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질문에 대한 답글입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번 수해로 어려움이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장소가 마련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잘 되시리라 기도드립니다.
>요즘 성경공부 강의를 들으며 하나님의 품성을 느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궁금한것이 있어서요..
>교회다니시는 분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잖아요. 그리고 상가에 가서도 절을
하지 않더라고요.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요?
>저는 시집이 큰집이라 제사를 지냅니다. 상가에 가서도 절을 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게 하는게 하나님을 거스른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본인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요즘 시집에서 제사를 지낼때 이걸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약간 됩니다.
답글
하나님께서는 금하시는 것도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품성과 선택의 자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절대적 사랑이 곧 인간에게 생명이며 진리입니다.
이 절대적 사랑의 가장 뛰어난 특징은 피조물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 이외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신들도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도 큰 문제가
될 수 있고, 인간에게도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들이 자유롭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랑은 자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유 없이는
맹종만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맹종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는 인간에게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인간은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잘 못된 선택을
할 경우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창조주께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인간을
창조와 선택의 자유의 문제점
창조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창조를 결정하시는데 따르는 문제점을 걱정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에 수반하는 모든 문제들, 곧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했을 경우에 따라오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전부터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그 절대적 사랑으로 그 기쁘신 뜻대로 모든 문제들을 친히 책임지시기로
결심하시고 마침내 창조를 감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금하심
이렇게 당신 아들의 목숨까지도 걸고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신데
그분이 인간에게 무엇을 금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절대적
사랑의 하나님께서 무엇을 금하실 때에 이미 주신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사랑 안에서
금하시는 것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선택의 자유를 무시하시고 금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강제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강제하시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금하심은 선택의 자유를 취소하시고 금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강제적으로 금하시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거짓을
금하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시기 때문에 사망을 금하십니다. 진리는 생명을 주지만
거짓은 사망을 초래합니다.
제사와 하나님
만약 제사를 지내는 것이 죽은 자들의 혼이 살아서 존재하여 그 혼을 향하여 절하며
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행사라면 그런 의미의 제사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몸만 죽고 혼은 죽지 않는다는 학설을 영혼불멸설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이 [겔18:20]“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영혼불멸설은 성경적으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영혼불멸설의 진위에
대해서는 홈페이지의 성경공부 자료실로 들어가셔서 “지옥의 공포로부터 해방”이라는
글을 읽어보시면 인간의 사후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배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거짓을 금하십니다.
성경적 제사와 세상의 제사
성경적 제사와 세상의 제사는 그 제사의 의미가 완전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제사는 인간이 신에게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의 제사는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이신
어린 양을 인간을 위하여 제물로 스스로 드리시는 것입니다. 간단히 줄이면 세상적
제사는 인간이 신을 위하는 것인 반면에 성경적 제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적 제사를 금하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분임을.
죄인의 차원으로 내려 와주시는 하나님
창조주이신 그 크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의 형태, 더 나아가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모양으로 스스로를 낮추어서 하늘보좌를 뒤로하시고
이 땅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스스로를 낮추시는 사랑을 실천하여
아직도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낮은 차원으로 내려 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는 미워하실지라도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을
사랑하시어서 죄인의 모양으로 죄인을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진리를 모르고 거짓
속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그 거짓은 미워할지라도 그 거짓에 빠져 있는 자들은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해서는 거짓의 세상의 제사를 지내는 그들을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그 제사에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화와 하나님의 재창조로 말미암아 문둥병으로부터 완전히 치유 받아
영적 유대인이 된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다시 자기의 왕에게 돌아가서 아람의
신, 림몬에게 제사를 드리는 왕을 부축하기 위하여 그 세상적 제사에 함께 하게 되어
자기의 몸이 림몬을 향하여 굽혀질 때에 그것이 자기의 마음을 림몬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며 자기의 마음은 오직 여호와께로 향하여 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허락하시며
사하여 주시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하5:18]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금하심과 허락하심의 진실을 알자
뉴스타트는 하나님의 치유이지만 현대의학, 대채의학, 한방, 민간요법 등은 인간이
인간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제사와 세상의 제사가 다르듯이 성경적 치유인
뉴스타트와 인간의 치유인 세상의 의학이 다른 것입니다.
사단은 뉴스타트의 초점을 변질시키며 말하기를 “뉴스타트는 육식을 금하는 것이다.”
“뉴스타트는 채식만 허락한다.” “하나님은 병원치료를 금하신다.” 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는 “채식이 병을 고치는 것이다.” 라고 강조합니다. 사단이 발명한 소위
“식이요법”이지요. 그리고는 사단은 자기가 환자에게 준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을
풀어주면서 병을 낫게 합니다. 이것은 거짓치유현상입니다. 사단의 속임 수입니다.
이러한 거짓치유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그 환자나 그 채식 뉴스타트를 주관한 사람들은
확실하게 채식이 병을 낫게 한다는 거짓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 사람들에게 “너는 참으로 장하다. 고기를 끊고 채식을 잘 했구나.
그래 채식은 병을 낫게 하지, 그렇구 말구! 장하다. 온 세상에 채식이 병을 낫게
한다고 열심히 전하거라! 그리하여 충성된 종이 되거라. 하나님이 고기 한 점도 안
먹은 너의 노고를 치하한다.” 라고 부추기며 더 깊은 자기기만과 합리화의 거짓으로
유혹할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뉴스타트에서는 결국 채식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의 능력이 치유력으로서 영광을 받아야 될 그 영광이 채식으로,
포도로, 녹즙으로, 약초로, 볶은 곡식 등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식이요법, 대채의학 등이 말씀 속의 생명의 빛을 가리는 건강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건강우상들은 의사나 영양학자들처럼 세상지식의 대가들,
지식적인 헬라인들에게는 뉴스타트라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넌센스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 지식인들의 견해가 과학적으로는 옳은 견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참 뉴스타트를 모르면, 창조력인 복을 체험해보지 않으면, 그러한 건강우상들로서
포장된 넌센스가 뉴스타트라고 생각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채식이나 건강우상들을 마치 뉴스타트인 것으로 내 새우는 사람들은 환자가 그들이
지시한 식이요법이나 어떤 약초로 치유 받았다는 표적을 구하고, 그 반면 지식인들은
과학적 타당성만 따지지만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말씀 속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나신 사랑인 치유하는 광선을 뉴스타트의
초점으로 증거 하니 식이요법 채식주의 자들과 건강우상을 내 새우는 자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지식인들에게는 넌센스이지만
[고전1: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믿음으로 뉴스타트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을 은혜로 입어 체험적으로
치유를 체험해본 자들에게는 율법적으로 채식주의와 건강우상들을 고집해온 자들이나
지식인들에게나 누구에게나 창조주의 창조력이 치유력임을 선택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품성이 치유의 능력임이며 인간의 지식적 기술 차원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
곧 창조력의 차원에서 치유 받았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단은 또 한편 지식적 헬라인들을 충동하여 채식을 공격하게 하고 채식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로 간주하고 이 율법주의의 우매성을 공격하여
다음과 같은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은 홍수 이후 분명히 육식을 허락하셨다!”, “그래도 지금은 너무 오염이
심해서 안 된다”, “선지자도 가끔 먹었으니 우리도 조금씩 먹어도 상관없다.”,
“홍수전에도 고기를 먹었다”, “지금은 채식만 해야 한다.” 모두가 일리는 있습니다.
흑백논리적인 금했느냐, 허락했느냐의 논리가 주류를 이루는 논란들이지요. 그 논란
속에는 일리는 있지만 진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논란 속에는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참 뉴스타트의 주체이십니다.
지금 그리스도는 뉴스타트의 문 밖에서 애타게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체를 상실하면
정체성이 상실 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없는 세상의 웰빙과 뉴스타트의 다른 점이
거의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뉴스타트는 세상의 대채의학과 다른 점이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을 열고 당신이 창조주시요, 당신만이 구원자이시며 치유 자이십니다!
라고 체험적으로 외치는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채의학 쪽으로 표류하여 가고
있는 뉴스타트를 바로 깨달아 안식일의 복을 체험하면 마침내 그 안식일은 “너와
나 사이의 표징”이 되며, 그분의 ‘인’임이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항암치료를 허락하시는가?
사단은 또 채식도 잘 못하고 또 너무나 큰 암의 공포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또 주위사람들의 사랑(?)의 강권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항암치료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장하며 말하기를 “너는 자연법칙을 어겼구나, 참 못났구나. 그래가지고는
병 낫기는 글렀어!”라고 말하며 그 항암치료를 받은 환자에게 죄책감을 가지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마음으로는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물론 외면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은 것처럼 계속 기도하겠지요.
그러나 또 어떤 환자들은 “항암치료도 하나님이 주신 걸” 하며 자기 합리화에
급급할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사단의 음성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믿음 없음을 알게
하여 죄책감을 가지게 하든지, 아니면 정반대로 믿음 없음을 부인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마치 옳은 길을 가는 것인 양 합리화 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단은 죄책감을 가지게 하여 좌로 치우치게 하거나, 반대로 합리화시키어
우로 치우치게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치우침의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력인 치유력,
곧 사랑의 능력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이 무엇을 금하시며 무엇을 허락 하셨나?
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력인 치유력 대신 최대
관심사가 하나님이 항암치료를 금하느냐? 아니면 허락하느냐? 육식을 허락하느냐?
아니면 금하느냐? 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한 것일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이러한
치우침의 현상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음성을 신학적으로 또는 의학적으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항암치료, 육식, 박수가 허락된 것인가 금하신 것인가? 라는 금하심과 허락에
관한 모든 질문과 논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상구가 암에 걸려서 하나님의 치유력을 믿지 못하여 항암치료를 받기로
결정하였다면 그 치료를 받으러 가면서 이렇게 기도 할 것입니다. “이 믿음 없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는 너무나 불안합니다. 항암치료가
완치시켜 주는 것도 아니며 저의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답니다. 주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저를
치유해주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이 됩니다만 믿지를 못하겠습니다.
주님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옵소서! 이 연약한 저에게 믿음을 주세요!”
이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연약한 이 상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코!
[막9:24]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이러한 기도를 하는 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거니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사귀를 내쫓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에도 역시 능력 있으신 구속주이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그렇다면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는 그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 그의 발 아래 몸을 던지고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당신께서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으라. 그대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결코 멸망할 수
없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소망 429)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에게 연약한대로 항암치료를 받든 받지 않던,
고집이 있는 자들에게는 고집 있는 대로 당신의 기이하신 사랑으로 당신의 참 모습을
그들에게 나타내어 그들을 감동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연약한 자들도
당신의 길을 확신 있게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뉴스타트의
주체이신 창조주이신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위대하신 의원이신 그리스도는 그들의
질병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과학보다 더 높으신 과학으로!
사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치유와 복과 건강기별
치유를 통하여 실제로 복을 체험해본 자들이 진정한 남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안식일에 그냥 일을 하지 않았던 자들은 자기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복을 받아본 일이 없어서 재창조의 치유를 체험해보지 못했을 것이고,
복을 모르고 건강기별을 하나의 규칙으로 복종했던 사람들도 창조주의 치유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할 것이다. 결국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해보지는 못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종말에 가서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의 복을 우리들 스스로가 체험하여 치유를 체험하고 창조를
체험해야한다. 생명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복이 없이는 치유도
없는 것이다. 이 위대한 복의 체험을 위하여 건강기별이 주어진 것이다. 즉 안식일의
중요성, 곧 복의 중요성을 체험하여 알게 하시기 위하여 건강기별을 주신 것이다.
말세에는 이러한 복이 중심이 된 하늘의 건강기별이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몰랐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이 치유력으로 나타나는 건강기별을 통하여 치유를 받고, 마침내
복을 체험하게 되고 그리하여 복이 초점인 안식일의 존재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강기별은 복으로 치유하는 기별이며 복은 창조주의
말씀 속에 있는 당신의 사랑이며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따라서 건강기별의 초점이 복인 줄을 모르면 무엇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서 논란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치유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상실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건강기별은 육적인 건강기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건강기별은 세상적 건강기별이 아니라
하나님적, 곧 영적인 건강기별입니다.
[롬14: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불행하게도 뉴스타트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 치유력, 곧 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뉴스타트는 육식을 하지
않고 병원치료를 받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금하고 무엇이 허락되었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우신 분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무엇을 금하시는 분, 허락하시는 분, 엄하신 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기보다는 엄위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1: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되리라.
[눅19: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눅19: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사울도 엄위에 거하다가 스데반을 죽이고, 마침내 인자를 발견하고 인자에 거하여
바울이 되었지요. 다시 말하면 사울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엄위에 거했기 때문에
스데반을 죽였지만 마침내 그리스도의 품성,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인자하심을 깨달아
바울이 된 것입니다. 사울을 바울로 거듭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품성입니다. 자기를
돌로 쳐 죽여도 그 원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그 품성은 피 흘리며 죽어가면서
사울을 위하여 기도하는 스데반의 얼굴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복, 창조력)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사랑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받기로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육적이며 위선적인 신앙
성경이 금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금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던지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을 문자주의(율법주의) 신앙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육적이지요, 영적인 신앙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식물’은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인간에게 친히 지정하여 주신
것은 우리들의 건강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선물로 주시는 모든 것이 좋은
선물이며 온전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여 주시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래 주시지 않은 것을 인간이 완약하여져서 너무나 원할 때에,
선택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은 원하지 않지만 사랑으로 오래 참으시며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만나는 선물로 주신 음식이지만 메추라기는 백성들의 완악함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허락하여 주신 음식입니다. 우리는 선물로 주시는 것과 허락하여 주시는
것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약1:17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곧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오나니
완악하기 때문에 허락하신 육식, 이혼, 왕
그러나 육식은 처음부터 지정하여 서물로 주신 식물은 아닙니다. 육식을 주시지
않았던 이유는 육식이 건강에 전혀 유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식을
분명히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생명적이지 못한 육식을 마침내
허락하시며 주셨습니다. 본래는 서물로 주시지 않았던 것을 세월이 지난 후에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 중에는 이혼도 포함되어 있지요. 이런 것들은 결코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신24:1]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마19:7]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마19: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왕도 완악한
백성들의 요구로 인하여 아프신 마음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삼상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주시지 않았던 것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해서가
아니요 우리의 완악함 때문인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도 사람들이 완악하여져 있었겠지요.
또 다른 경우는 완악함 때문은 아니지만 신앙의 초보에 입문한 이방인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그들의 신앙이 성숙하게 될 때까지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초보단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채식을
하라는 것이 아직은 너무 이르기 때문이지요)
[행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니라 하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싶으신 분께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허락하시는 심정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들에게 유해한 것을 허락하시는 그분의 오래
참으시면서, 완악해진 죄인들이 다시 당신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깨닫고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다시 돌아와서 본래 주신대로 생명을 받아줄 것을 바라시고 믿으시고 인내하시고
계신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육식을 금하신 일도 없으시고, 또 결국에는 허락하셨으므로
육식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참으로 육적인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육식이 최선의 식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본래는 육식을 선물로는 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신 것이니까 먹을 수 있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유지되는 신앙은 ‘기쁘게 주신 선물과 슬프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아픔을 구별하지
못하는 외식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금하셨나, 금하지 않으셨나, 허락하셨나, 허락하시지 않으셨나,
가 신앙의 초점이 되어 있는 잘못된 영적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으로 하는
뉴스타트나 신앙은 하나님의 생명(사랑)으로부터는 떠나있는 뉴스타트이요 신앙이며,
오직 표면적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잘못한 것이 없으면 잘했다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런 방향으로
변질되면 결국 좌로나 우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놀라운 치우쳐버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로 치우친 결론:
“모든 허락하신 것만이 합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허락하지 않는 것은 불법이다.”
예배에는 정숙과 경건만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이것만이 합법이다. 그러므로 박수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이다.(치우친 보수주의)
좌로 치우친 결론:
금하신 모든 것만이 불법이다. 그러므로 금하지 않은 모든 것은 합법이다.
예: 돼지고기는 금했기 때문에 불법이다. 그러나 다른 육식은 금하지 않았음으로
합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기를 먹는다.(치우친 자유주의)
이러한 좌로 치우친 신앙은 역시 ‘치우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한 ‘치우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좌로 치우친 자기의 신앙을 합리화하는
잘못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
십자가에서 흘리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그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죄의 유혹을 이기고 잘못된 입맛을 인내하고 건강식을 하여 건강해지며 더 나아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드려서 진정한 생명적 변화(성화)를 이루어나가는
기쁨을 맛보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을 때에 그 유혹을 받아드리고 싶어 하는 자신의 죄 된 성향과 투쟁하기보다는
그 유혹에 굴복해버린 것을 오히려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라고 합리화하며 자기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부터 주어지는 자유를 오히려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갈5: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하나님의 남은 교회의 정체성상실은 계명과 율법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품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좌나 우로 치우치게 율법을 보게 되므로 일어난 현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그리스도의 품성의 사본으로, 살리는 율법으로 보지 않고, 무엇을
금하셨나, 무엇을 허락하셨나를 나타내는 율법으로 본 것이 정체성 상실의 치명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좌는 우를, 우는 좌를 공격하며 논란하는 가운데 정체성은
완전히 허물어져버리고 혼란이 찾아오면서 마침내 큰 흔들림이 오고야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금하시는 분, 허락하시는 분,
무서운 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품성인 절대적인 사랑은 알지 못하고 율법을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그분의 품성의 오해로부터 시작합니다. 루스벨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품성의 오해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루스벨은 하나님의 능력은 원했으나 그의 품성은 원하지 않았다.(소망 435)
그러나 진정한 율법의 의는 그 율법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곧 그분의 품성인 사랑을
율법으로부터 발견하여 삶에 적용하는 의이지요.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사랑)의
사본이니까요.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것이 가하나---”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 육식도 가했습니다. 하나님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면 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기를 먹는 것이 덕이 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초 신자를 실족시키는 경우라면 영원히 먹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지요. 그는 육식을 즐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채식가이지요.
[롬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믿음이 있지만 연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느니라.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하나님이 해도 된다고 허락하셨기 때문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올바른 신앙이
아니지요. 이혼을 허락했다고 해서 이혼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도 사랑을 선택하는
신앙이 아니지요. 배우자가 간음을 했기 때문에 이혼할 수 있다는 신앙도 사랑을
선택하는 신앙은 아니지요.
“나는 내 아내가 간음했기 때문에 그 간음한 아내와 이혼했다. 그러므로 나는
의롭다.”라고 생각하는 남편과 같은 사람들 가끔 있지요. 이러한 남편들이 바로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는 율법의 글자대로 정죄의 돌, 심판의 돌, 곧 사망의 돌을
든 사람들이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돌은 용서의 돌, 구원의 돌, 생명의 돌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생명의 돌이십니다.
참으로 그들의 손에 쥐어진 돌은 사망의 돌이었습니다. 생명의 돌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그들이 지킨 율법은 사랑과 생명이 나타난 그리스도의 품성의 사본으로서의
율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율법은 도리어 증오와 분노, 정죄와 사망의 사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돌로 치라는 율법 속에 있는 그 율법의 저자이신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지요.
따라서 그분이 주시는 생명도 알지 못하지요. 그리고는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고
있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하지 않으며 정죄를 받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없느냐?” 여인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을 폐하시거나 범하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진정한 의를 들어내어
보여주시어 그 율법의 진정한 의를 도리어 굳게 세우시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롬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여기에 두 다른 의로움이 나타난 것입니다.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생명을 주시는 의로우심,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그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며 사망을 주는 바리세인들의 표면적 율법의 의로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누구의 의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의입니까?
하나님께서 간음한 다윗을 용서하셨다고 해서 간음을 합법화하시거나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또 간음한 경우에는 반드시 정죄를 받아 돌로 쳐 죽임을 받아 죽어야
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돌로 치라는 율법을 범하시거나
폐하신 것도 아닌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만지지 말라는 율법을 주신 분이 문둥병자를
생명을 주셔서 치유하시기 위하여 친히 만지시는 것이 그분 스스로가 그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죽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의는 좌로 치우친 것도 아니며 우로 치우친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은 금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금하심은 먼저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신 후에
금하십니다. 만약 선택의 자유를 주시지 않으시고 금하신다면 그것은 독제이며 강제입니다.
그 독제와 강제는 무례히 행하시는 것이며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시고 그냥 방임만 하시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그리고 상대방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시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시며, 강제하시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모든 것을 견디시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시며 인간을 만류하시며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망을 금하신 율법과 생명을 약속하시는 율법
그분이 율법으로 금하시는 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그 금하심의 실상, 곧 율법의
실상은 당신께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망을 금하시며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는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망을 금하신다는 참 뜻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나타난 금하심은 사망을 선택하는 죄인을 향하신 간곡한
사랑의 만류이며, 생명을 받아드리라는 간곡하신 호소인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율법은 죽이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살리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겔18:23]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18:31]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겔33:11]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허락하신 것도 사양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금하신 것을 마치 하나님이 우리들의 자유를 구속하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도 옳지 않으며, 허락하시는 것을 마치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약1:25]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금하신 것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허락하신 것도 사양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