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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중보자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아버지)께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보훈 8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과는 죄의 담이 막혔습니다. 하나님과 다시금 화친하게 하사는 것이 예수님의 중보입니다. 이렇게 하시기까지 하시는데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 예수"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나 예수님 알아.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 가셨다." 이것도 역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인데 그분이 전한 복음이 무었입니까? 그분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길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중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소개한 하나님을 나 개인의 아버지로 모셨을 때 이미 중보는 끝이 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 누군지 불분명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하면 예수님이 중간에서 받아서 다시 아버지께 고하는 것으로 알고들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직접 "아버지" 하고 그분을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누가 다시 나서서 중보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에 대해서 많은 경우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중보는 예수님만의 전용물은 아닙니다. 성령도 중보를 하십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8:26)
중보라고 해서 다 같은 중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중보와 성령께서 하시는 중보가 각각 다릅니다. 중보는 중보인데 역할이 다릅니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은 인간을 위하여 계속 중보하시지만 성령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같지는 않다."(원고50, 1900).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해서 흘리신 그의 피를 내어놓고 중보하시"는데 아버지와 탕자와의 결합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기도를 하게 하고, 회개와 찬양과 감사를 이끌어 내"시는 일을 합니다.(원고50, 1900)
우리 아버지께서는 일일이 우리가 무슨 죄 무슨 죄 용사 해 달라고 안 해도 다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런가하면 죄의 싻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어떤 악인의 죄이던 모두 다 짊어지시고 피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여하에 달렸습니다. 받아드리면 주님의 중보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거절하면 그는 하늘에서는 죄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보를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실물교훈 198페이지부터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나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에 넘치는 사랑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갔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행한 처지에 그대로 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원수의 시험을 받을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과 부드러운 동정심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탕자의 비유 가운데는 일찍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다가 마귀를 용납하고 그의 뜻에 사로잡힌 자들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처리 방법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갔다. 이 둘째 아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습니다.(예를 들면 안식일, 채식, 현미식 등등)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하고 그는 자기의 기분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대한 감사를 나타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아들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특권만을 주장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 몫으로 받게 될 유산을 지금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현재의 낙을 누리는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장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부모에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 집에서 떠나 "먼 나라(마귀나라)"로갔습니다. 돈을 넉넉히 가지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방종)를 갖게 된 이 젊은이는 자기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몹시 기뻐하여습니다. 그 곳에는 그렇게 하면 네게 해가 될 터이니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이것이 옳은 일이니 이 일을 하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악한 동무들은 그로 하여금 더욱 큰 죄에 빠지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물을 허비"하여습니다.
성경에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롬 1:22) 된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바로 비유 중에 나오는 탕자의 경력(經歷)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 부모 424 저들은 이 세상의 지혜 때문에 거룩한 진리의 단순성과 순결성을 저버렸습니다. 1기별 249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 23). 바로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요구와 지식에 따르는 대가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이기적인 목적으로 달라고 해서 받은 재물을 오입하는 일에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그의 귀중한 청춘이 그러한 일에 허송되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와 지력(智力)과 젊은이의 유망한 전도와 영적 포부 모두가 다 정욕의 불꽃에서 소멸되었습니다.
큰 흉년이 들자 그는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지방 사람에게 얹혀 살게 되었고 그의 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여습니다.(3증언 425 하늘에 근원을 둔 소중한 진리를 돼지 앞에 던짐으로, 그들이 그것을 붙잡아 진흙탕 속에 짓밟아 버리는 것을 보고 천사들은 운다.) 유대인에게는 이 일이 몹시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한때 자기가 자유롭게 되었다고 뽐내던 이 젊은이는 지금에 와서 자기가 노예가 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죄의 줄에 매인"(잠 5:22) 것입니다. 즉 최악의 노예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를 매혹시키던 찬란하고 번쩍거리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 와서는 속박의 쇠사슬의 무게에 눌리게 되었습니다. 돼지 외에는 다른 아무 친구도 없는 쓸쓸하고 흉년이 든 그 지방에서 그는 땅 위에 홀로 앉아 짐승이 먹는 팥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가 잘 살때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돈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던 친구들 중에 그의 친구로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허랑방탕하며 즐기던 오락은 이제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는 전에 자기의 양심을 달래고 감각을 마비시키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배도 고프고 그의 자만심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도의심은 위축되고 의지력은 약해져서 믿을 수 없게 되고, 그의 고아(高雅)한 정서는 거의 마비되어 인간 중에 가장 가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자신을 중심으로 사는 모든 생애는 낭비하는 생애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자 하는 자는 재물을 낭비하는 자입니다. 그는 귀한 세월을 허비하고 정신과 마음과 심령의 능력을 낭비하고 영원한 복락을 얻는 일에 낙오자가 됩니다. 자신을 섬기려고 하나님을 떠나가는 사람은 재물의 종이 됩니다, 천사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마음은 세속적이고 추잡한 것을 섬기는데까지 타락되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주의자가 맞이하는 종말입니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 6).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사람이 햇빛과 비를 안 맞으려 하면 안 맞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로운 해가 비칠 때나, 은혜의 비(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말씀의 단비)를 만민에게 값없이 주시는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감으로 "광야 간조한 곳… 에 거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도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선택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는 아직도 그러한 사람을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감화를 끼치고 계십니다. 가련한 형편에 빠진 탕자는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사단이 그에게 행사한 기만적 세력은 깨어졌습니다, 그는 자기의 고생은 자기의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깨닫고내
"아버지에게는 (꿀송이같은 말씀)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고 말합니다. 탕자는 비록 가련한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강권하는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보증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롬 2:4)신다.』
실물교훈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탕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모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품성의 변화를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잘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아무리해도 품성 변화가 안돕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이해할 때 우리의 마음은 감동을 받고 죄를 슬퍼하게 됩니다.』(정로 27)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들은 거의가 곁길로 가지를 않습니다. 물론 그 아이가 부모의 흡족한 사랑을 받았다고 감지할 경우를 말합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해도 그 사랑이 제대로 저달되지 모하고 자란 아이들 가운데는 곁길로 나갑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아무리 품성변화 하려고 해도 잘 안되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때 우리의 마음이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자가 곁길로 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이 품성의 변화인 것입니다. 죄를 슬퍼하는데 죄를 좋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죄를 왜 짓습니까? 죄를 왜 짓게 됩니까? 그것은 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노름꾼이 노름을 하는 것은 노름이 좋아서입니다. 도둑이 도둑질하는 것은 그것이 좋아서입니다. 사기꾼이 사기하는 것도 역시 그게 좋아서입니다. 왜 간음을 합니까? 역시 간음이 좋아서입니다. 모든 죄는 역시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짓이지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것을 억지로 안 하려니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죄 안짓고는 못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을 받았을 때 그것(죄)이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아 우리 주님께서 아 우리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죽을 고통을 치루셨다고 믿어질 때 죄가 슬퍼지고 싫어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품성 변화입니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고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성경에는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죄인이 먼 나라에서 그의 돈을 낭비하고 있는 동안일지라도 그 죄인이 돌아오기를 희망하고 계십니다. 그대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열망할 때 그대는 그분께서 부르시고 계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영은 죄인을 아버지의 사랑의 품으로 데려오고 있습니다. 그대 앞에 성경의 풍성한 약속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의심할 수 있습니까?"(정로 5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긍휼과 사랑과 지혜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아노라 하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영생의 소망이 집중되어 있는 그분에게서 돌아서서 실수와 잘못을 범하기 마련인 그 동료들을 의지하는 데 길들여졌습니다."(목사 376)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그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시 77:20; 렘 31:3; 호 11:4). 형벌의 두려움이나 영원한 보상에 대한 희망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것은 아입니다.
그 아들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그는 자기가 그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너무나 좁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기 위하여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부언합니다.
이 젊은이는 돼지 떼와 팥껍질을 버리고 자기의 집을 향하여 떠납니다. 그는 허약해서 비틀거리며 먹지못해 기진 맥진한 몸으로 결연히 자기의 길을 떠납니다. 그는 자기의 누더기를 가리울 옷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가련한 신세가 그의 교만을 꺽었습니다. 본래 아들의 신분이었던 그가 종의 직분을 얻으려고 급히 달려갑니다.
놀기만 좋아하고 생각이 모자랐던 그 젊은이는 부친의 집을 떠날 때 부친의 마음속에 남겨 놓은 고통과 자식에 대한 연민을 조금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그의 방탕한 동무들과 춤추고 먹고 마시고 있을 때는 그의 고향집에 드리운 우울함에 대하여 거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피곤하고 무거운 발을 끌면서 고향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에도 한 분이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상거가 먼데도 그의 부친은 아들의 모습을 분간했습니다. 사랑은 눈을 밝게합니다. 여러 해 동안의 죄된 생애로 초췌해졌을지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눈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몰라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사랑의 팔로 그의 "목을" 오랫 동안 꼭 "안"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었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가정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아들이요 수종하는 남녀 종들의 존경과 섬김을 받아야 할 아들이었다."(2소망 480)
예수님의 예화는 단순한 예화가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탕자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해야할 지침서입니다. 사람은 최고의 행복과 최대의 우대를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목적이십니다. 우리는 품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과거에 무엇을 하였던 상관치 않으시고 돌아오기만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3증언 575) "사람들이 만일 하늘의 사물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은 능력 있는 천사의 무리가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켜온 사람들을 둘러 진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쟁투(하) 630)
"부친은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품성의)옷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하여습니다. 침착성이 없던 청년 시절에 탕자는 자기 부친을 엄격하고 가혹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자기 부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단에게 속임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가혹하고 각박한 분으로 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치 저희를 비난하고 정죄하려고 어떤 꼬투리를 잡으려는 분으로 보며 저희를 도와주실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죄인을 받아 주려 하지 않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그것을 벗어던지면 좋을 무거운 멍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을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그에게 전제적이고 무자비한 분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회개하는 당신의 자녀를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아버지로 보입니다.(실물 204)
성경은 우리에 대해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3)라고 말합니다. 비유 가운데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조소하는 장면이 전혀 없습니다. 다음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저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좋으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기 전에 이미 용서해 주신 분이십니다. 용서해 주셨을뿐 아니라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기역도 안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4)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삼일 동안 지은 죄, 6일 동안 지은 죄, 하면서 죄 타령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죄 타령을 하면 할수록 죄를 지으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전거를 탈줄 아시겠지요? 처음에 자전거를 배울 때 서툴러서 잘 쓰러지곤 합니다. 왜 쓰러집니까? 중심을 잡을 줄 몰라서 쓰러집니다. 이 배우는 과정에서 앞만 똑바로 봐야 합니다. 옆을 보면 쓰러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칩니다.
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죄짓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죄만 짓게됩니다. 죄책감에 살면 슬프기만 하고 원하지 않는 죄는 더 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과거건, 현재건,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것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저 감사하고 기뻐하고 그리하면 죄라는 올무에서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죄책감이라는 굴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또 그분은 여기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죄책감이라는 구례에 빠져듭니다. 이것은 사단의 함정입니다. 여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조사 심판과 죄의 도말은 주님의 재림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는 때에 믿는 사람들의 죄가 도말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쟁투(하) 485)
참으로 희한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안 드십니까? 이해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죄를 도말 받아야 겠죠? 그런데 위에 기술된 내용은 조사 심판은, 재림 전에 있는 사건이지요? 조사심판 때에 죄의 도말이 이루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예수초림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만 재림은 의인을 데리려고 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페이지에 상반되는 내용의 글이 실립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는 때에 믿는 사람들의 죄가 도말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아야 믿는 이들의 죄가 도말된다니 이해가 갑니까?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재림해야 우리의 죄가 용서된다. 우리의 죄가 도말 된다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자 앞뒤 문맥을 좀더 가까히 보겠습니다.
"조사 심판과 죄의 도말은 주님의 재림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죽은 자들은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므로 그들의 사건이 심리(審理)되는 조사 심판이 마치기 전에는 그들의 죄가 도말될 수 없다. 사도 베드로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 20)라고 말함으로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는 때에 믿는 사람들의 죄가 도말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쟁하485)
유쾌하게 되는 날에 즉 예수님이 보내심을 입을 때 죄가 도말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 가운데 진정으로 예수님을 모실 때 이 말입니다. 이때에 유쾌함이 있는데 무슨 유쾌함이냐하면 죄의 도말의 경험을 갖게된다 이 말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을 완전하게 믿게 되어서 죄에서 해방된다는 말씀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을 보겠습니다. 뭐라고 했는지요?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라고 했고 이 말씀을 개혁성경에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회개라고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그 자체입니다. 위에 두 성구를 비교해보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란, 아버지께 돌아가는 결과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무슨 죄 무슨 죄에서 뇌우친다는 것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도망가는 것이 죄라입니다. 도망가는 죄에서 돌이켜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 가는 그것이 회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생동안 종사리 하던 죄의 멍에에서 자유함을 받는다 이것이 유쾌함이다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즉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값을 탕감하시기 위애 희생하신 주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죄로부터 해방되는 유쾌합이다 이 말입니다. 아버지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나찌스 당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찌스 당원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인 사람들입니다. 이 나찌스 당원이 독일이 망한 다음에 붙잡히면 죽는 줄 알고 숨어서 땅 속에 살았습니다. 땅 속에서 얼마나 숨어 살았냐 하면 27년 동안을 햇빛을 안 보고, 세상 밖에 나오면 잡혀 죽는 줄 알고 숨어서 살았습니다. 27년 이라면 거의 30년 세월, 인생의 반 평생입니다. 30살에 들어갔으면 60이 되었을 것이고, 40살에 들어 갔으면 70세노인이 거의 되었을 것입니다. 반 평생을 땅에 묻어놓고 올라와 보니까, 자기와 과거에 같이 나찌스 당원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큰 상회의 주인이 되고, 회사를 차리고, 아들, 딸 낳고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는 알지 못하고 괜히 잡히면 죽는 줄 알고 혼자 그렇게 숨어서 거의 30년의 세월을 땅에다 묻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그 청춘을 변상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기의 무지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 너무 원통해서 자기 자신을 한탄하면서 남은 세월을 눈물로 살다가 마쳤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이 지구상에서도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대왕 하나님께서는 수 천년 전에 이 땅, 지구상에 있는 모든 죄수의 죄를 다 깨끗이 특사를 내려서 용서해 주시고
"너희는 마음대로 의롭게, 의인이 되었으니 마음대로 살아라"
고 하셨는데, 이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할아버지가 입다가 죽은 죄수복을 아들이 물려서 입다가 죄인아닌 죄인으로 매일 죄 타령만 하고, 그 다음 아들이 죄수 복을 입다가 죽으면 그 손자가 또 죄수복을 물려 입고 또 매일 죄타령 하다가... 그러기를 지금 수 천년동안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수들에게 가서
"당신들, 왜 우주의 대왕 하늘의 하나님이 벌써 죄를 특사를 내려서 사해 주셨는데 왜 이렇게 죄수노릇을 하시요?"
그러면
"언제 그랬어요? 나는 몰라요."
몰라서 그럽니다. 또 어떤 사람은 특사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그렇게 대대로 죄수복을 입고 지금까지 죽어왔습니다. 자, 그 특사장이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만왕의 왕 나 여호와가 반포하노라. 나는 여호와로라.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벌하기를 싫어하는 인자한 하나님이로라. 그러므로 천하에 있는 모든 죄수들에게 반포하노니 이제 나는 이 시간 이후부터 영원히 너희의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여 주었노니 이제 부터는 너희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찌어다."
간단한 특사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 십세기 전에, 수 천년 전 모세 때 바로 이 특사가 떨어졌다 이 말입니다.
세계 2차대전에서 일본은 패망하였습니다. 그때 캄도에서 일본군 패장병들 가운데 밀림 속에 숨어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항복을 하지 않고 풀뿌리 나무뿌리 등을 또는 자연적으로 연 열매를 따먹으면서 일생을 지냈습니다. 그가 숨어산 것은 죽을 까봐 겁이 나서입니다. 역시 같은 경험을 그 패잔병은 하고 청춘을 허비하였습니다.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로 도말되었을 것이므로 그들은 그 죄악들을 기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조(상) 202)
이렇게 아버지께 돌아와서 죄의 용서를 받은 이들은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므로 죄 아래서 끙끙거리면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기억도 없을 정도로 완전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완전히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예수께서 그들의 죄와 죄책감이라는 짐을 벗겨 주셨고 그들의 애정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켜 주셨다. 그들이 전에 사랑했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고 그들이 미워했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큰 변화가 그대에게 생겼는가?"(1T.160)
고 선지자는 우리게 묻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애정의 방향은 전환시켜 주시는 일을 그분이 해 주십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참 이상한 일을 때때로 보고 듣게 됩니다. 이방인들은 죄 타령을 안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만날 죄 타령을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의인이 되어서 그렇고 교인들은 죄인들이 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이게 모순이라 이 말입니다.
자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뭔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생각하지 잘못됐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가 엄마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때 엄마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말이 예쁘고 대견스러워서 아린 아이의 잘못은 생각 안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래 참 착하다. 엄마가 다 용서한다."
고 말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자도 사줄지 모릅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이 아이가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들고 엉엉 웁니다. 엄마가 의아해서
"아가 너 왜 우니?"
하고 물을 것입니다. 아이의 대답인즉
"나 엄마한테 죄를 졌단 말야."
합니다. 또 무슨 잘못한 것이 있나 해서 알아보니까 조금 전에 고백한 같은 내용입니다.
"애두 용서했다니까…."
그런데 아이는 조금 있다가 또 같은 내용으로 울면서 용서를 구합니다. 이렇게 되면 엄마의 생각이 어떠하겠습니까? "아이가 미친 것 아냐?" 하고 놀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입니다. 귀신이 완전히 정신병자를 만든것입니다. 그 귀신의 속박에서 쑥 나와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렘 50:20)라고 하신다.
여러분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살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도말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동행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입니까! 독자들이여, 그대들은 자기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방황했습니까? 그대는 죄악의 열매를 먹으려 하다가 결국에 그것이 그대의 입술에서 재가되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대는 그대의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 버리고, 그대의 일생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대의 소망이 끊어진 채 외롭고 쓸쓸하게 앉아 있지는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그대에게 속삭였으나 그대가 듣기를 원치 않던 다음의 음성이 다시 분명하고 똑똑한 어조로 그대에게 임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미 2:10).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십시요. 그는 그대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고 초청하십니다."(실물 205)
"일어나서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시요. 그리하면 -- 그대의 천부께서는 죄로 더럽혀진 옷을 그대에게서 벗기실 것입니다."(실물 206)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그대가 품성 개발하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면 그분이 해 주신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 돌아감으로 완전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토록 여러분들을 괴롭히던 죄의 껍질을 벗기실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3:1-4)
위에 성경 내용은 바로 우리들이 당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염려를 거두시실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슬림을 당한 나무입니다. "그슬린 나무"는 보기도 좋지 않을뿐더러 닿은 곳마다 검정으로 얼룩지게 합니다. 누가 그렇게 우리를 "그슬린 나무"로 만들었습니까? 우리의 원수 사단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는 도리어 조소하고 고소합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아버지 앞에 서면 우리의 변호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변해 주십니다.
"스가랴서의 아름다운 비유적 예언 속에서 여호와의 천사 곁에 선 누추한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죄인을 대표합니다. 주께서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슥 3:4, 5)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 (사 61:10)으로 그대를 입히실 것이고, 의의 겉옷으로 입히실 것입니다.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시 68:13).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
"하나님 여호와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고 하는 아버지의 기쁨의 노래에 맞추어 합창하게 될 것입니다.
구주의 비유 가운데서 지금까지는 이 기쁜 장면의 화음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이 없었으나 이제 주께서는 이와는 성질이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십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며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였습니다."(실물 207)
우주거민들이 질투할 정도의 사랑의 대상인 막대둥이 지구의 돌아온 탕자에 대한 천부의 사랑은 너무도 지극하십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또한 얻었"노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또 그분은 돌아온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공로 없이 우주적인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중한 당신의 아들을 선물로 주심으로 하늘의 모든 보화를 열어 놓으셨으며, 그분의 아들은 자신의 완전한 품성을 통하여 이 세상 생애와 거룩한 하늘에 유용해지도록 우리를 완전히 향상시키고, 고상하게 하고, 적합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2보감 224)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 나갈 때 1년된 송아지 100만원을 바치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까요? 아냐 그것은 너무도 적으니까 천천의 수양 즉 수십억을 교회다 갔다 바치면 그분이 기뻐하십니까? 즉 연금을 많이 바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줄 아십니까? 아니 내 자식을 갔다가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고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58:6,7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대자신이 오직 그대의 천부의 사랑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죄 가운데서 고생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는 불행을 당한 자와 참회하는 자들을 질투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실물 210)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모실 때 우리의 마음에서 이기심의 얼음이 녹아 내리게되고 하나님과 같은 동정심을 가지게 되고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은 자가 네 동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가장 밀접한 끈으로 우리에게 붙들어 매어져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불행을 당한 사람들)를 아들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러한 아들과의 관계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 속한 자녀가 아니고 품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됩니다.(실물 211 참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다음의 금싸라기를 깊이 명상하시길 바랍니다.
"도회지나 촌락, 어디든지, 주님께서는 통과하시는 곳에서, 고통당하는 병자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어디서라도, 주의 기별을 받을 준비를 한 자에게는 하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이야기하여 그를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복음 41)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는 사랑스런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애정의 표시이며 우리에 대한 그분의 부드러운 관심과 관계의 보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은혜의 후사들을 바라보시면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히 2:11)신다. 그들은 타락한 적이 없는 천사들이가진 것보다 더욱 거룩한 관계를 하나님과 이루고 있습니다." 5증언 740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으로 더불어 자유롭게 교통하는 특권을 얻습니다." 사건 297
"사단은 그들이 하나님을 엄한 재판관으로 여기도록 이끕니다. 사단은 그들로 죄를 범하도록 유혹한 다음, 자신들은 너무도 죄가 많아서 하늘 아버지 앞에 가까이 나가거나 그분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주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궁핍하고 연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동정하신다는 것을 보증하십니다. 사람이 한숨 짓고 고통을 느끼고 슬픔을 당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반드시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2소망 356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공할 수 있는 허다한 길들(방법)을 준비하고 계신데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입니다."시대의 소망 330
"그대가 그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쳤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며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은 그대를 위한 것입니다. 현세는 물론 내세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보화가 그대를 위해 펼쳐져 있습니다. 천사들의 봉사, 성령의 선물, 그분의 종들의 봉사-이 모든 것들이 그대를 위한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대에게 유익이 될 수만 있다면 다 그대를 위한 것들입니다. 악한 자의 적의까지라도 하늘을 위해 그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의 축복이었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만물이 다 너희의 것"(고전 3:23, 21)이다." 산상보훈 110
"아침에 일어날 때 그대는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능력을 얻어야 함을 느낍니까? 그리하여 그대는 겸손하고도 진실 되게 그대의 소원을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 아룁니까? 만일 그렇다면, 천사들이 그대의 기도를 주목할 것이며, 만일 이러한 기도들이 거짓된 입술에서 발해진 것이 아니라면, 그대를 보호하는 천사는 그대가 부지중에 다른 사람들을 잘못 하도록 유도할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잘못을 범할 위험에 처할 때 그대의 편에 서서, 그대로 하여금 더 나은 행동을 하도록 충동하며, 그대를 위하여 말을 선택하고, 그대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교회 증언 3권 363, 364.
"온 하늘이 인류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이 지으신 어떤 피조물에게도 기쁨의 길목을 막지 않으십니다."정로의 계단 46(새 번역)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허다한 길들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으뜸으로 삼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곤란이 사라진 것과 저희 발 앞에 평탄한 길이 펼쳐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시대의 소망 330.(새 번역)
"그리스도를 익숙히 아는 자에게는 더 이상 이 지상이 적막하고 황폐한 곳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 때 인간들과 함께 사셨던 그분의 임재로 가득찬 아버지의 집이 될 것닙니다."(교육 120 새 번역)
"아버지의 마음을 두근두근 하도록 고동치지 않는 어떤 한숨도 쉬어본 적이 없고, 어떤 고통도 느낀 것이 없고, 어떤 슬픔도 영혼을 꿰뚫은 적이 없습니다. . . . 하나님은 그분의 보좌에서 허리를 구부리시면서 억압당하는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자 하신다. 모든 진실한 기도에 대하여 "내가 여기 있노라"고 응답하십니다. 그는 상심한 자와 학대받는 자들을 들어 올리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괴로움을 (함께) 당하십니다. 모든 유혹과 시련에서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천사가 구원해 주기 위하여 가까이 있습니다."(시대의 소망 356.새 번역)
"아버지의 임재(臨在)가 그리스도를 둘르고 있었으므로, 무한한 사랑이 세상의 축복을 위하여 허락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분께 닥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분의 위로의 근원이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합니다. 이 사람을 겨냥한 강타는, 그를 당신의 임재로 두르고 있는 구주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에게 닥치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방벽이 되시므로, 그는 악을 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를 건드릴 것이 없습니다."(산상 보훈 71.)
"우리 하늘 아버지는 믿는 사람들에게 오는 모든 시련들이 저들에게 임하도록 용납하시기 전에 재보시고 달아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증명하는 시험을 견뎌야 할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과 저들이 지니고 있는 힘을 염두에 두시며, 저들이 견딜수 없는 커다란 유혹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 영혼이 만약 압도당하거나 못 견디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은혜의 힘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 결코 그 책임을 전가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시험을 받는 그 영혼이 깨어서 기도하지 않은 것이요, 그를 위해 풍성하게 제공해 주신 하나님의 방편을 믿음으로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투쟁하고 있는 영혼들을 결코 져버리지 않으십니다. 신도들은 약속을 주장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대적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실패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1889년 엘렌 지 화잇 원고 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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