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얼마전 성경에 대한 의문을 공부하고 풀어가면서, 한가지 느낀점이 있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심각한 의문들... 그래서 박사님께 질문을 해보고, 답변을 듣고 성경과
예언의 신과 일치하고 있는지 다시한번 공부해보고 하는 과정에서 세미한 성령의 음성
을 들어보았습니다.
나의 느낌인지? 아니면 정말 성령의 음성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론 사단도 우리에게 헛된 음성으로 성령의 음성과 혼돈하게 하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음성을 잘 구별해야될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몇가지가 있었는데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너무나도 인격적이었습니다.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공통적인 부분은 나의 등뒤에서 음성이 들리는듯 했습니다. 내가 받는 느낌이지만
매번 그 느낌은 흡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의 음성임을 더욱
확신하고 기도를 통하여 더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은 너무나도 하나님과 가까이 지네시며 찬미가 그입에서 끊어지지 않는 마치 144000인이 저런분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신앙적인 분인데, 그분의 경험을 빌어 예기하자면 하루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음속에 음성이 분명히 들려서 주의 응답이구나 생각하다가, 평소와 다른 한가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무례하다는 것이었고,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것이 사단의 응답이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얼마전 느끼게 된 부분은 참 따듯하고 온유하면서 굉장히 인격적으로 다가오는것 같은 그 음성... 그 느낌.. 몇마디 되지 않았지만...참으로 따듯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찬미에도 나의 등뒤에서 라는 가사가 있지요..
왜 나의 등뒤에서 라고 했을까?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님..
왜...
저는 몇번 경험은 안되지만 항상 내 등뒤에서 그 음성이 들리는것 같았습니다.
왜 항상 내 등뒤에서 들리는 듯한 음성이었을까? 곰곰히 묵상을 해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은 충분한 자유를 주는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피조물이지만 그들의 앞에서서 그들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습니다. 마치 동네 놀이터에 아장아장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뒤를 그 부모가 넘어질세라 다칠세라 팔을 내민체 뒤따라 가듯... 그 아이가 충분히 자유롭도록..
또 우리가 잘못해서 넘어지더라도 뒤에서 보이지않게 일으키시며 세워주시고는 우리보고 "잘하였도다 충성된종아" 라고 말씀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사랑은 도움을 주고도 "내가 도움을 줬다 그러니 고맙지?" 하지않고 "너가 참 잘했구나" 라고 칭찬해 주는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재림후 하늘나라 들어갈때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며 면류관을 하나씩 직접 씌워주시실때 진짜 우리가 잘한줄 알고 우선 만족하고 기뻐하지만, 자기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뒤에서 피땀흘리신 그분의 사랑을 목격하고 마침내 우리가 받았던 면류관을 그의 발아래 내어 던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나의 등뒤에서 "참 잘했구나 내 사랑하는 아들아" 라고 속삭이며 기뻐하십니다.
참으로 나의 뒤에서 충분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내 앞에서가 아닌 보이지 않는 나의 등뒤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바랄때까지 기다리시며, 기회를 보시며 드디어 기회가 왔을때 사랑의 음성으로, 참으로 부드럽고, 참으로 인격적인 음성으로 조용히 속삭이십니다.
" 계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계시록이 조금은 무섭고 두려운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들린 그 음성이 오늘저녁 너무나 그립습니다.
나의 등뒤에서 나에게 자유를 주시며 언제나 내가 고개만 돌리면 그자리에 서있을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가 죄지을 때에도... 내 등뒤에 서있기위해 음침한 골짜기까지 함께 따라와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합니다.
말씀에 대한 심각한 의문들... 그래서 박사님께 질문을 해보고, 답변을 듣고 성경과
예언의 신과 일치하고 있는지 다시한번 공부해보고 하는 과정에서 세미한 성령의 음성
을 들어보았습니다.
나의 느낌인지? 아니면 정말 성령의 음성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론 사단도 우리에게 헛된 음성으로 성령의 음성과 혼돈하게 하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음성을 잘 구별해야될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몇가지가 있었는데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너무나도 인격적이었습니다.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공통적인 부분은 나의 등뒤에서 음성이 들리는듯 했습니다. 내가 받는 느낌이지만
매번 그 느낌은 흡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의 음성임을 더욱
확신하고 기도를 통하여 더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은 너무나도 하나님과 가까이 지네시며 찬미가 그입에서 끊어지지 않는 마치 144000인이 저런분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신앙적인 분인데, 그분의 경험을 빌어 예기하자면 하루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음속에 음성이 분명히 들려서 주의 응답이구나 생각하다가, 평소와 다른 한가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무례하다는 것이었고,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것이 사단의 응답이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얼마전 느끼게 된 부분은 참 따듯하고 온유하면서 굉장히 인격적으로 다가오는것 같은 그 음성... 그 느낌.. 몇마디 되지 않았지만...참으로 따듯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찬미에도 나의 등뒤에서 라는 가사가 있지요..
왜 나의 등뒤에서 라고 했을까?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님..
왜...
저는 몇번 경험은 안되지만 항상 내 등뒤에서 그 음성이 들리는것 같았습니다.
왜 항상 내 등뒤에서 들리는 듯한 음성이었을까? 곰곰히 묵상을 해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은 충분한 자유를 주는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피조물이지만 그들의 앞에서서 그들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습니다. 마치 동네 놀이터에 아장아장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뒤를 그 부모가 넘어질세라 다칠세라 팔을 내민체 뒤따라 가듯... 그 아이가 충분히 자유롭도록..
또 우리가 잘못해서 넘어지더라도 뒤에서 보이지않게 일으키시며 세워주시고는 우리보고 "잘하였도다 충성된종아" 라고 말씀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사랑은 도움을 주고도 "내가 도움을 줬다 그러니 고맙지?" 하지않고 "너가 참 잘했구나" 라고 칭찬해 주는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재림후 하늘나라 들어갈때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며 면류관을 하나씩 직접 씌워주시실때 진짜 우리가 잘한줄 알고 우선 만족하고 기뻐하지만, 자기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뒤에서 피땀흘리신 그분의 사랑을 목격하고 마침내 우리가 받았던 면류관을 그의 발아래 내어 던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나의 등뒤에서 "참 잘했구나 내 사랑하는 아들아" 라고 속삭이며 기뻐하십니다.
참으로 나의 뒤에서 충분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내 앞에서가 아닌 보이지 않는 나의 등뒤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바랄때까지 기다리시며, 기회를 보시며 드디어 기회가 왔을때 사랑의 음성으로, 참으로 부드럽고, 참으로 인격적인 음성으로 조용히 속삭이십니다.
" 계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계시록이 조금은 무섭고 두려운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들린 그 음성이 오늘저녁 너무나 그립습니다.
나의 등뒤에서 나에게 자유를 주시며 언제나 내가 고개만 돌리면 그자리에 서있을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가 죄지을 때에도... 내 등뒤에 서있기위해 음침한 골짜기까지 함께 따라와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