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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예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 왜? 병 낫게 해주신다는 소문이 나니까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움직일 틈도 없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부르짖었으나, 그 진리, 생명 보다는 그분에게 가면 단순히 내 병이 낫는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 길과 진정으로 진리, 생명으로 가려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무리들은 오히려 방해가 되며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2년이라는 참으로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혈루병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하혈하는 병이었던 모양이지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온갖 의사를 다 찾아 다녔는데, 온갖 괴로움을 받았고 그래도 낫지 않고 있는 돈도 다 써버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쯤 되면, 이 환자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자포자기해야겠지요, 네, 이쯤 되면 사람들이 두 종류로 나눠집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포자기 합니다. 그저 술이나 먹고 마약에 빠지거나 우울증에 빠져 절망하고 말지요?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 사람은 나를 못 고칠지라도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아직 계시지 않느냐?’ 라고 말하며 아직도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하는 사람과 희망을 가지는 두 종류의 사람 중에서 이 여자는 어떤 여자였습니까? 희망을 가지는 여자였습니다. 희망을 가진 이 여자가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보통 여자들은 이렇게 병이 깊어지고 아무리 의사를 찾아가도 낫지도 않고 하면 자연히 무슨 생각을 하게 되겠습니까? ‘아! 하나님께서 내가 옛날에 지은 어떤 죄를 벌주시기 때문에, 아무리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도 내 병이 낫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벌을 거두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누구든지 절망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그 죄 때문에 나를 어떻게 대하신다고 생각하게 됩니까? “저리 가! 너는 죄 지었잖아”이렇게 성내시며 푸대접하시는 분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나를 밀어 내시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꼭 나를 어떻게 하시는 것 같습니까? 밀어 내버리시는 것 같은, 뭐가 듭니까? 그런 공포심이 들고 그런 마음이 들게 딱 되어 있습니다. 특히 여러분처럼 병이 들었다 하면 꼭 그렇습니다. 죄 안 지어 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죠? 자기 마음속에 숨겨놓은 꺼림칙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처럼 착각을 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왔고...

여기 이사야서에 59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의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됨이니...」

기도 되게 크게 하는 사람 보면 이 성경구절을 들려주고픈 생각이 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이것이 무슨말이냐 하면 죄를 지었다고 내가 너를 차버리는 것이 아니라, 누가요? 나는 네가 죄를 지어도 멀리 가기를 원치 않는데 그 지은 죄가 너를 나로부터 분리시켜 멀리 떨어뜨려 놨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제가 조그마한 어린아이였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착하다고 했어요. “상구, 저 애는 참 착해.” “참 점젆아.” 뭐 여러 가지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착하고 점잖게 보였던 이유는 우리 아버님이 굉장히 엄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엄한 부모들 밑에서 크면 언뜻 보기엔 착하고 점잖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속을 잘 알거든요. 제가 제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혀 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착하다고들 그러니까 착한 척 하고 살아야지 어떻게 합니까? 그게 바로 괴로운 인생이지요. 자, 그런데 우리 아버님이 제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시고 그때가 피난 시절의 부산입니다. 참 형편없었지요. 그때 삼촌이 두부를 만들어 파시는데, 그 두부 가게로 가끔 우리 삼촌이 저를 불러요.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제일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 삼촌이 어디 가시면서 불러서 두부를 좀 팔아달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물론 기분이 좋지요. 삼촌이 떠나시자마자, 조그마한 나무로 만든 돈궤를 열어 봅니다. 한 군데는 일원짜리, 또 한 군데는 오 원짜리, 백 원짜리, 이렇게 되어있는데, 살짝 열어보고 백 원짜리도 안 건드리고, 일 원짜리도 안 건드리고, 한 오원짜리쯤, 그것도 많이 있을 때 꺼냅니다. 적게 있으면 안 건드리고...... 머리가 좋았어요. 삼촌이 저를 참 좋아 하시는데 그 돈을 꺼내가지고 제 주머니에 탁 넣는단 말이에요.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도 삼촌 얼굴을 대면하기가 두려워 지지요. 그 좋던 삼촌의 얼굴이 그때부터 보기 싫어집니다. 그러니까 삼촌이 나를 아무리 사랑시고 계실지라도 내가 삼촌에게 죄를 지어 놓으면 나는 자연히 삼촌이 무서워지고 보기 싫어지도록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바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너를 미워해서 밀어 내 버리는 것 같지? 하지만 그게 아니다. 너가 나를 두려워하며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나를 네가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우리의 느낌이나 잘못된 세상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믿지 말고 진리대로 믿어 달라는 아직도 죄지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우신 호소입니다. “나는 사실은, 네가 나의 돈을 훔쳐도 네가 좋다.” 이겁니다. 바로 이런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분의 사랑이 변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알자!, 했지만 그렇게 알자고 구호만 외쳐본들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은 어디 쓰여 있습니까? 성경에 쓰여 있다 이겁니다. 이 성경 속에서 그런 걸 하나하나씩 배워 나가면, 아하! 하나님이 우리 삼촌같이 인자한 분이구나 하는 걸 깨달아 알게 됩니다. 물론 삼촌 사랑 이상의 사랑이겠지요, 물론, 그렇죠?

그런 삼촌이 볼일을 다 보시고 이제 두부가게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착한 조카에게 물어보십니다. “두부 몇 개 팔았어?” “일곱 개 팔았어요.” “그러면 구부 한 개 값은 네가 가져라.” 그러면서 돈을 꺼내 주신단 말씀입니다. 그런데 삼촌과 하나님이 다른 점이 무어냐 하면 삼촌은 내가 돈을 훔친 줄을 모르시고 다시 돈을 주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에요? 훔친 줄 알지만 돈을 또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죄인의 마음이 녹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무서워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 삼촌이 나를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이렇게 믿어 주시는데.....,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훔친 줄 알면서도 내가 훔쳤다고 고백하지 않는 나를 우리 하나님은 안 훔친 걸로 쳐 주시며 안 훔친 걸로 믿어주신다는 말씀이지요. 훔친 것이 아니라 잠간 주머니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주시며 그렇도록 바라시고 계시는 분이시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주시고 앞으로는 분명히 착한 사람이 되 것을 바라주시는 것입니다.

 

고전 13:5 --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예,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의 진리를 알게 되면 ‘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자연히 들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치유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상하고 꺼져버린 유전인자들을 쓰다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너지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저를 감동시켜 주셔서 이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저의 유전자들부터 만져 주시고, 그러고서 제 입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할 때에 여기 계신 하나님의 생기는 여러분의 세포 속으로 들어가시고 계시는 겁니다. 이것이 정말 복음이라는 바로 그 말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고 목청껏 외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정말 이러한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순수한 복음이라 해서 순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아름다우신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 속에서 볼 때 정말 자연스럽게 엔돌핀 생산 유전자가 켜지면서 엔돌핀이 생산되어 혈액 속으로 나온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혈루병 환자는 무엇을 아는 사람이냐 하면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아는 환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사랑을 알게 되었을까요? 성경에서는 그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사람은 어차피 사람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도 사람 의사를 믿고 의지하였지만 절망으로만 치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음식을 잘못 먹은 이유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생활습관의 문제와 인간관계의 문제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이러한 질병에 걸리게 되었겠지만, 이 여자는 자기의 이런 과거의 모든 것들을 다 용서해 주시고, 자기를 그래도 아껴주시고 사랑하시며 치유해 주실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무수한 군중을 해치면서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애써 서 예수께로 접근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예수님에 대하여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된 연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에 관하여 어떠한 소문을 들었기에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 여자의 믿음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아무런 지위도, 권력도, 돈도 없는 비천한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깊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와 단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무식한 믿음이 아닙니까?, 아니, 너무나 단순하고 아름다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아닙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어떤 소문이길레--

 

갈릴리에서 온 예수라는 어떤 젊은 목수가 아무도 가까이 접근하기도 꺼리는 문둥병 환자를 직접 만지시어 그 문둥병을 낫게 하더라는 소문이죠.(막 1:41) 그 여자에게는 정말 놀라운 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는 특히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질병이라고 믿었고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죄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서 형벌을 주신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수는 그런 문둥병자를「만자시더라」는 정말 놀라운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그 여자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문둥병자를 낫게 하셨다면 자기의 혈루병도 낫게 하실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고칠 수 없는 병들을 고치시는 분이시라면 그 예수는 정녕 하나님이심이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며’ 라는 이 말씀, 정말 놀랍고도 심각한 말씀입니다. 왜? 그 당시에는 문둥병 환자라면 인간으로 대접 받는다는 것은 전혀 어림도 없었습니다. 문둥병자 근처도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그 문둥병 환자가 가까이 오면 “저, 하나님께 저주 받은 놈!”이라고 소리치면서 돌을 던집니다. 즉, 저것들은 죄를 워낙 많이 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주 가망 없이 저들을 쳐서 저렇게 저주받은 문둥병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버린 것은 우리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어께에 손을 대었습니다. 10년 20년 동안 사람의 손길을 느껴보지 못한 그 문둥병지의 온 몸에 사랑의 전율, 생명력이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생각하기를, “그래, 참 하나님이 계시다면 예수처럼 문둥병자도 사랑하시는 인자로우신 분일꺼야!, 그래, 예수라는 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야!” 라고 확신 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생각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과는 확연하게 다른 생각을 한 여지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에게 믿음을 심어주었고 그 믿음이 그를 예수께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진정한 품성, 곧 예수를 아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죄인을 다루시는 품성이 실제 예수님의 품성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실은 요사이도 그런 경향이 많습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주 무서운 하나님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그 하나님이 문둥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소문, 또 예수를 만나본 일도 없었고 믿음이 하나도 없었던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도 낫게 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가 오직 희망을 걸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저주 받은 문둥병도, 하나님께서 치신 것으로 알고 있었던 중풍병도 고쳐 주시는 그런 자비로운 하나님?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께, 그 사랑에, 그 자비로우심에 희망을 걸고 이 여자가 예수께로 갑니다. 예수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이죠. 우리 모두도 이런 참 예수의 소문이 필요합니다. 그 여자는 자기의 혈루병도 하나님의 형벌이나 저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예수의 소문”, 곧 생명의 복음을 듣게 되자 자기를 벌준 하나님은 사실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예수의 소문을 듣자 말자 자기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죄가 있어도, 백부장의 하인이 믿음이 없었던 것처럼 아직도 자기에게도 깊은 믿음이 없을지라도 그분의 자비로우신 품성만을 믿고 그분에게 나아가기만 하면 그분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쳐주시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예수의 소문”을 들어보신 일이 있는지요. 이 세상에는 엉뚱한 소문, 거짓 예수의 소문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 왜? 사람들이 병이 낫고 하니까 떼를 지어서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움직일 틈이 없어 간신히 앞으로 나아가시고 계셔요. 그러면, 이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랬는데 그 진리요, 생명에 가면 내 병이 낫는다는 확신이 있는데 그 길과 진리, 생명이라는 것에 가는 것이 원래부터 쉽지 않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왜? 그 많은 무리들은 그저 따라다니면서 재미있는 것도 보고 축복도 받을 것 같고......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자기를 완전히 바치기 보다는 이거 뭐 괜찮은 데다, 교회를 가니까 장사도 잘 되겠더라,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 때문에 진정하게 하나님을 찾으려 하는 사람, 생명에 가까이 가려 하는 사람, 진리에 가까이 가려 하는 사람들이 방해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는 심각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에 가면은 먼저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방해를 합니다. 그렇죠? 구원을 받으려면 뭐 뭐 어쩌고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별로 필요치 않은 여러 가지 조건들을 내어 겁니다. 그렇죠?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안 믿으시는 분들이 많지요,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구하려는 이 여자같은 환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용기가 있어야 합니까? 그 예수와 자기 사이를 가르고 있는 이 무리를 헤치고 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즉, 모든 인간적인, 인위적인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생명을 필요로 하고 원해야 됩니다. 그 만큼 진리를 원해야 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파고 들어 갑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여자가 파고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압니다. 하나님이니까 알지요. 그런데 제가 오늘 저녁에 말씀드릴 제목이 무엇인가 하면은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입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그런데 예수님이, 누가 자기를 향해서 접근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옷을 누가 와서 만졌는데 엉뚱하게 뭐라고 합니까?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그런데 그것은 모르고 한 말입니까, 알고 물은 말입니까? 물론, 알고하신 말씀입니다. 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물었을까 하는 질문을 좀 해봐야 한다 이거지요. 왜 그런 질문을 한번 해봤을까요? 아시는데 왜 그렇게 물어 보셨을까? 누가 지금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은 기다렸을 겁니다. ‘그래, 내 딸아 용기를 잃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조금씩 힘들어도 오너라’ 그런데 사단이 여러 사람들을 그 앞에 보내 놓고 여자를 못 가게 방해했겠지요, 그렇죠? “여보쇼 이렇게 밀어 붙이면 어쩌란 말이요!” “미쳤어!?” 라고 소리치면서--

그래도 여자는 열심히 사과하면서 굴하지 않고 무리를 뚫고 예수께로 생명으로 나옵니다. 드디어 그 사랑하시는 불쌍한 딸이 자기를 만지는 순간을 기다리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냐!” 하나님의 이 말씀이 굉장히, 참으로 은혜스러운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몰라서 그렇게 물어 보신 게 아니지요.

제가 한 번은 이걸 좀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알면서도 왜 그렇게 왜 쓸데없이 묻기는 물었습니까?” 성경을 보면 알면서 물은 말이 많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낫고자 하지 않으면 왜 그렇게 38년을 베데스다 목가에서 그 환자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그렇죠? 금방 낫게 해주면 되지 뭘 또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묻느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게 이유가 있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이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하는 것에 대해 기도로 질문을 한 번 해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묘한 방법으로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제가 하루는 집에 가니까, 그 때 당시에 막내 놈이 아주 어렸어요. 다섯 살인가 됐을 텐데, 우리 둘째 딸애가 학교에서 뭘 하나 조그마한 이쁜 걸 만들어 왔는데, 그걸 자기 거래요. 저도 우리 둘째 딸이 만든 것이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죠. 제가 이 층에 올라가서 “아니야, 그것은 누나가 만든거야.” 이렇게 제가 올바른 판단, 곧 ‘심판’을 해주었지요. 그런데 그 녀석이 아빠의 심판을 받으니까 화가 나가지고 그걸 집어던지면서 아빠하고 이제 안 논대요. 아빠하고 이제 인연 끊었다 이거지요. 아빠가 끊었어요, 자기가 끊었어요? 자지가 끊었지요. 자기의 죄 때문에 자기 스스로 아빠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겁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인연을 끊는 것은 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내 속에 켕기는 게 있어서 싫어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그 아들이 관계를 끊었다고 해서 아빠도 인연을 끊어요? 절대로 끊지 않지요, 어떻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과 인연을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여러분과의 관계를 결코 끊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죄가 많고 악하더라도 결코 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하여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새롭게 하시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 하나님의 심판을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는 것이라고 속이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가정생활에서도 하나님과 나 사이를 배워야 합니다. 가정이 성경만큼 정확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집에서, 여러분의 가족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교회주의자는 아닙니다. 교회에 나가세요. 서로서로 도와 줄 수 있고...... 어쨌든 제가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아빠하고 안 놀아!” 그러면서 “으~엉!” 울면서 저의 침실 방바닥에 들어 누워 침실 벽을 발로 차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당장, “이 녀석! 뭐, 어째?, 좀 맞아볼래!” 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텐데, 성경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랑을 어떻게 한다구요?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그래, 네가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놈이 이 아빠와는 이제 다시는 안 논다 해도 나는 저를 사랑하는 것이 이 아들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아빠는 이 위대한 사랑의 진리를 믿습니다. “사랑을 모든 것을 믿으며......”(고전 13:7)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바로 이렇습니다. 죄인들일지라도 항상 믿어 주십니다. 혹시, “이 나쁜 놈과 이참에 그냥 관계를 끊어버릴까?” 라고 절대로 악한 것을 생각하시지 않습니다.(고전 13:5) 그래서 저는 이제 저의 침대 위에서 신문을 보는 척하며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녀석이 한참 징징대며 울다가 지겨워지기도 하고 무료해지기도 한 것 같았습니다. 이제 아빠 생각이 좀 나는 모양이에요. 이 아버지는 물론 알지요. 그래서 제가 시치미를 떼고 창문 밖 나뭇가지 위의 새를 보면서 “야, 새봐라. 새. 나뭇가지 위에 새봐라!” 그랬더니 그놈이 큰 소리로 “안 봐!” 합니다. 그래, 안 봐? 아직도, 아직 좀 멀었어. 그래, 아직 좀 멀었어. 아직도 좀 뭐가 남아있어요? 자존심이 남아있어요. 그렇죠? 사실 “야! 새 봐라”할 때에 같이 보고 싶었는데...... 아, 저는 안 본대요. 좋다. “사랑은 또 오래 참고......” 좀 있다 또 심심한 모양이에요. 벽을 차다가 일어나서 어디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버지하고 같이 놀자고 할 수도 없고 이게 입장 곤란하게 돼 있지요. 그것이 죄인의 자존심이라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오도 가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야, 나가서 야구하자!” 그랬더니 큰 소리로 “안해!” 그래요. ‘하! 아직도 때가 차지 않았구나’ 그래서 이제 “하나님, 빨리 저 녀석의 마음 좀 바꿔 주십시오.” 하며 한참 그러고 있는데 뿌드득! 뿌드득! 소리가 나요. 무슨 소린가 가만히 들어 보니까 그놈이 누워 있는 방바닥 카페트였어요. 예, 아들 녀석의 옷과 카페트가 마찰하며 스치는 소리였습니다. 이렇게 살짝 보니까 저를 향해서 조금씩 가까이 오고 있어요. 그냥 가까이 와서 “아버지 내가 잘못 했어!” 그러면 좋을 텐데 그 자존심이 뭔지, 그 오기는 왜 부리는지......아빠와 이제 화해는 하고 싶은데, 그래서 저도 할 수 없이 쪼끔 뿌드득! 하고 내려가 봤지요. 그러니까, 제 발가락하고 이 녀석 손하고 가까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한 십분 동안 뿌드득 거리더니, 안 오는 척하고 오더니 손을 이렇게 뻗어서 저의 발을 만지려고 하나 봐요. 제 발가락과 고 녀석 손가락 사이가 아주 조금, 요만큼 차이가 났어요. 제가 그 당시에 아하, 이 심정이 예수님의 심정 이었겠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너무 빨리 “아이구, 이제 항복하고 돌아오느냐r?”고 말해도 이게 또 안 올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거 참 아슬아슬한 순간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죄인을 조심스럽게 다루시는 아슬아슬한 순간의 예수님의 마음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모른 척 하고 쪼끔 내려가 주시고...... 야고보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를 가까이 하리라」(약 4:8)

 제가 이 말씀을 처음 접하고 느낀 심정은, 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로 오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보고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라고 말씀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제가 막내 놈에게 “새봐라!” 했다가 딱지 맞았잖아요. 하나님이 그래서 먼저 가까이 안 하신다 이거예요. 죄인이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께 자꾸 딱지를 놓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가까이 오시기가 그렇다 이거지요. 그래서 죄인인 우리가 가까이 먼저 하나님께 가까이 해봐라, 그때 하나님이 안심하고 가까이 오실 거라는 이런 뜻이지요. 그래서 제가 뿌드득! 하고 조금 더 가까이 내려가 주었지요. 그러니깐 요만큼 더 가까워 졌어요. 막내가 나중에 뿌드득! 하더니 마침내 손을 뻗어 싸~악 제 엄지발가락을 살짝 만져요. 제가 누가 만졌는지 다 알지요, 모를 리가 없지요, 제가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인데, 그래서 제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누가 내 발가락을 만졌냐?” 그랬더니 녀석이 “내가 만졌어!” 하는 거예요.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 아닙니까? 아들이 다시 아빠 품으로 돌아왔지요, 죄인과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만나기가 그렇게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지만 죄인이 자꾸만 주저하며 세상이 좋아서 밍기적거리며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지연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고집대로 그냥 강제로 관계를 회복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 13:5) 모든 인내하시며 관계의 회복을 바라시며 성내시지 않으시며 무례히 행하시지 않으시며 조용히 죄인을 기다라십니다.(고전 13:5) 이렇게 참으시며 기다라시는 이유가 바로 인간에게 은혜로 주신 선택의 자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옷자락을 만져서 나았다는 것보다 정말 이 여인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때 그 속에서 기쁨이 넘친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도 너무 기쁘니까 알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죠?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냐!” 하니까 이러한 깊은 사연도 모르는 베드로는 “사람들이 이렇게 밀치고 닥치는데 누가 만졌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나님을 잘 알아요, 몰라요? 모릅니다. 그 때도 하나님께서 “누가 나를 만졌느니라. 내 능력이 나갔느니라!” 나간 게 뭐 자동적으로 나간 게 아니라 “만졌지? 그래 이제 나의 생명의 능력을 나가게 하지!” 이렇게 됐다 이겁니다. 사랑의 능력이 마침내 나갔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이 뉴스타트 프로그램까지 오신 이 순간이 무슨 순간이겠습니까?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옷자락에 손을 대시는 그 직전의 순간이지요. 그렇게 오시고 싶었어도 얼마나 오래 동안 별러서 오시게 되었습니까? 그렇지요? 오래 걸리셨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뭐 거기 가봤자 풀만 먹고 죽는다, 어쩐단 한다는 세상의 소문 말입니다. 그게 우리 세상의 무리, 곧 군중들입니다. 생명의 길을 가려는 것을 오히려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신 것은 이 여자가 이 무리를 뚫고 마침내 옷자락을 만진 순간과 같은 순간입니다. 참 기쁜 그런 순간입니다.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선택의 자유를 올바로 행사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귀에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는 반가운, 참으로 감격한 여러분의 유전자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이 여러분의 변질된 유전자에 와 닿아서 치유 받으시는 놀라운 체험을 하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그 순간이 빨리 오게 되기를 학수고대하시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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