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 치라”
성경공부 하기 전에 짤막하게 기도하십시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도 우리가 아버님의 말씀을 펼 때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고 과연 얼마나 우리가 아버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될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올 때, 우리 몸에서는 엔돌핀이 생산되어 나오고 그 사랑이 그냥 사랑이 아니라 우리 세포의 변질된 유전자 하나하나를 참으로 재창조 하실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깨달음 주시고 새로운 기쁨 주시옵기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멘!”
오늘 저녁에는 요한복음 8장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낸 아름다운 얘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3절, 4절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유대인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여자를 한 명 잡아서 끌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어떤 여자냐 하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되어 붙잡힌 여자이니 도저히 종교지도자들인 그들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죄의 형벌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그런 극한 상황입니다. 구약성경의 모세의 율법을 보면 간음하다가 잡힌 사람은 끌어내다가 돌로 쳐 죽이라 그랬습니다.(신 22, 21-24) 글자 그대로만 하면 무시무시합니다. 그렇죠. 성경이 무시무시해집니다. 그렇지요?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우신 분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가르치십니까? 베드로에게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그랬습니다. 모세가 한 말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죠? 간음한 사람을 보거든 당장 잡아 끌어내서 돌로 쳐 죽이라는 말하고 용서해 주라는 말과는 서로 일치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정말 그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죠? 그 당시의 서기관들은 오늘의 신학자들이죠, 하나님을 제일 잘 안다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글자대로 읽어 보니까 뭐가 확실합니까? 간음한 사람이 있거든 돌로 치라 하는 것이 글자대로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분명하게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석 한답시고 그 여자를 잡아 청년목수인 예수께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따지는 상황입니다. 그 여자와 예수를 가운데 두고 그 젊은 목수에게 질문을 합니다. 질문이 이겁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이렇게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라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목적은 예수가 모세의 율법과 반대로 가르치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그의 거짓을 고소하고자 함입니다.
요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런 서기관들과 바라세인들일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입장은 참 곤란해진 순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을 이용해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를 대적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 참으로 묘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런 순간입니다.
요즈음도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말씀 속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인데 그 안에 뭐밖에 없습니까? 글자밖에 없습니다. 이해심이나 사랑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글자밖에 없는 말씀, 곧 하나님의 참 마음은 찾아볼 수 없는 껍질만 남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를 정죄하며 비판하고 있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말씀은 마음을 나타낸 것이지요, 그러므로 말씀 속에서 말씀하신 분의 마음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말씀은 말씀이 아니라 글자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니까요. 그러므로 이 사랑이 없는 말씀, 이 껍질 밖에 없는 글자만으로서 성경을 공부하면 성경이 굉장한 모순덩어리로 변해버리며 산산조각이 나서 혼동이 돼 버립니다. 구약과 신약이 다르게 보이고 이쪽에서 보면 이렇고 저쪽에서 보면 저렇고 도무지 성경은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이상한 책이 되어버립니다. 그 결과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이분법적인 하나님이 나타나게 되며 심한 경우에는 구약성경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극단론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글자 뒤에 숨겨져 있는 무엇을 보면 조각나버린 성경말씀이 하나로 조각모음이 되고 이해가 가능하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 글자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성경을 보면 마침내 구약과 신약성경이 통일이 되어 하나가 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 곧 그분의 사랑으로 산산 조각이 나버린 성경을 조각모음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정말 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성경해석과 하나님의 사랑의 영을 받지 못하고 신학적, 논리적 차원에서만 하는 성경해석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8장의 “돌로 치라” 는 구약 속의 말씀에 대한 두 다른 해석, 곧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해석과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여 사랑을 그 율법 속에서 보지 못하고 글자만 보는 그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잘 못된 구약율법의 해석이 마침내 충돌하며 갈등하는 중요한 대결의 장면입니다. 이 대결은 결국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의 대결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성경전체가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의 대결을 나타내고 있지만 특히 신약성경은 참 여호와이신 예수와 거짓 여호와로서의 거짓 예수의 대결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이 된 사울과 그 사울이 돌로 쳐 죽인 스데반의 대결이 바로 사울의 거짓 여호와와 스데반의 참 여호와이신 예수의 대결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사울은 마침내 그 피 흘리며 죽어가는 스데반의 기도와 그의 얼굴에서 비취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광체를 보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자기가 그 전까지 해석했던 구약 속의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 속에 숨겨져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마침내 깨닫게 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후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그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을 잘 못 해석하여 글자대로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냥 문자 그대로만 그 율법을 지킨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이라고 해석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율법을 이해하면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품성을 심각하게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의 명령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사람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살리라는 뜻”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새롭게 율법을 이해하게 되면 그 율법이 마침내 새로운 사랑의 율법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면서 그 율법 속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서워 보이기만 하던 율법이 너무나 좋아지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품성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면서 다음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일지라도 그 율법들을 더 굳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롬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마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본래 다음의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신22:24 너희는 그들(남자와 여자)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로 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위의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해석하여 보이시려고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 앞에 꾸부리시고 땅에 무엇을 쓰시기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시지 않고 폐하시는 것으로 오해 받으실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율법의 완전한 의미를 보여주셔서 그야말로 그 무섭게만 보이는 율법 속에 숨기워져 있는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어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 속에서 사랑을 보아야만 마침내 그 사랑의 의, 곧 그리스도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세인들의 문자만의 율법의 의보다 더 나은, 더 뛰어난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마5:20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은 흔히 오해하는 대로 마치 그들을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사랑의 하늘나라로 “그들이 결코 자진해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 속에 있는 사랑을 가르쳐주어도 그러한 새로운 율법의 해석과 이해를 거부하고 율법의 글자 그대로를 고집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의 나라로 아무리 간곡히 초청을 하셔도 결코 그 초청이 응하여 그 사랑의 나라,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듯입니다. 그 말씀의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세의 율법 중에 복수에 대한 율법이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출21: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레24:20]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신19:21]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위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피해를 입은 만큼 복수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 또 다른 곳에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19: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자, 여러분,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원수를 철저히 갚으라고 명령하시고서는 또 저기서는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글자대로만 한다면 정말 모순이며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그 당시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유대인들은 어떤 결론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원수를 갚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버리고 사실 실생활에서 그렇게 행하며 실제로 원수를 갚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율법은 그냥 무시하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율법은 알아도 그리스도는 모르는 상태’입니다. 율법주의라는 말의 진정한 뜻이지요.
유대인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율법을 지켜온 것은 그 율법 속의 하나님의 마음, 곧 그분의 사랑을 전혀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에 속하여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거부하며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받아야만 율법 속의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게 됩니다.
[빌2: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직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전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너희가 들었으나”
마침내 모세에게 직접 그 율법을 주신 예수께서 당신의 율법을 문자로만 보고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직접 그 율법 속에 있는 진정한 당신의 뜻, 그 율법을 그렇게 주셨던 당신의 참 의도를 밝히시는 모습들이 마태복음 5장 17절의 율법의 완성과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보나 더 뛰어난 의를 말씀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율법들을 오해한 부분들을 “너희가 들었으나”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마침내 그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는 말씀을 하시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라는 말의 듯은 “너희가 오해하였지만” 이라는 뜻입니다. 그 중에 원수 갚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서 38절의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너희가 이 복수의 율법에 관하여 지금까지 배우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본래 뜻하신 바와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시고 있습니다. 즉 당신의 유법을 맡긴 백성인 유대인들이 그 율법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씀이지요.
다음의 말씀에서도 모세의 율법에 이혼을 허락하신 부분에 대해서도 그 율법을 글자대로만 이해하지 말고 당신의 완악하여진 죄인들을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죄인들이 이해하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안타까우신 심정과 따뜻하신 품성을 이 율법 속에서 읽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신24:1]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냥 글자로만 읽으면, 남자들은 그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혼증서 하나 써서 아내의 손에 쥐어주고서는 내어 쫓아버리라는 말씀 아닙니까? 이것이 과연 율법의 진정한 의미, 곧 하나님의 참 뜻일까요? 그렇지 않아야겠지요. 그러면 그 율법 속에 있는 사랑을 찾아내어 보십시다.
본래는 그렇지 않아야 될 것, 그 이혼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신 그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아무리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는 그 사랑이 고린도 전서 13장의 그 사랑인 것입니다, 곧 성내시지 않으시며 자기의 생각(주장)대로만 하시지 않고(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보아야 합니다.
[마19: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위의 이혼에 관한서 율법에서 보신 바대로, 표면적으로만 보면 마치 이혼을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내면의 하나님의 진실은 이혼을 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부디 이혼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라” 바로 이것이 본래의 하나님의 뜻이지요.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38절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복수하라는 율법도 표면적으로는 마치 복수를 하라는 뜻으로 보이는 율법일지라도 그 내면의 뜻, 곧 율법 속의 그리스도의 뜻은 원수를 갚지 말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이 본래의 뜻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시면서 마 5장 39절부터 48절까지에서 예수께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복수를 하라는 바로 그 율법 속에 넣어두신 당신의 참 뜻, 곧 사랑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시면서 친히 세부적으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본래의 뜻은 다음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표면적으로는 정반대의 뜻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율법을 모세에게 주신 당사자로서 예수님은 “그 율법을 준 내가 직접 그 율법을 해석하여 주시겠다는 뜻으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결국 “이에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율법의 참 뜻이, 곧 본래의 뜻이 원수를 대적하여 복수하지 말고 그 원수를 사랑하여 악인이든 의인이든 의로운 자든 불의한 자든, 그것을 상관하시지 않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처럼 살아라고 부탁 하시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완악하여져서 도저히 복수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져 버렸고 또 복수를 하게 되면 실제로 당한 것보다 100배나 천배나 더 갚지 않고는 속이 풀리지 않는 그토록 악한 영적상태에 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이러한 악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아프신 마음으로 그져 당한 만큼만, 즉 잇발이 한 개 빠졌으면 잇발 한 개만으로 분을 갈아 안치고 그냥 서로 화해하라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사람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완악하여졌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최소한의 복수를 허락하시지 않을 수 없으신 그분의 그 답답하신 사랑의 마음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복수하라는 말은 복수를 하지 말고 서로 원수가 된 상대방들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뜻이지요. 그래서 성경에는 위에서 보신 바와 같이 복수하라는 말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들이 서로 상충되지 않게 공존하고 있고 실상은 서로가 다르지 않고 동일한 본래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혼증서를 써서 주고 아내를 내어보내라는 율법도 매정하게 들릴 수가 있지만 워낙 완악해진 남편들의 마음 때문에 더 이상 같이 살았다가는 그 아내가 죽을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경우, 예수님은 본래의 뜻은 아니지만 그 완악한 남편의 선택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신 그 안타까우신 사랑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로 치라”는 말도 본래는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을 실제로 돌로 쳐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니라 본래의 뜻은 아무리 악인들이 완악해진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그런 놈들은 돌에 맞아 죽어야 싸다고 생각될 만큼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악인들을 사랑하시며, 또 우리들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여하튼 인간의 세상은 너무나 완악하여져버려서 어떤 사람이 극악무도한 일을 범하였을 때에 그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세상이 너무나 이질적으로 변질되어 달라져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도 하는 수 없이 어느 선에서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시기 때문에 이런 눈물겨운 율법들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몸소 이 돌로 치라는 율법의 본래의 뜻을 나타내어 보여주시는 이야기기 바로 오늘의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의문의 율법, 곧 글자밖에는 모르는 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 율법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랑, 곧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렇죠? 율법의 글자만 읽으면 이 사람들이 지금 돌을 들고 이 여자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들 손에 돌이 들려있는데 이게 정확한 겁니까, 글자대로 하면 틀린 것이 없이 정확하다 이겁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 예수님이 참 멋있습니다. 제가 하나님 같으면 “하나님 말씀이 글자뿐인 줄 알아, 이 무식한 놈들아?” 이랬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참으십니다. 아무 대꾸를 안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어떻게 했다고 그럽니까,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라고 했습니다.
우선 따지고 드는 상대를 대적하시지 않으시고 겸손하시게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 “굽히셨다” 라는 말도 참 좋습니다. 왜 좋습니까? 당당히 화를 낼 수 있는 예수님이 참 한심한 죄인들 앞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조주가 인간들 차원으로 내려와서 자기가 창조한 인간 앞에서 몸까지도 굽혀주시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예, 굽히셨다 그랬습니다. 인간의 이 무릎, 우리들의 무릎 아래로 당신의 머리와 몸을 굽히셨다 이겁니다. 고개도 숙이시고---. 저 같으면 정면으로 딱 쳐다보면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라고 소리를 쳤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안 그러셨습니다. 몸을 굽혀서 뭐하시는 것입니까? 땅에다 뭘 쓰셔요. 뭘 쓰셨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어쨌든 뭘 쓰니까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예. 멈칫했다 이겁니다. 그리곤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더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먼저 치라」그러셨습니다. “죄 없는 자”.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너희들은 이 여자만 죄 있는 줄 아는데 너희들도 사실은 다 같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없다. 혹시 있거든 한 번 쳐봐라 이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여자가 얼마나 불쌍하냐? 이런 사람을 돌로 쳐야만 한다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이겠느냐?” 왜냐하면 ‘죄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신 예수 밖에는 없으며 그런 분이 이런 불쌍한 여인을 참으로 죽이고 싶겠느냐? 라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어떻게 하셨어요? 그리고서 또 굽히시고 또 쓰십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멋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다루시는 모습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절대로 죄인을 정죄 하시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려 주시면서 그렇게 몸까지도 굽히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간에는 누구나 잘났고, 누구는 못 났고가 중요합니다. 그렇죠? 이 창녀는 간음을 하다가 잡혀 못났고 이 종교지도자들은 잘났습니다. 사람들 간에는 그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그런 차이는 보이시지 않으십니다. 이 창녀는 더 죄가 많으므로 그분의 눈에는 더 불쌍해 보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많을수록 은혜를 더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가 많을수록 더 불쌍하게 보시기 때문이시지요.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롬5:20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인간 사회에서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차별을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눈에는 다 똑 같은 죄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저 이상구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참 잘 봐 주시겠다 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그런 생각은 하나님께는 올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이 세상의 도덕적 차원의 생각이지 하늘의 영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도덕적인 면으로만 인간을 평가하시는 분이시라면 저는 그런 하나님, 안 믿습니다. 저는 아무리 못된 사람이나 다 똑같다고 봐주시며 차별 없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제가 좋아한다 이 말입니다. 또 사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이상구라는 사람이 돈 버는 거 다 집어치우고 절망 속에 있는 한자들을 위하여 뭘 한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별 다른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벌써 몇 천 년 동안 유전자가 변질 될대로 되어버려서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그 형상, 예수님과 같은 형상은 결여되어 있는 점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인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일지라도 죄로 유전자가 변질 돼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뭐 그렇게 잘난 것 없습니다. 그저 조금만이라도 하나님께 쬐끔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것밖에는 없지요. 그것밖에 없지 결국 이상구도 죄인은 죄인이다 이겁니다.
예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절대로 그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숨기고 있는 죄들을 정죄하시면서, 또는 그들의 위선을 비꼬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인간으로서 죄 없는 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 죄 사함을 받은 것을 믿는 사람이면 그분께서는 그런 사람을 죄 없는 사람으로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돌을 손에 든 그 종교지도자들 중에 참으로 예수를 만나서 용서 받아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 하나님이신 예수를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가도 돌에 맞을 짖을 했으나 예수를 만나서 용서의 확신을 얻음으로 인하여 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다면 이토록 불쌍한 죄 많은 여인도 그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여 주실 것을 믿을 수 잇는 사람이기 때문에 돌로 치라는 모세의 율법 속에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이며 따라서 절대로 글자대로만 율법을 행하지 않을 것을 예수님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런 사람은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는 말씀의 참 뜻은 “정말 너희들 중에 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면 그 사람이 이 돌로 치라는 모세의 율법을 바로 이해하고 너희의 눈을 뜨게 해줄 수가 있었을 것인데--”라고 생각하시면 참으로 안타까우신 심정을 토로하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굽히셔서 또 쓰시니까 이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있더니 각각 손에 들고 있던 이 돌들을 땅에 떨어뜨리면서 한 사람 두 사람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뭘 썼기에 그랬을까요? 각 사람들의 죄를 썼을 것 같지요? 아마 엊저녁에 점잖게 입고 나와서 한 잔하고 어디 가서 바람피운 사람이 돌을 들고 서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의 죄를 남들 앞에서 드러내시거나 무안을 주실 분도 아니시며 우리들의 숨은 죄를 드러내시어 우리를 정죄하여 강제로 회개하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쓰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런 것 같습니다. 제가 틀려도 좋아요. 이거 뭐 맞다 틀리다 해서 큰 일날 일은 아니니까. 저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간음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에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삼손과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용서 받았지요, 그렇죠? 그러므로 아마 예수께서 땅에 이렇게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도 간음했다.” 이렇게 썼을 것 같습니다. 하! 하! 그럴듯합니까? 저는 한참 생각해 보다가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고는 “그 다윗을 내가 용서했다.” 이렇게 써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렇게 쓰시는 것이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죄를 쓰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종교자도자들의 가장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사랑, 곧 그리스도를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용서받는 이 이야기는 성경에 나와 있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니 이 종교지도자들인 성경학자들이 돌을 들고 떡 서서 보니까 자기들은 돌로 치라는 쪽만 보고 실생활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런 돌로 치게 되어 있는 죄를 지은 죄인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쪽은 보지 못한 것이 확실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들이 예수께 다음과 같이 따지면서 질문한
요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는 질문이 굉장히 어색한, 뭘 모르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나타나버리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땅에 쓰시는 걸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예수)은 한 수 더 뜨는 겁니다. 단수가 훨씬 높다는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할 말이 없이 막혀 버리고 말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처럼 돌에 맞아 죽을 나쁜 짓을 한 사람을 똑같이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놀라운 사랑의 진리가 나타났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있습니까? 그것은 이 여자를 죽이려고 돌을 든 죄까지도 용서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 여자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다 사랑한다” 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애틋한 그분의 간곡한 사랑, 몸까지 굽히시면서 땅에 쓰시면서 호소하시는 그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알고 있었던 정죄하시며 무서운 분으로 맏는 그 잘못된 거짓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놓고 하나씩 둘씩 다 가버립니다. 이 순간에 그들이 놓아버리는 돌을 참 예수를 뜻하는 생명의 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죽이는 돌, 사망의 돌은 그렇게도 활신 있게 집어 들었지만 생명의 돌이신 예수는 이렇게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었을 때 그들을 잃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굉장히 아팠을 것 같습니다. 왜 아팠을 것 같습니까? 만약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그러면 그렇지, 자식들!, 빨리 꺼져”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랬을 것 같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그분은 이런 바라세인들이나 서기관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왜 아팠을 것 같으냐 하면요, 그러한 하나님을 지금 재발견할 수 있는 순간인데, 정말 차원이 높은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지도자들은 받아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은 글자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글자대로 하니까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회가 마침내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는데 왜 그 앞에서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아드리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 앞에서 “오, 하나님. 참 우리가 못났습니다. 나도 죄인이라는 걸 이제 깨달았습니다. 저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너희들은 죄인 아니냐? 너희들이 몰래 숨기고 있는 죄, 나는 훤히 알고 있다” 라고 그들을 정죄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을 느끼고 당신에게 돌라오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나와 주시길 원하시면서 몸을 굽혀 가시면서도 조심스럽게 땅에다 쓰고 있는 겁니다. 그들 앞에서 몸을 굽혀 가시면서...... “나는 너희를 정말 사랑한단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애원하시는 모습이십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자기들도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나타나니까 그것이 두려운 겁니다. 결국 이 바리새인들은 죄인을 정죄하는 두려운 하나님만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죠? 그래서 두려우니까 먼저 빨리 도망 가버렸던 것입니다.
사실 제일 먼저 도망가야 할 사람은 누굽니까? 사실, 그 여자죠. 나쁜 짓을 한 것이 확실하고 또 너무나 부끄럽고 해서 제일 먼저, “왔다! 이때가 기회다!”라고 도망가야 될 사람은 그 여잔데, 다 가버리고 누구만 남아 있습니까? 그 여자만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바리새인들이 사회적으로 보면 그 여자보다 착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죠? 도덕적으로도. 그래서 이 기독교 종교는 도덕 종교가 아니다, 이겁니다. 제가 지난번에 강의 도중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은 진리요, 생명의 종교다 이겁니다. 그래서 생명의 원칙을, 진리를 따르고 살다 보면 자연히 어떤 사람이 된다고요?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 이겁니다.
그 도덕적인 사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봉사하는 해위는 진리를 따르면서 살면 나타나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이다 이거지요. 그 봉사 자체가 목적이고 그 봉사나 선행 때문에 용서 받고 하는 권선징악적인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다 이겁니다. 진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악한 인간도 정죄하시거나 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형벌을 자초하지요. 이렇게 형벌을 자초한 인간일지라도 사랑하면서 그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남습니다. 이 여자는 마음이 참 기쁘겠습니까, 안 기쁘겠습니까, 기쁘지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 같은 것도 사랑할까?” 이러면서 살았던 여자예요. 나는 창녀요, 정말 나 같은 여자는 온 세상 사람들이 없어져 줬으면 하는 그런 여자인데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예수라는 하나님이 제일 먼저 돌을 집어 들고 자기를 칠 것 같았는데 그 몸을 굽히시어 땅에 앉아서 쓰시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그렇습니다. 죄인 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 편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걸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죄인의 편입니다.
[눅5: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딤전1: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죄인을 위해서 왔다” 그랬지, 의인을 위해서 왔다고 안 그러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죠?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 자신이 죄인인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렇죠? 내 마음 속 깊숙이 숨겨 놓은 여러 가지 죄가 많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죄를 많이 짓고 사는데 하나님은 누구 편이다? 죄인 편이다 이겁니다.
그러나 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정반대로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요9:31]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여러분들 중에서 “이상구 박사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잘 봐 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하나님은 의인 편이고 죄인 편은 아니신 분이다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저 사람은 의인이고 하나님은 저런 사람 편이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다 이겁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 편 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죄인인 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편이지 뉴스타트 운동을 하고 있는 착한사나이이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뉴스타트 운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내가 죄인이지만 내 편이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해서 뉴스타트 운동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내 편이 되어주신 분, 그것을 감사한다 이겁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혹시 내 죄가 많으니 내 죄를 좀 감추어야 겠다든지, 또는 “많이 뉘우쳐야 나를 사랑하시겠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면 틀린 생각입니다. “내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조건 없이 내 편에 서시는 분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도 한 사람, 제일 먼저 도망가야 될 이 여자가 도망을 안 가고 있는 그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은 굉장히 기뻤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이, 그 많은 죄인이 거기 있었으나 가장 믿기 힘든 한 인간이 믿어 준다는 사실, 그렇죠. 제일 믿기 힘든 입장에 있는 간음한 죄 많은 창녀가 자기를 믿어 준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 예수를 기쁘게 하셨을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하는 그 말입니다. 그 믿어 줄 때의 기쁨.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거지요. 착한 일을 할 때의 기쁨이 아니라 그 죄인이 이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죄 많은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 줄 때의 기쁨. 이것이 지고의 아름다움이라 이거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이 믿음을 참으로 고마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믿어주는 것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의로울 수 없습니다. 무엇만이 의롭습니까?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로마서 4장 3절에서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여자에게 어떻게 묻습니까?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물어요. 참 멋진 질문입니다. 왜 멋진 질문입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도 죄인을 정죄할 존재가 없다는 겁니다. 누구를 포함해서? 지금 이 여자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포함해서.
「정죄한 자가 없느냐」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이 우주에 마귀는, 사단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곧 정죄합니다. “너, 이놈, 나쁜 짓 했지! 그래 가지고 하나님이 어떻게 너를 사랑할 수 있어!, 하늘나라에 간다고? 어림도 없지”라고 정죄하며 막 다그칩니다. 남모르게 비밀리에 조용하게 다그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이 마귀라는 존재가 이상한 이름으로 옵니다. “그때 너 이런 나쁜 생각했지?” 정죄할 자가 없는데 마귀는 마구 정죄를 해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정죄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큰 오해이지요. 이 오해야말로 너무나 큰 죄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뭐라고 그러십니까?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이 여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이라야 합니까?
「주여, 없나이다」이 대답의 뜻은 “나를 정죄하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 정말 신나는 말입니다. 아무도, 왜? “다윗도 간음했다. 그런데 내가 용서했다”. 라고 써 놓은 분명이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이 예수님도 다윗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셨다는 그 사실을 다시 이 여인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그 몸을 굽히시고 쓰신 걸 봤고 그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벌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 곧 복음입니까? 사람들이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되면 모두들 하나님이 나를 정죄하며 내리는 천벌이라 믿지 않습니까? 이 여자에게는 자기를 정죄하는 자가 더 이상 있습니까, 없습니까? 함께 계시는 이 예수님도 자기를 정죄하시지 않으신다 이겁니다. “아무도 없다” 이겁니다. 바로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아시겠어요? 아무도 없다,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정죄 하랴... 이 말이 로마서 8장에 있습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영어로 하면 (If God is for me, Who Can Against me) ‘하나님이 내편이라면 누가 나를 대적하랴!’」
믿음, 내가 의인이라서 그런 믿음을 가집니까? 아닙니다. 내가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내가 죄인일지라도 이제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여자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즉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 또한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참 멋지지 않습니까? 이 여자가 그 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렇지요? 여러분들도 이 예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정작 세상은 안 바뀌었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이 여자를 정죄합니다. 무엇만 바뀌었습니까? 이 여자와 하나님의 관계만 바뀌었다 이겁니다. 바로 이런 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아시겠어요? ‘세상은 아직도 안 바뀌어서 나를 핍박하고 있을지라도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해결이 이미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싶어 하시는 구원을 받아 버렸어!” 예.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알겠어요? 이런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암으로 고생하면서도, 하늘나라에 내 이름이 이미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더 이상 절망은 없이 사는 게 신앙생활이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아무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열린 문을 아무도 닫을 자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계3:8]. 하늘나라 천국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나 같은 이런 못된 죄인일지라도 천국에 넣어 주려고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에게 열려 있다 이겁니다. 이런 걸 믿으면, 이런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변하겠습니까, 안 변하겠습니까? 변하죠. 엔돌핀이 나옵니다. 그렇지요? 그 엔돌핀은 면역력을 강회시켜 주고 결국 암도 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진짜 뭐에 맞았습니까? 가짜 돌이 아닌 진짜 돌에 맞았어요. 왜 돌에 맞았다고 제가 그럽니까? 예수님이 뭐라구요?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은 산 돌[벧전2:4]이신 또 모퉁이 돌[엡2:20][벧전2:6]이신, 반석[고전10:4]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살리는 산 돌은 죽이는 사망의 돌이 되어버렸고, 세우는 모퉁이 돌이 무슨 오히려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를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는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이 이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넘어 졌습니까, 안 넘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우시는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하고 결국 그분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는 이 돌이 무슨 돌로 되었습니까? 산 돌이 되었다 이겁니다. 그 돌이,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여자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죄인의 여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돌이 살리시는 돌을 받아드려 의인의 여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죄인의 여자는 죽고 의인의 새로운 여자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여인은 마침내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그 옛 사람, 죄와 사망의 노예이었던 이 여자는 실제로 산 돌에 맞아서 어떻게 됐습니까? 죽고 새로운 새 생명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 “돌로 치라”는 이 말을 실제로 그 돌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행동으로 다시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예수님의 해석을 믿는 자만이 그 해석을 끝까지 듣고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남아 있던 이 여인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산 돌이신 분이 몸소 그 율법을 해석을 하시려는 순간에도 그것을 믿지 않고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다 예수를 떠나 가버리어 결국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끝까지 보지 못하게 되는 참으로 가슴 아픈 장면이 이 이야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존심이 상하는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이 분이 정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면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설명해 주시는 성경을 배울 수 있다, 이 말이지요. 참 아름다운 얘깁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여러분, “돌로 치라”는 무시무시한 그 율법 속에 믿음이 들어가고 사랑이 들어 갈 때는 그 죽음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지요. 고린도 후서 3장 6정을 보시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글자(의문)의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그 글자 속에 있는 영(하나님의 마음, 곧 사랑)은 살리는 것이라」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본 하나님의 말씀은 죽이는 말씀이요, 예수님이 해석해 주신 모세 율법은 살리는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죄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산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깊숙이 박힌 하나님에 대한 죄가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새 생명을 받아드리는 조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용서를 필요로 하실 때 그 용서를 구하시고 이 간음한 여자처럼 믿음으로 그 용서를 받아 들여서, 그 산돌이신 에수라는 돌에 맞아서 이렇게 사망이 주장하고 있는 옛날의 나는 죽고, 이제 새롭고 희망찬 새 출발의 나, 생명이 주장하여 치유 받은 새로운 피조물인 내가 되시도록,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