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저의 구원반납하기 마지막 글입니다. 구원이야기는 끝이 없어야 겠지만 저의 지력이 짧아서요. ^^ 물론 구원반납하기를 쓰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마음들을 후기로 쓰려고 합니다. 즐감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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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을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받을 만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너무 대책이 없으니까 불쌍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는 거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겔16:6
일단 이거 받고 추스린 다음에 정신 차리고 살아라. 그걸 받아들고서 우리는 슬퍼진다. 하나님의 구원은 받아 들고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
종종 여러 개신교인들이 우리더러 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우중충하고 얼굴에 구원의 기쁨이 없다고 뭐라고 한다. 난 그 질문을 들을 때 마다 자존심이 상했었다. 재림교회 모태신앙인으로서, 재림교회 목사로서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니 뭐라 반박할 수도 없고...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는 ...
아주 오래 전 내가 어렸을 때 목사님들께서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해 주신 적이 있는데 그와 비슷한 이야기다.
어느 집에 엄마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아이가 살았다.
아이가 잠든 동안 잠시 가게에 갔다 와 보니 집에 갑작스런 화재가 발생되었다.
가난한 집, 판잣집이라서 불난지 얼마 안 되어 금방 온 집이 불바다였다.
119에 신고했지만 소방관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 타버릴 것 같았다.
아무도 집 안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 들어가고 있지 못할 때, 한 여인네가 뛰어 들어갔다.
엄마였다. 엄마는 얼른 들어가 잠자던 아이를 이불로 둘둘 말고 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럴 때는 반드시 천장에서 불기둥이 엄마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엄마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서 딸을 구해냈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 덧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부형 회의에 오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딸은 몹시 당황했다. 딸은 엄마가 그 무서운 얼굴로 학교에 나타나는 것이 싫었다.
딸은 학교에서 담임선생님께 왜 어머니를 데려오지 않느냐고 여러 번 혼이 나고 나서야 집에 가서 엄마에게 학부형 회의가 있다고 말씀드렸다.
마지못해 학부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엄마는 학교에 갔고 그 날부터 딸아이는 매일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너네 엄마는 완전히 괴물이더라...’
참다못한 딸, 엄마에게 “엄마 때문에 나 학교도 못 다니겠어. 엄마는 왜 그렇게 생겼어? 정말 창피해...”
엄마는 할 수 없이 딸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래서 저래서 그렇게 되었단다.” 딸아이는 너무나 감격했다. 엄마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래서 “엄마, 정말 고마워. 만약 그 날 엄마가 나를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혹시 화상이라도 입었다면 난 창피해서 학교도 못 다니고 시집도 못가고... 어휴 큰 일 날 뻔 했잖아. 참 다행이야. 나 오늘부터 정말 행복하게 신나게 살께.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나오던 예화는 결말이 이렇지 않다. 눈물을 흘리며 딸은 자기가 엄마에 대해 부끄러워했던 것을 몹시 후회하며 엄마에게 미안해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딸은 다르다. 그녀는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로는 잘 이해가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딸을 정신 나간 미친 X 라고 한다.
우리가 철이 든 자식이라면 예수님의 희생을 보고서 절대로 그렇게 즐거워할 수 없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들을 거듭거듭 뉘우치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조선시대에 왕이 중국 신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할 때, 그 백성들이 이제 우리는 죽지 않아도 되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서 날뛰었을까?
대통령이 탄핵되는 것을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씁쓸했다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왕 중의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그런 수모를 당했다고 했을 때, 기뻐할 사람은 없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희생을 통하여 다시 찾은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계속되는 만남 때문이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분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로 다시금 귀한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치루신 그분의 희생은 천사들조차 연구 대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객관적으로는 대단히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보기엔 우리가 그런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구해 줄 만큼 값이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희생을 가볍게 취급하는 태도, 그분의 사랑을 쉽게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분위기, 이런 것을 우리는 용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요즘 철 없는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엄마 아빠가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왔으니까 좋은 학교 보내고 집 팔고 땅 팔아서 유학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 아니냐” 라고 말한다고 한다. 우리가 만약 철 들은 자식이라면...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누가 와서 왜 당신은 구원의 기쁨이 없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할 말이 있다.
"구원만을 생각하면 나는 더더욱 기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쓰레기 같은 우리들을 위해 치루신 하나님의 희생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기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 보답할 수 없는 사랑에 반응하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기쁨,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께 드리는 의무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기쁨이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식이기 때문에 자식으로서 순종하는 것이다" 라고...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3
구원은 우리 신앙의 마지막 종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구별된 점이 이것이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에서는 구원받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도를 닦아야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에 대한 반응으로 도를 닦는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행동과 사상의 동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미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과 행동의 동기에 불순물이 끼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일4:17 :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히2:15-16: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혹시 우리는 심판의 날에 죽을까봐 무서워서 신앙하는 사람들은 아닌지... 지옥불에 지글지글 탈까봐서 예수 믿는 것은 아닌지... 이런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한다.
그리고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를 읽으며 후에 얻을 구원을 기대하면서 자기 목숨을 던지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첫 째 죽음이나 둘 째 죽음 모두 다...
그 예:
출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롬9: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모세나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언제나 담대하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구원과 영생조차 초개처럼 버리려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면 참...
하늘은 온통 그런 사람들 투성이다. 자신의 구원받음의 대명사인 면류관을 던지는 사람들...
“그들이 크고 흰 보좌 주위에 모일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발 아래 그들의 면류관을 던지고 영원히 주님을 찬송하게 된다... 아담의 가족은 주님께 경배할 때 노래를 부르며 구주의 발 앞에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 던진다.” 각 시대의 대쟁투 하권 319-320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막1:7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읽으며 그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마치 대단히 겸손하고 예의 바르기 때문에 면류관을 주님 발 아래 내려 놓은 것인 양 생각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이 면류관이 자신에게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예의상 하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지 않을 것 같다.
주님을 만나는 그 날 구원의 모든 영광과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께 반납될 것이다.
그들은 땅에 사는 동안 항상 그런 자세로 살던 사람들이다.
이제부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하여 왈가왈부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구원 여부에 대하여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감히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영역에 침범하는 신성모독이다.
기복 신앙적 구원관이여 영원히 안녕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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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을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받을 만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너무 대책이 없으니까 불쌍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는 거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겔16:6
일단 이거 받고 추스린 다음에 정신 차리고 살아라. 그걸 받아들고서 우리는 슬퍼진다. 하나님의 구원은 받아 들고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
종종 여러 개신교인들이 우리더러 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우중충하고 얼굴에 구원의 기쁨이 없다고 뭐라고 한다. 난 그 질문을 들을 때 마다 자존심이 상했었다. 재림교회 모태신앙인으로서, 재림교회 목사로서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니 뭐라 반박할 수도 없고...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는 ...
아주 오래 전 내가 어렸을 때 목사님들께서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해 주신 적이 있는데 그와 비슷한 이야기다.
어느 집에 엄마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아이가 살았다.
아이가 잠든 동안 잠시 가게에 갔다 와 보니 집에 갑작스런 화재가 발생되었다.
가난한 집, 판잣집이라서 불난지 얼마 안 되어 금방 온 집이 불바다였다.
119에 신고했지만 소방관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 타버릴 것 같았다.
아무도 집 안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 들어가고 있지 못할 때, 한 여인네가 뛰어 들어갔다.
엄마였다. 엄마는 얼른 들어가 잠자던 아이를 이불로 둘둘 말고 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럴 때는 반드시 천장에서 불기둥이 엄마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엄마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서 딸을 구해냈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 덧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부형 회의에 오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딸은 몹시 당황했다. 딸은 엄마가 그 무서운 얼굴로 학교에 나타나는 것이 싫었다.
딸은 학교에서 담임선생님께 왜 어머니를 데려오지 않느냐고 여러 번 혼이 나고 나서야 집에 가서 엄마에게 학부형 회의가 있다고 말씀드렸다.
마지못해 학부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엄마는 학교에 갔고 그 날부터 딸아이는 매일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너네 엄마는 완전히 괴물이더라...’
참다못한 딸, 엄마에게 “엄마 때문에 나 학교도 못 다니겠어. 엄마는 왜 그렇게 생겼어? 정말 창피해...”
엄마는 할 수 없이 딸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래서 저래서 그렇게 되었단다.” 딸아이는 너무나 감격했다. 엄마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래서 “엄마, 정말 고마워. 만약 그 날 엄마가 나를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혹시 화상이라도 입었다면 난 창피해서 학교도 못 다니고 시집도 못가고... 어휴 큰 일 날 뻔 했잖아. 참 다행이야. 나 오늘부터 정말 행복하게 신나게 살께.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나오던 예화는 결말이 이렇지 않다. 눈물을 흘리며 딸은 자기가 엄마에 대해 부끄러워했던 것을 몹시 후회하며 엄마에게 미안해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딸은 다르다. 그녀는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로는 잘 이해가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딸을 정신 나간 미친 X 라고 한다.
우리가 철이 든 자식이라면 예수님의 희생을 보고서 절대로 그렇게 즐거워할 수 없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들을 거듭거듭 뉘우치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조선시대에 왕이 중국 신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할 때, 그 백성들이 이제 우리는 죽지 않아도 되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서 날뛰었을까?
대통령이 탄핵되는 것을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씁쓸했다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왕 중의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그런 수모를 당했다고 했을 때, 기뻐할 사람은 없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희생을 통하여 다시 찾은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계속되는 만남 때문이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분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로 다시금 귀한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치루신 그분의 희생은 천사들조차 연구 대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객관적으로는 대단히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보기엔 우리가 그런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구해 줄 만큼 값이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희생을 가볍게 취급하는 태도, 그분의 사랑을 쉽게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분위기, 이런 것을 우리는 용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요즘 철 없는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엄마 아빠가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왔으니까 좋은 학교 보내고 집 팔고 땅 팔아서 유학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 아니냐” 라고 말한다고 한다. 우리가 만약 철 들은 자식이라면...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누가 와서 왜 당신은 구원의 기쁨이 없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할 말이 있다.
"구원만을 생각하면 나는 더더욱 기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쓰레기 같은 우리들을 위해 치루신 하나님의 희생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기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 보답할 수 없는 사랑에 반응하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기쁨,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께 드리는 의무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기쁨이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식이기 때문에 자식으로서 순종하는 것이다" 라고...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3
구원은 우리 신앙의 마지막 종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구별된 점이 이것이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에서는 구원받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도를 닦아야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에 대한 반응으로 도를 닦는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행동과 사상의 동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미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과 행동의 동기에 불순물이 끼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일4:17 :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히2:15-16: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혹시 우리는 심판의 날에 죽을까봐 무서워서 신앙하는 사람들은 아닌지... 지옥불에 지글지글 탈까봐서 예수 믿는 것은 아닌지... 이런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한다.
그리고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를 읽으며 후에 얻을 구원을 기대하면서 자기 목숨을 던지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첫 째 죽음이나 둘 째 죽음 모두 다...
그 예:
출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롬9: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모세나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언제나 담대하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구원과 영생조차 초개처럼 버리려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면 참...
하늘은 온통 그런 사람들 투성이다. 자신의 구원받음의 대명사인 면류관을 던지는 사람들...
“그들이 크고 흰 보좌 주위에 모일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발 아래 그들의 면류관을 던지고 영원히 주님을 찬송하게 된다... 아담의 가족은 주님께 경배할 때 노래를 부르며 구주의 발 앞에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 던진다.” 각 시대의 대쟁투 하권 319-320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막1:7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읽으며 그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마치 대단히 겸손하고 예의 바르기 때문에 면류관을 주님 발 아래 내려 놓은 것인 양 생각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이 면류관이 자신에게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예의상 하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지 않을 것 같다.
주님을 만나는 그 날 구원의 모든 영광과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께 반납될 것이다.
그들은 땅에 사는 동안 항상 그런 자세로 살던 사람들이다.
이제부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하여 왈가왈부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구원 여부에 대하여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감히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영역에 침범하는 신성모독이다.
기복 신앙적 구원관이여 영원히 안녕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