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 않은 악인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마음
다음 질문에 대한 답 글입니다.
질문:
박사님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에 매우 공감하다보니저도 성경의 여러 사건들을 하나님의 사랑차원에서 생각해보다가박사님의 고견을 듣고 싶은 마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 <노아홍수, 소돔멸망, 고대의 악한민족들의 멸망>을 시키신 이유를죄의 잔이 차서 악인들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 그들의 고통을 덜 수 있으므로악인들의 고통의 삶을 단축시키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을 해봤지만본인들은 죽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것이라면 어떻게 설명해야할지,그래서 더 합리적인 설명은. 악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악한 영향을 없애서남아있는 후세 사람들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저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합니다.그리고 모세가 십계를 받으러 갔을 때 배도한 사람들을 레위지파에게 칼로 죽이라고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죄지은 자들을 죽임으로 처벌하시는 장면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아론의 두 아들이 죽는 사건,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런 사건들을 그냥 후세 사람들을 위한 일벌백계의 차원으로 봐야하는지.그리고 구약시대에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등, 많은 전쟁에서 의인들이 살인을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고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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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글:
먼저,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이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이 죽고 싶지 않은 죄인을 죽이실까요?
십자가에서 인간이 받아야할 모든 형벌을 받으신 분께서 악인에게 죽음이라는 형벌을 죄인
에게 내리실까요? 정녕 그러하다면 그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사망이란 무엇인가?
漢文이 성경을 기초로 만들어진 글자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한문에 死亡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 속에는 두 가지 다른 뜻이 한꺼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死는 죽는다는 뜻이고 亡은 망할 망으로서 망하다. 달아나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死亡은 죽어서 완전히 없어져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며 죽어서 생명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서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死는 이 세상 사람들이 살다가 이 세상에서 죽는 “첫째사망”이요, 亡은 둘째부활 다음에 올 심판 후에 이루어질 “둘째사망”(계20:14), 곧 멸망(요3:16)인 것입니다. 이 亡이라는 글자의 뜻이 망하다, 또는 “달아나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고 생각됩니다. 둘째부활에 참여한 악인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달아나서 생명과의 영원한 분리를 이루어 마침내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직접 악인을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이 결국 생명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한문의 死亡이라는 단어도 성경적인 근거위에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死한다고 해서 모두 亡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생명을 받아드린 사람은 死할자라도 亡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생명을 받아드리지 않았지만 死하지 않고 아직도 살아있는 악인은 100%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 놀라운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속에 자기의 생명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생명이 자기들의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말씀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임을 알게 되고 마침내 그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게 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드리도록 하시고자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단순히 죽는다(死)고 해서 잘못되는 것이라는 관념은 성경적으로는 잘못된 관념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사람은 한번 죽는다(死)라고 말합니다. 이 死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들이 亡, 곧 滅亡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누구는 이러저러해서 죽었는데 하나님이 일벌백계로 죽이신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로서의 죽음
스데반이 사울의 돌에 맞아 피 흘리며 死합니다. 그러나 亡하지는 않습니다.
아벨이 가인의 돌에 맞아 死합니다. 그러나 亡하지는 않습니다.
스데반이나 아벨에게 있어서 死의 순간은 결정적인 生의 순간, 구원의 순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死의 순간은 진정한 生의 시작점이 되며 영원의 참 시발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의인들이 악인의 손에 죽(死)어간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죄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죄 속에서라도 살아 있어야 하느냐? 라는 질문에 올바른 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亡의 어둠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生의 빛을 전하는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 亡의 어두움 속에서 살아있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死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생명 속에 있는 자들은 死할 수는 있지만 결코 亡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死의 순간은 참으로 모든 사람들의 최종적 운명을 결정하는 지고의 중요한 순간입니다. 死가 마침내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生의 중요성을 확실히 맛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던가를 누구나 느껴야만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死의 순간이야말로 生을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운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악인들에게도 죽음이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며 살아왔던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死의 순간이 찾아왔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그 악인들의 亡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십자가의 두 강도는 生을 떠나서 亡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중 한 강도는 亡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死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死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못 박고 있는 로마 군인을 사랑하시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품성, 곧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았고 그 사랑, 곧 생명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死 속에서 生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강도는 루스벨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품성보다는 십자가에서 내려가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만을 구함으로써 생명을 거부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生으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며 마침내 둘째사망의 亡을 선택해버린 것입니다. 그는 死 속에서도 亡을 선택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죽이라고 하실 때
성경에서, 특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시거나 죽이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을까? 라고 의문을 품으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냥 그대로 받아드린 나머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직접 죽이시는 분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亡을 이미 선택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악인들이 亡을 이미 선택하고 생명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아직도 하나님께 돌아와서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망 속에 살면서 죽고 싶지 않을 수가 있을까?
생명을 거부하며 亡 속에서 살고 있는 악인들이 죽(死)기가 싫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生을 선택한 마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生을 즐기고 싶어서 죽기가 싫은 것이 아니라 亡을 즐기며 더 연장시키고 싶은 것일 뿐이지요. 선을 행하며 즐기기보다는 악을 즐기며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 악은 스스로들에게 괴로운 것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단의 거짓에 속아서 자기들이 그 악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히 나타나는 결정적인 시점에서 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 배도한 악인들을 죽이라는 것을 우리 죄인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그 배도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처벌 내지는 처형이라고 간주해버리는 경향이 너무나 농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악인을 죽(死)이실 때에 죽(亡)이시기 위하여 당신의 은혜로 그 악인에게 주시던 생명을 거두시어 死를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 죄인들의 죄 된 성향으로부터 나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결론이 옳은 결론일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품성이 과연 그러할까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亡 속의 악인에게 死를 허락하시어 生을 선택하게 하시는 하나님
악인들에게 은혜로 생명을 주시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악인 자신들이 生을 거부함으로 인한 결정적인 死의 순간이 악인에게 찾아왔을 때에 그들이 마침내 당신께서 그동안 주시고 계셨던 生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亡을 버리고 生을 선택하게 하여 당신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악인들의 死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악인들을 구원시기 위한 마지막 은혜로서 死를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하나님께 너무나 위험한 순간입니다. 만약 악인들이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生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生으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면서 亡을 선택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녀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인의 死를 마침내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도 너무나 눈물겨운 고통과 도박(?)의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生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는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死를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은 악인들에게는 최후의 은혜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악인들의 死를 허락하시는 것은 결코 그 악인들을 亡하게 하시는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그 은혜로 주시던 생명을 그 악인의 발악적인 대적과 거부 때문에 더 이상 生을 강제로 주실 수가 없게 되어버리신 것입니다. 만약 그토록 발악적으로 생을 거부하는 그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生을 주신다는 것은 강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제하시는 것은 공의로우시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 때문에 결국 그 악인에게 주시고 계셨던 生을 눈물을 머그머시며 거두어 드리셔서 그 악인의 死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死하게 하시는 것이 결코 그 악인의 亡을 바라시고 주시는 형벌은 아닙니다.
그리고 생명을 거부한 악인이 마침내 하나님의 生으로부터 점점 멀리 분리되어 가면서 死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때에 주님은 그 악인이 느끼고 있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동안 주님께서는 그 악인을 위하여 기도하실 것입니다. 시험에 빠진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던 것처럼, 死를 맛보며 죽어가고 있는 그 악인이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 生을 선택하여 구원을 받아드리도록 하시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것입니다.
生을 거부하고 亡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던 그 고통 중의 악인이 다시 生의 귀중함과 감사를 느끼고 구원을 받아드리게 할 수 있는 그 악인과 하나님께 최후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죽어가는 악인의 구원을 위하여 주실 수 사용하실 수 있는 최후의 카드가 바로 死인 것입니다. 死는 하나님이 악인에게 주실 수 있는 최후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死는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는 악인에게 베푸실 수 있는 최후, 최대의 은혜이며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는 남아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죽이기 위하여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하여 죽이신다는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는 다시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겔18:23]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죽음의 순간에 나눌 수 있는 최후의 대화
순식간의 예기치 않는 사고로 말미암아 인간이 졸지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가져보지 못하고 죽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간을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어떤 특별한 순간이 왔을 때에 시간을 조절하시어 그 순간의 시간의 흐름을 아주 길게 느끼게 하여 주실 수가 있다.(영화 속의 교통사고의 순간이 슬로모션으로 느껴지는 경우처럼) 바로 이때가 하나님께서 최후의 호소를 하실 수 있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의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이대로 죽고자 하느냐?”라고 하시며 亡을 버리고 生을 선택하여 당신의 품으로 돌아와 구원받기를 호소하실 것이다.
[겔33:11]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악인이 어떻게 죽어가던 간에 하나님께서 그 악인에게 최후의 호소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신다. 그리하여 그 악인이 최후로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그러므로 그 악인의 죽음(死)의 순간은 그 에게 가장 아름다우며 중요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악인이 하나님을 배도하며 생명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하시는 순간은 결코 그 악인이 멸망하기를 바라시면서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악인을 구원하시어 다시 첫째부활에 참여케 하셔셔 영원히 살리시기 위함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 두 사람은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이 세상 역사상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오순절 당시에 그렇게도 확실한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고 생명을 떠나 오히려 사단의 음성을 듣고 사망을 선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부로 인하여 더 이상 그들을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실 수가 없으셨다. 그들은 진정한 진리, 생명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재산을 팔아서 그 일부만을 사도들에게 바치면서도 마치 전적으로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하는 것처럼 속여서 사도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더 큰 금전적인 유익을 바랐던 사람들이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을 속이고 사망을 선택하기로 선택한 사실을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생명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베드로를 성령으로 감동시키시어 사랑으로 그들에게 호소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는 그들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선, “아나니아야!” 하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간절한 심정으로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께 거짓말까지 하게 되었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아나니아가 정직하게 회개하도록 기대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은 다윗의 회개를 간절히 바라고 과감하게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은 순간인 것입니다. [삼하12:7]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그러나, 그 순간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을 알지 못하는 아나니아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이제 너는 죽었다. 하나님이 너를 죽일 것이야!”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나니니아는 그 사단의 두려운 말을 믿고 실성하여 죽어버린 것입니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그 후에 삽비라가 들어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만이라도 하나님을 속인 것을 회개하고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구하여 구원받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간절히 호소하며 말했습니다.
행5: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그러나 삽비라도 이 마지막 자비의 호소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행5:8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가장 확실하게 결정적으로 사망을 선택해버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머그머시며 사단의 세력을 제어하시는 영을 그들로부터 거두셔야만 하셨다. 은혜의 생명의 손길은 하나님의 눈물과 함께 그들을 떠났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최후로 거부해버리는 이 뻔뻔스러운 삽비라의 거짓의 대답을 들은 베드로는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면서 이제 그들을 잃어버리게 된 슬픔과 고통 속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며 말합니다.
행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베드로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그 순간 사단이 삽비라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이제 죽는다. 하나님이 너를 죽일 것이야!”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호하실 수 없는 삽비라를 사로잡는 순간 그는 실성하여 쓰러지면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死)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최후로 그들에게 영원한 더 이상 亡을 선택하지 말고 生을 선택하여 당신의 품에 돌아오도록 호소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아나니아야!, 그리고 사랑하는 내 딸 삽비라야!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내가 어찌하여 너희들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겠느냐? 아나니아야, 삽비라야,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품에 안겨라!”라고 호소하셨을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死를 허락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死가 찾아왔습니다.
이 하나님의 최후의 生의 호소를 과연 그들은 받아드렸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호소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으로부터 끝내 달아나버려서 亡을 선택해버렸을까요?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심판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기에 하나님만이 심판자인 것입니다.
사단이 원하는 것
그들의 죽음(死)은 많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작전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능력이 넘쳐나며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자 사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하게 하기 위하여 아아니아와 삽비라를 유혹하여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살려보시려고 애쓰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죽음(死)을 허락하시면서 까지도!, 그리고 亡하지 않도록!
그들이 하나님의 최후의 기회를 저버리고 죽어버리자 베드로도 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끝내 사랑보다는 재물이, 진리보다는 명예가 더 중요하였던 것이지요.
행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아야합니다.
이 아나니아와 십비라의 무서운 죽음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품성, 곧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엄위가 아니라 인자를 보아야 합니다.
* 다른 악인들의 죽음은 성경공부 자료실을 클릭하여 들어가 보시면 23번 강의 “돌로치라”를 읽어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 등의 악인들의 죽음은 창세기 강의에 잘 설명되어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