사들도 삼손과 함께 불레셋 사람들의 가슴에 호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모든 불레셋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다음과 같이 호소하셨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생명인 나를 거부하고 선택한 죽음 때문에 나의 보호의 손을 거두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구나!, 사랑하는 내 자식들아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너희가 돌아오기를 바란단다. 부디 나를, 생명을 선택 하여라, 나 여호와는 너희를 창조한 생명의 하나님이니라! 부디 둘째사망만은 당하지 말아라! 부디 나를 받아드려라, 다시 선택하여라! 내 자식들아!”라고.

이 성령과 천사들과 삼손의 부르짖음이야말로 마지막 때를 당한 오늘의 세상거민들을 향하여 외치시는 세 천사의 기별이었으며 큰 외침이었던 것이다. 그 삼손의 마지막 큰 외침을 많은 불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의 음성으로 받아드렸다. 그들은 첫째사망은 그들의 선택대로 이렇게 맞이했지만 둘째사망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내 그들도 재림의 아침에 부활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다. 그날 삼손은 큰 구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마치 스데반이 사울을 구원하는 큰 구원을 이루고 마지막 숨을 거둔 것처럼 삼손과 스데반은 참으로 장렬한 순교를 한 것이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 이 말씀을 삼손이 불레셋 사람들을 죽인 숫자만을 비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땅의 생각이요, 영적이 아닌 육적인 생각이다. 영과 육, 하늘과 땅의 생각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사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영적인 말씀은 영적으로 분변할 줄을 알아야 한다.

[고전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적인 삼손이 자기 스스로의 힘만 믿고 자기만 나타내었을 때에 이룬 일들 보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죽고 나서 영적인 삼손이 되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을 힘입어 이룬 일이 훨씬 더 생명적이며 위대한 교훈을 남겼다는 뜻이다. 그가 목숨을 바쳐서 이룬 그 큰 구원의 일은 그 당시에나 오늘에 와서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삼손의 죽음은 불레셋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삼손과 입다의 공통점

삼손도 입다처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정직했다. 입다는 정직하게 과잉충성을 했다면 삼손은 정직하게 망나니가 되었다. 삼손은 겉보기에만 거룩한 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판단과 행동에는 문제가 많았고 부족한 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을 결코 잊어버린 일이 없었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을 들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위와 같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역시 사도 바울도 사사들과 선지자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시며 사용하셨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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