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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암 진단을 받았던 병원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나를 본 의사가 깜짝 놀라며 “아니! 아가씨 아직도 살아있어?” 라며 못 믿겠다는 듯이 의사는 자꾸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1998년 10월, 강남성모병원 산부인과에서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고 1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때의 내 나이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결혼을 앞두고 나는 행복한 미래에 대한 설계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 즈음 내 앞에 닥친 비보(悲報)... 피할 수만 있다면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1년을 넘기기 힘들겠군요?” 나는 1998년 10월 난소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난소 두 곳에서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도 장기 전체에 퍼져서, 무려 12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난소 모두를 절제했습니다. 처음엔 암인 줄도 몰랐습니다. 서울 시내의 한 방사선과에서 1cm정도의 종양이 보이는데 악성인지 물혹인지 분명치 않다고 했습니다. 강남성모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보니 복강경 수술로 간단히 종양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해서 그저 물혹 하나 떼어 내는가 보다하며 수술대에 누웠습니다. 깨어보니 어느새 난 시한부 말기 암 환자가 되어있었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앞에서 슬픔에 빠질 겨를도 없이 항암치료 스케줄이 잡혔고 한 달에 두 번씩 꼬박 12번(6개월 동안) 항암주사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주사를 두 번쯤 맞고 난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베게에 왠 가발 같은 것이 벗겨져 있었습니다. 항암제의 독성은 가장 먼저 나를 대머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온 내 신체의 일부라는 것에 나는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의 가장 고귀한 품성인 아름다움이 내게서 영원히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하는데도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욕조바닥에 몇 번씩이고 쓰러질 뻔 했습니다. “암 때문이 아니라, 이놈의 항암제 때문에 내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셀 수도 없이 밀려 들었습니다 항암치료 중간에 재발여부를 확인한다며 재수술까지 받았습니다. 항암주사 12번을 모두 채워갈 무렵, 몸과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갔습니다. 삶과 죽음의 개념이 자꾸 흐려져 가는데 병원에서는 ‘고용량 항암화학요법’이라는 또 다른 항암제 처방을 냈습니다. 암 자체의 질환보다도 항암치료가 몇 십배, 아니 몇 백배는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다 못한 가족들이 병원 측에 항의를 하니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방법은 항암제 치료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환자가 저 지경인데 저런 몸 상태에 또 주사바늘을 꽂는가?”라며 짐을 꾸려 병원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 내 치료의 동반자 큰 언니 우리 집안엔 암환자가 많습니다. 특히 외가 쪽, 그 중에서도 여자 쪽으로 암환자가 집중되어있습니다. 외할머니는 오래전에 자궁암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도 자궁암 진단을 받았었습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나를 간호하던 큰 언니도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비교적 건강하다고 자부했던 나에게 난소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게 된 것도 이러한 가족력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암수술을 받고난 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을 때, 엄마와 언니들이 번갈아가며 내 간호를 전담했습니다. 특히 큰 언니는 마치 자기 자신이 아픈 것처럼 헌신적으로 간호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큰 언니도 몸에 이상한 증세가 생겨 병원에 가 본 결과 난소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동생 하나만으로도 집안이 엉망이 되어버렸는데 나까지 이렇게 되다니...’ 큰 언니는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혼자서 몰래 병원을 찾아다니며 전전긍긍 했나봅니다. 그 즈음 지인의 소개로 어느 요양병원을 알게 되었고 큰 언니는 내가 입원할 곳을 미리 답사한다는 핑계로 자신이 먼저 그 곳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 곳은 뉴스타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여러 불치의 말기 암환자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된 큰 언니는 그 곳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자신의 몸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알게 되었고, 점차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의 뉴스타트 프로그램동안에도 큰언니는 자신의 몸보다도 동생인 나를 걱정하고 기도해 주고 있었습니다. 큰 언니의 기도의 절실함과 신실(信實)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는 커다란 힘이라는 것은 나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2주간의 뉴스타트 프로그램 참석 후 큰 언니가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항암도 하지 않고, 수술도 하지 않은 큰 언니의 난소 속에 있던 암 종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기적과도 같은 치유를 경험한 큰 언니는 서둘러 나와 함께 다시 그 요양병원으로 향하였습니다. 본인이 경험한 뉴스타트에 대한 큰 언니의 신뢰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울면서 산에 오르다 요양병원에 처음 갔을 당시의 나는 항암치료를 받고난 직후였기 때문에 온 몸의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큰언니는 침대에 누워있는 나에게 운동을 해야 한다며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기어갈 힘만 있으면 밖으로 나가자” 며 독려했습니다. 항암제의 독성 때문에 몸을 추스를 힘은 하나도 없는데 큰 언니는 자꾸만 나를 밖으로, 그리고 산으로 내몰았습니다. 큰 언니의 격려와 간절함 덕분에 나의 등산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오르자” “싫다”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언니와 나는 울며 그렇게 매일같이 산에 올랐습니다. 운동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언니와 나는 드디어 요양병원 뒤의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처음 오른 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간의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해주었습니다. 동북 편으로 여수시내, 향일암의 주변 섬들이 우리 시야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남서쪽으론 사도, 고흥반도, 팔 영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봉수대에서 언니와 난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드디어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잠겼습니다. 운동 특히 등산은 그것들을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치료가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물 한 병을 들고 산에 올랐다면 그 과정에서 뉴스타트의 8개 원리 중 4개 건강원리가 충족됩니다. 운동(Exercise), 공기(Air), 물(Water), 햇빛(Sunlight)의 모든 유익이 그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뉴스타트의 절반의 성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치유를 경험했던 많은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많은 환우들에게 운동 특히 등산을 꼭 권합니다. 면역력과 체력을 기르는데 운동처럼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 진정한 치유제 『뉴스타트』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는 의사의 처방과 지시, 계획에 따라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뉴스타트를 알게 된 후에 또 다른 치유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선택하여 그 때부터 지금까지 뉴스타트의 생활원리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양병원에서의 생활 6개월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도 뉴스타트는 내 생활의 제1신조가 되었습니다. 여수요양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가 뉴스타트 요리를 틈틈이 배워서 집에서도 식사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전히 집 주변의 산을 오르며 열심히 운동을 했습니다. 체중도 50kg을 유지하며 모든 컨디션은 정상 때처럼 회복되었습니다. 뉴스타트를 열심히 실천한 덕분에 병원에서의 정기검사 때 모든 수치는 계속 정상으로 나왔습니다. CT촬영과 혈액검사 등의 모든 검사에서 어떠한 암 종양이나 그 징후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이제는 재발의 두려움에서도 해방되어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 가족의 사랑을 깨닫다 아프기 전 나는 단지 가족 구성원중의 하나였고 다른 언니들도 그냥 그런 존재였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요양병원에서의 6개월 동안 엄마, 큰언니, 작은언니 셋이서 2주씩 돌아가며 내 간호를 맡아 주었습니다. 암 진단 후 솔직히 많은 꿈들을 접어야만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실(流失)들 중에서도 가족 사랑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가족이 서로 돕고 사랑하며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가끔 아프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나밖에 모르고 살았으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기적 자아(自我)에만 몰입해있던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나 외의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난 한번뿐인 삶을 그저 그렇게 살다가 그저 그렇게 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중에 뉴스타트를 알게 되었고, 뉴스타트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암선고가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축복의 통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암환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의 경험담이 그들에게 작은 빛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하고 여수요양병원, 이상구박사뉴스타트센터, 살렘요양원, 벧엘요양원 등을 두루 다니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상구박사 뉴스타트센터에 봉사자로 참가하여 여러 참가자들과 봉사자들을 만나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주의 말씀도 새로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평범한 아가씨가 암환자가 되어 다행히 뉴스타트를 알게 되었고, 그 뉴스타트를 통하여 또 다른 삶을 알게 된 이 이야기의 다음 페이지는 여러분이 그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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