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친아버지" 또는 "친어머니"하고 부른다면 "허허"하고 어이없어 할 것인가? 아버지 어머니 하면 되었지 친아버지 친어머니는 무어 말라비틀어진 것인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숫한 사람들로부터 친아버지, 친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었다. 부친(父親)이라던가 모친(母親)이라는 말은 우리 흔히 쓰고 듣는 말입니다. 이는 곧 친부모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양부모(養父母)를 친부모(親父母)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친(親)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낳아 주셨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하면 펄쩍 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인데 어찌 감히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할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합니다. 더욱이 "아빠"하면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모태교인으로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욥31:15)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길러 주었기 때문에 자녀는 그 부모를 공경하게 된다. 그것은 천륜의 법칙이다. 이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 있다. 부모가 열 달 동안을 뱃속에 아기를 갖고 있기는 하나, 뱃속에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 전혀 모른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아들, 딸로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 아기가 출생 뒤에 하나님의 은혜로 일평생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한단다."
라고 설명해 주시는 것이 였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같은 말씀을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반복하여 들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지옥 불이 무서워서 또는 천당에 가고 싶어서, 또는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나에게는 관계없는 것이라 하겠다. 천국이 있고 없고 가 내게는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세를 부정하는 나는 아닙니다.
엘렌 지 화잍은 어려서부터 신앙인이였습니다. 그녀는 감리교회 태생으로 일찍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한 인식은 매우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대하여 새롭게 인식되었습니다. 화잇부인의 자서전 39페이지부터 보면 "천부(天父)의 사랑에 대한 새로운 견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천부)의 사랑을 느꼈고 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성령의 증거를 갖게 되었다. 천부께 대한 나의 견해는 변하였다. 나는 그분을 더이상 인간에게 맹종을 강요하는 가혹한 폭군으로 보지 않고 친절하고 자애로운 아버지로 보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열렬하고 깊은 애정으로 그분께 이끌렸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기쁨이었으며, 그분을 섬기는 일은 즐거움이었다. ---
나의 평안과 행복감은 전에 나를 괴롭히던 우울증과 고뇌와 너무도 반대되는 것이어서 내가 마치 지옥에서 구출되어 천국으로 옮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 생애의 시련이었던 그 불행에 대하여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었으니, --- 내 마음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고, 내가 알고 있는 의무 중 어느 하나라도 등한히 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내 마음에 예수님과 천국을 간직하는 일에 나의 온 노력을 다 기울였다. ---
이런 축복을 받은 후 간증하는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일어나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의 사랑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가 내 입술에서 줄줄 흘러 나왔으며 나의 마음은 절망의 속박에서 해방된 행복감에 너무 도취되어 내 주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것 같았다. 감사의 눈물로 목이 메는 것 외에는 나의 평안과 행복을 발표하는 데에 아무런 곤란을 느끼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랑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신데 대한 기쁨을 말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차분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할 때에 나의 영혼은 감사의 마음으로 하늘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울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마치 친 아버지께 나가는 듯하였다."
성경이나 증언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에 나갈 때, 사용할 수 있는 있는 말이 "하늘 아버지"(2증언 10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보훈 106), "내 아버지"(요14:2),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약1:27),라고 말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대로 하여금 그분께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라."(보훈 105)고 선지자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의 충분한 사람을 받았고, 그 부모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자녀들은 거의가 탈선을 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자녀들은 대개 탈선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이기심을 버리게 됩니다."(보훈 105)
즉 품성의 변화는 자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를 관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기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개인의 아버지라고 정말 믿어진다면, 또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고 믿어지고, 그분은 우주 대왕이시고, 내가 꼭 필요한 것은 주시는 분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인생 사리에 안달복달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를 그대는 모셨는가?
기도할 때 또는 그분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 것보다 그대로 아버지 하는 것이 더 친근하고 가까운 맛을 느낄 것입니다.
갈라디아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영을 보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지 않는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아바가 무엇이냐? 아바는 아랍 나라 말입니다. 한국말이 아니라 아랍 나라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할 때 아바를 한국말로 번역해서 성경을 박아내야 할텐데 아바를 그냥 아바라고 따다 놓습니다. 아바란 아빠란 말입니다.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기에 하나님 즉 네 아버지깨께서 자기 아들(예수)의 영을 보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가라사대 아바(아빠 = 개혁개정판)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아빠!"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우리들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시었습니다.
또 다른 표현이 있는데 요한복음 5장 18절, 요한복음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단어가 "아버지", "친 아버지", "아빠"등이 있습니다. 그분과 가장 친숙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독자들이 판단에 맡깁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하면 펄쩍 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인데 어찌 감히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할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합니다. 더욱이 "아빠"하면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모태교인으로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욥31:15)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길러 주었기 때문에 자녀는 그 부모를 공경하게 된다. 그것은 천륜의 법칙이다. 이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 있다. 부모가 열 달 동안을 뱃속에 아기를 갖고 있기는 하나, 뱃속에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 전혀 모른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아들, 딸로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 아기가 출생 뒤에 하나님의 은혜로 일평생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한단다."
라고 설명해 주시는 것이 였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같은 말씀을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반복하여 들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지옥 불이 무서워서 또는 천당에 가고 싶어서, 또는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나에게는 관계없는 것이라 하겠다. 천국이 있고 없고 가 내게는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세를 부정하는 나는 아닙니다.
엘렌 지 화잍은 어려서부터 신앙인이였습니다. 그녀는 감리교회 태생으로 일찍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한 인식은 매우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대하여 새롭게 인식되었습니다. 화잇부인의 자서전 39페이지부터 보면 "천부(天父)의 사랑에 대한 새로운 견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천부)의 사랑을 느꼈고 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성령의 증거를 갖게 되었다. 천부께 대한 나의 견해는 변하였다. 나는 그분을 더이상 인간에게 맹종을 강요하는 가혹한 폭군으로 보지 않고 친절하고 자애로운 아버지로 보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열렬하고 깊은 애정으로 그분께 이끌렸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기쁨이었으며, 그분을 섬기는 일은 즐거움이었다. ---
나의 평안과 행복감은 전에 나를 괴롭히던 우울증과 고뇌와 너무도 반대되는 것이어서 내가 마치 지옥에서 구출되어 천국으로 옮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 생애의 시련이었던 그 불행에 대하여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었으니, --- 내 마음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고, 내가 알고 있는 의무 중 어느 하나라도 등한히 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내 마음에 예수님과 천국을 간직하는 일에 나의 온 노력을 다 기울였다. ---
이런 축복을 받은 후 간증하는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일어나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의 사랑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가 내 입술에서 줄줄 흘러 나왔으며 나의 마음은 절망의 속박에서 해방된 행복감에 너무 도취되어 내 주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것 같았다. 감사의 눈물로 목이 메는 것 외에는 나의 평안과 행복을 발표하는 데에 아무런 곤란을 느끼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랑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신데 대한 기쁨을 말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차분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할 때에 나의 영혼은 감사의 마음으로 하늘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울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마치 친 아버지께 나가는 듯하였다."
성경이나 증언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에 나갈 때, 사용할 수 있는 있는 말이 "하늘 아버지"(2증언 10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보훈 106), "내 아버지"(요14:2),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약1:27),라고 말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대로 하여금 그분께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라."(보훈 105)고 선지자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의 충분한 사람을 받았고, 그 부모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자녀들은 거의가 탈선을 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자녀들은 대개 탈선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이기심을 버리게 됩니다."(보훈 105)
즉 품성의 변화는 자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를 관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기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개인의 아버지라고 정말 믿어진다면, 또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고 믿어지고, 그분은 우주 대왕이시고, 내가 꼭 필요한 것은 주시는 분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인생 사리에 안달복달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를 그대는 모셨는가?
기도할 때 또는 그분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 것보다 그대로 아버지 하는 것이 더 친근하고 가까운 맛을 느낄 것입니다.
갈라디아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영을 보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지 않는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아바가 무엇이냐? 아바는 아랍 나라 말입니다. 한국말이 아니라 아랍 나라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할 때 아바를 한국말로 번역해서 성경을 박아내야 할텐데 아바를 그냥 아바라고 따다 놓습니다. 아바란 아빠란 말입니다.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기에 하나님 즉 네 아버지깨께서 자기 아들(예수)의 영을 보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가라사대 아바(아빠 = 개혁개정판)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아빠!"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우리들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시었습니다.
또 다른 표현이 있는데 요한복음 5장 18절, 요한복음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단어가 "아버지", "친 아버지", "아빠"등이 있습니다. 그분과 가장 친숙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독자들이 판단에 맡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