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에 관해서 자세한 사항들은 많이들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오히려 제가 더 잘모를거예요. 그러나 제가 이해하는 데로 써보려합니다.
뜰의과정: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다.
1)번제단:입구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서면 눈앞에보이며 놋으로 만들어져있다.
번제단은 언제나 불이 있어 모든 화제의 불씨를 제공하며 번제물을
태운다(놋단안에서 하나님의 불로 희생제물이탄다-->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죄인의 죄가 사랑의 불로 태워진다)십자가예표
2)물두멍:씻음 받을 수 있다는 예표,말씀으로 씻음 받음을 의미
(말씀의 침례-자아가 죽고 진아가 깨어남)
뜰의 과정이 나는 출애굽이라 생각한다.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의힘이며,이것이 '칭의'이다. 십자가로 종되었던 곳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뜰에서의 구원을 받았다.구원을 받았는데 왜 성소 지성소가 또 남았을까?
출애굽했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였다. 그들
가야 할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였다.
성소과정:1)촛대:정금으로 만든7금촛대-7은 완전수,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므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빛이다.
(요1:9)"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으니"
세상은'나'자신이다.내삶,내 모습을 비추신다.그때 비로소 죄인임을 절감한다.
2)떡상:생명의 떡되신 예수님표상(요6:51)
빛이 비춰지면 자신이 영적기아 상태임을 알게되고 영적인 양식을 찾고 먹게
된다.
3)분향단:그리스도의 중보기도,성도들의 기도
빛을 통해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게 되면 우리는 구하게된다.찾게 된다.
두드리게된다.그것이 기도로 표현된다.
이 과정이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로 생명을 유지하고,십계명을 받은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교육하시고,십자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 십계명을 준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들이 죄의 속성과 세력으로
부터 영적자유를 누려야 할 필요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이끌어 오시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외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수 많은 전쟁들이 있었듯이,
우리도 이 성소에서 '자아'와 날마다 싸워야한다(날마다 봉사)이것이 성화의 과정
이다.
지성소:1)휘장:모든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한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
2)법궤:금(사랑)으로 만든 법궤안에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생명의 말씀을 담은예수
아론의 싹난 지팡이(죽은 나무지팡이에서 생명의 싹이-부활이신 예수님)
십계명이 담긴 두 돌판(이타적사랑이 생명원칙)이 모두가 예수님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십계명이요, 하늘에서 내린 만나도 그 분의 말씀이였고 죽은 나무에 싹을 틔우는
생명의 힘도 오직 그 분이시다.
3)속죄소:법궤 뚜껑,정금으로 만들어진 두 그룹 천사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속죄소를 바라보고 있다.-인간의 죄의 댓가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예표
지성소의 과정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십계명이든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같다.
성소에 관해서는 더 자세한 사항들과 의미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성경을 통해 각자 알 아 보시길 바란다. 나는 이것을 묵상하는 것이 단계 단계 과정과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내 삶에 무엇이냐를 놓고 알고 싶었다. 성소의 단계별 과정을 모르고도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으로 단계 단계를 밟고 있다. 성소진리를 연구하지 못했어도 우리
삶에 그것들이 적용되고 있다.
성소의 과정은 우리가 예수님께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뜰에서 예수님의 은혜로출애굽되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 가기전에 십계명을 주신 것은 당신이 준비하고 주기 원하시는 그 땅의
시민권자로 살아 가는,행복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뜻안에 하늘나라 시민권자들이다. 모두가,...
우리는 땅의 출신들이고 세상의 법을 따라 살아왔고 그 법이 내게 익숙하다.
지금도 미국시민권자들이 되기 소원하는 자들이 많지만, 미국이 지상낙원으로 생각하여
그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기위해 얼마나 소원하고 노력했는가! 그러나 처음에는 무지
고생한다고들 한다. 그래도 감수한다. 미래의 좋은 것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이 어렵고, 조건처럼 생각되는 것은 하늘 시민권자라는 것을 진정 다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의 법도 한국에 살다 미국법을 따르려면 적응될때까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우린 어렵게 시민권을 따 놓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로 우린
값없이 시민권을 받았다. 그것은 다 이루셨다. 우리가 어려운 것은 그 법이 익숙하지 않
아 연습(경건의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법을 끝까지 거부하고,하지 못할 불법만 저지
른다면 살지 못하고 나오든지, 추방을 당할 것이다.
하늘의 법도 그 법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찌 영원히 살 수있을까?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수 많은 전쟁이 있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비춰주신 빛으로 내
'죄된 자앙'를 바라보며 피를 뿌리는 아픔도 있지만,행복한 아픔의 투쟁을 해야한다.
그 분이 함께 하신다. 그 분의 촛대가,..그 분의 떡 되신 말씀이,..중보자 예수님을 힘입어
지성소를 향한다.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그 촛대가 날 비춰주기 전에, 그 떡을 직접 먹어 보기 전에,..
나는 죄인 인 줄 몰랐다.
죄인 인 줄을 모르는데 용서하셨다는 것이 뭐 그리 크게 감사한가?
우리는 그 분의 '용서하심'이 필요한 자들인데 "내가 원래 죄인이였는데, 2000년전에 예수
라는 분이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다 용서하셨대" 가 무슨 큰 힘이 되는가?
우리가 이런 크리스챤이 아닐지?...
그 분은 하늘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겠다'는 뜻을 이루셨다.
그 분은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때문에 우리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이루어 가야한다.
'독생자'를 받아 들여야한다. '독생자'는 말씀이다.
뜰은 출애굽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 성경말씀 다
주어져있다. 그러나 출애굽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듯이, 우리도 성소로 인도
되어 '죄'를 보지 못한다면 그 분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분은 그래서 자신의 선물을 주시고자 성소에서 매일 매시간마다 피 묻고 더러워진 성소
그'죄'를 보게 하신다. 비로소 그 더러운 내'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을 알게 될때, 그리고
우리의 죄'를 통회할때 우리는 구할것이다. 용서하심과 그 분의' 의'를,..
그러면 그 분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대속죄일의 모든 죄의 도말을 내 안에서 이루실 것이다.
사40:1,2)너희는 위로하라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눈에 보이는 성소를 지어 봉사하게 하신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해서 라기 보다 , 내 안에서
말씀이 구원하시고 이루시는 보이지 않는 영적구원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우리'죄인'들
에게 그 과정을 보여주시고자 함이다. 예수님 초림당시 수 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도
죄를 사하시는 그 분의 힘을 보여 주신 것과 같이,....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하는 것이 내게 하는 것이라"는 그 분은 진실로 그 작은 소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믿든 믿지안든 항상 같은'해'를 비추신다(눅6:35)
아담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지으신 그 분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눅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아니할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이것은 조건이 아니다. 아담안에서 우리가 하나 이기 때문에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이다.
상대를 위하는 것 같지만 나를 위하는 것이다. 상대의 모습속에서 '정죄'거리를 찾는 것은
내 정죄 거리를 찾는 것이요,내게 드러나지 않은 '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죄'를 보거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엎드린 것 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그'죄'는 내게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아담안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열매
를 따 먹은 존재들이다. 모세가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라면 목숨이 끊어지더라
도 하나님이 저들을 살려주시기 원했던 것은 독립적인 존재로 타인을 사랑해서라기 보다
믿음과 의리가 좋아서라기 보다,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뉠 수 없는'하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오늘 우리에게(계 3:20)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하고 애타게
부르고 계신다. 그 분은 우리 몸 밖에서 우리와 거리를 두고 문을 열어 다라고 애원하시
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내 몸 밖에 계신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그 분은 내 안에서 '자아'에게 호소
하신다. 내 사상에 의식과 무의식에 두드리신다. 그래서 그 사상이 담겨있는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이다. 문밖에 서서 두드리는 것은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고저 두드리신다.
수 많은 말씀이 성경에 있지만 받아 들여져서 삶에 하나가 되지 않는 말씀은 여전히
예수님을 문 밖에 두는 것이다.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을때 온전한 '성소'가 되는 것이다.
오히려 제가 더 잘모를거예요. 그러나 제가 이해하는 데로 써보려합니다.
뜰의과정: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다.
1)번제단:입구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서면 눈앞에보이며 놋으로 만들어져있다.
번제단은 언제나 불이 있어 모든 화제의 불씨를 제공하며 번제물을
태운다(놋단안에서 하나님의 불로 희생제물이탄다-->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죄인의 죄가 사랑의 불로 태워진다)십자가예표
2)물두멍:씻음 받을 수 있다는 예표,말씀으로 씻음 받음을 의미
(말씀의 침례-자아가 죽고 진아가 깨어남)
뜰의 과정이 나는 출애굽이라 생각한다.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의힘이며,이것이 '칭의'이다. 십자가로 종되었던 곳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뜰에서의 구원을 받았다.구원을 받았는데 왜 성소 지성소가 또 남았을까?
출애굽했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였다. 그들
가야 할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였다.
성소과정:1)촛대:정금으로 만든7금촛대-7은 완전수,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므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빛이다.
(요1:9)"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으니"
세상은'나'자신이다.내삶,내 모습을 비추신다.그때 비로소 죄인임을 절감한다.
2)떡상:생명의 떡되신 예수님표상(요6:51)
빛이 비춰지면 자신이 영적기아 상태임을 알게되고 영적인 양식을 찾고 먹게
된다.
3)분향단:그리스도의 중보기도,성도들의 기도
빛을 통해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게 되면 우리는 구하게된다.찾게 된다.
두드리게된다.그것이 기도로 표현된다.
이 과정이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로 생명을 유지하고,십계명을 받은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교육하시고,십자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 십계명을 준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들이 죄의 속성과 세력으로
부터 영적자유를 누려야 할 필요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이끌어 오시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외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수 많은 전쟁들이 있었듯이,
우리도 이 성소에서 '자아'와 날마다 싸워야한다(날마다 봉사)이것이 성화의 과정
이다.
지성소:1)휘장:모든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한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
2)법궤:금(사랑)으로 만든 법궤안에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생명의 말씀을 담은예수
아론의 싹난 지팡이(죽은 나무지팡이에서 생명의 싹이-부활이신 예수님)
십계명이 담긴 두 돌판(이타적사랑이 생명원칙)이 모두가 예수님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십계명이요, 하늘에서 내린 만나도 그 분의 말씀이였고 죽은 나무에 싹을 틔우는
생명의 힘도 오직 그 분이시다.
3)속죄소:법궤 뚜껑,정금으로 만들어진 두 그룹 천사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속죄소를 바라보고 있다.-인간의 죄의 댓가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예표
지성소의 과정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십계명이든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같다.
성소에 관해서는 더 자세한 사항들과 의미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성경을 통해 각자 알 아 보시길 바란다. 나는 이것을 묵상하는 것이 단계 단계 과정과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내 삶에 무엇이냐를 놓고 알고 싶었다. 성소의 단계별 과정을 모르고도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으로 단계 단계를 밟고 있다. 성소진리를 연구하지 못했어도 우리
삶에 그것들이 적용되고 있다.
성소의 과정은 우리가 예수님께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뜰에서 예수님의 은혜로출애굽되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 가기전에 십계명을 주신 것은 당신이 준비하고 주기 원하시는 그 땅의
시민권자로 살아 가는,행복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뜻안에 하늘나라 시민권자들이다. 모두가,...
우리는 땅의 출신들이고 세상의 법을 따라 살아왔고 그 법이 내게 익숙하다.
지금도 미국시민권자들이 되기 소원하는 자들이 많지만, 미국이 지상낙원으로 생각하여
그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기위해 얼마나 소원하고 노력했는가! 그러나 처음에는 무지
고생한다고들 한다. 그래도 감수한다. 미래의 좋은 것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이 어렵고, 조건처럼 생각되는 것은 하늘 시민권자라는 것을 진정 다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의 법도 한국에 살다 미국법을 따르려면 적응될때까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우린 어렵게 시민권을 따 놓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로 우린
값없이 시민권을 받았다. 그것은 다 이루셨다. 우리가 어려운 것은 그 법이 익숙하지 않
아 연습(경건의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법을 끝까지 거부하고,하지 못할 불법만 저지
른다면 살지 못하고 나오든지, 추방을 당할 것이다.
하늘의 법도 그 법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찌 영원히 살 수있을까?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수 많은 전쟁이 있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비춰주신 빛으로 내
'죄된 자앙'를 바라보며 피를 뿌리는 아픔도 있지만,행복한 아픔의 투쟁을 해야한다.
그 분이 함께 하신다. 그 분의 촛대가,..그 분의 떡 되신 말씀이,..중보자 예수님을 힘입어
지성소를 향한다.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그 촛대가 날 비춰주기 전에, 그 떡을 직접 먹어 보기 전에,..
나는 죄인 인 줄 몰랐다.
죄인 인 줄을 모르는데 용서하셨다는 것이 뭐 그리 크게 감사한가?
우리는 그 분의 '용서하심'이 필요한 자들인데 "내가 원래 죄인이였는데, 2000년전에 예수
라는 분이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다 용서하셨대" 가 무슨 큰 힘이 되는가?
우리가 이런 크리스챤이 아닐지?...
그 분은 하늘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겠다'는 뜻을 이루셨다.
그 분은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때문에 우리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이루어 가야한다.
'독생자'를 받아 들여야한다. '독생자'는 말씀이다.
뜰은 출애굽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 성경말씀 다
주어져있다. 그러나 출애굽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듯이, 우리도 성소로 인도
되어 '죄'를 보지 못한다면 그 분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분은 그래서 자신의 선물을 주시고자 성소에서 매일 매시간마다 피 묻고 더러워진 성소
그'죄'를 보게 하신다. 비로소 그 더러운 내'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을 알게 될때, 그리고
우리의 죄'를 통회할때 우리는 구할것이다. 용서하심과 그 분의' 의'를,..
그러면 그 분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대속죄일의 모든 죄의 도말을 내 안에서 이루실 것이다.
사40:1,2)너희는 위로하라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눈에 보이는 성소를 지어 봉사하게 하신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해서 라기 보다 , 내 안에서
말씀이 구원하시고 이루시는 보이지 않는 영적구원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우리'죄인'들
에게 그 과정을 보여주시고자 함이다. 예수님 초림당시 수 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도
죄를 사하시는 그 분의 힘을 보여 주신 것과 같이,....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하는 것이 내게 하는 것이라"는 그 분은 진실로 그 작은 소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믿든 믿지안든 항상 같은'해'를 비추신다(눅6:35)
아담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지으신 그 분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눅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아니할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이것은 조건이 아니다. 아담안에서 우리가 하나 이기 때문에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이다.
상대를 위하는 것 같지만 나를 위하는 것이다. 상대의 모습속에서 '정죄'거리를 찾는 것은
내 정죄 거리를 찾는 것이요,내게 드러나지 않은 '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죄'를 보거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엎드린 것 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그'죄'는 내게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아담안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열매
를 따 먹은 존재들이다. 모세가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라면 목숨이 끊어지더라
도 하나님이 저들을 살려주시기 원했던 것은 독립적인 존재로 타인을 사랑해서라기 보다
믿음과 의리가 좋아서라기 보다,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뉠 수 없는'하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오늘 우리에게(계 3:20)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하고 애타게
부르고 계신다. 그 분은 우리 몸 밖에서 우리와 거리를 두고 문을 열어 다라고 애원하시
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내 몸 밖에 계신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그 분은 내 안에서 '자아'에게 호소
하신다. 내 사상에 의식과 무의식에 두드리신다. 그래서 그 사상이 담겨있는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이다. 문밖에 서서 두드리는 것은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고저 두드리신다.
수 많은 말씀이 성경에 있지만 받아 들여져서 삶에 하나가 되지 않는 말씀은 여전히
예수님을 문 밖에 두는 것이다.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을때 온전한 '성소'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