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우울증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만, 법적으로만 용서를 하고는 진정한 용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억울한 마음, 증오하는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용서는 단순히 도덕적인, 법적인 용서에 불과한 것이다. 용서를 하기 싫은 경우나 또는 도덕적 법적 용서만을 했을 경우에는 우리 자신의 몸속이나 마음속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법적으로 고소하지 않고 참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이런 경우에는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감을 맛보지는 못하고 오히려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어 있다. 도덕적, 법적용서는 아무런 내적변화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괴롭고, 더 억울하게 느껴지게 된다. 이렇게 우울증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용서는 진정한 용서이다. 진정한 용서는 영적인 용서인 것이다. 영적인 용서를 하면 그 용서의 과정을 통하여 나 자신 속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 속에 변화가 일어나야만 나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변화는 놀라운 변화인 것이다. 그 내적변화란 과연 어떤 변화일까?
인간의 뇌 속에서는 어떤 깊은 인상을 남기는 상황을 체험하게 되면 그 상황 속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뇌 속에서 뇌신경세포들의 연결로 이루어지는 조건반사 회로를 형성하게 된다. 맥도날드 햄버그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서 너무나 심한 복통을 체험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맥도날드 간판만 보아도 배탈이 나는 것과 같은 조건반사 회로가 형성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나의 신뢰를 배반하고 나에게 심한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이나 모습 등, 그 사람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시 접하게 될 때에 배반당했을 그 당시에 체험했던 유사한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전에는 그 사람을 만나면 그동안 서로 나누어 온 신뢰와 사랑으로 반갑고 기쁜 마음을 느꼈지만 배신을 당한 후에는 분하고 억울하며 증오심만 느끼게 되는 현상이다. 이것은 결국 엔도르핀을 생산하게 하는 뇌의 본래의 조건반사 회로가 배신감으로 인하여 변하여 아드레날린이나 스트레스 호르몬의 생산 회로로 변한 것이다. 악한 배신은 악한 사망적인 조건반사 회로를 형성하고 사랑은 생명적인 조건반사 회로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증이란 나 자신이 이러한 사망적인 조건반사 회로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는 정신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러한 사망적 조건반사 회로가 변화하여 생명적 조건반사 회로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뇌세포의 회로를 형성하기 위하여 뇌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되는 현상을 시넾스(Synapse)라고 부른다. 이 시넾스를 형성하는 것도 뇌세포에 입력된 시넾스 형성 유전자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랑이나 선은 이 시넾스 유전자를 작동시키어 생명적 시넾스를 형성하게 하고, 그 반면 악은 사망적 시넾스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선이나 악은 뇌세포의 시넾스 형성 유전자를 작동시키는 에너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은 악의 세력에 의하여 너무나 많은 사망적 시넾스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에 우리들은 증오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더구나 나의 잘못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배신을 당하고 물질적인 손해까지 입혔을 때에 그 상처를 고스란히 당하고도 또 아무런 대가도 지불 받지 못하고 그냥 용서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너무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용서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억울하며 고통스럽게 여겨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많은 경우에서는 손해배상을 받고나서도 마음속으로는 용서할 수가 없는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대가를 받지도 못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간은 억울함과 고통스러움을 극복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극복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 기도를 통하여 마침내 용서를 하고 싶어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증오의 고통이 너무나 격심하기 때문이다. 이 증오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용서를 할 수가 없다. 증오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증오가 사망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는 너무나 어렵다. 그 이유는 용서란 억울하며 손해 보는 것이라는 오해 때문이다. 사망적 시넾스를 생명적인 시넾스로 바꾸는 것은 인간 스스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영적 용서를 할 수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낼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용서는 자신을 ‘증오’라는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생명력,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려서 그 사랑이 자신의 뇌 속에 형성된 사망적 시넾스가 생명적 시넾스로 회복되었을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기쁨을 실재로 체험하는 것이다. 갈증으로 죽어가던 사람이 생수를 마시는 기쁨이 곧 이러한 용서의 기쁨이다. 이런 대가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가이며 물질적 대가가 아닌 영적인 선물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은 물질이나 금전적인 대가보다 생명이 중요한 사람들만이 선택하는 선물이다.
우울증은 자기는 용서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영적용서를 해보지 못했을 경우에 생기게 되고 악화하게 된다. 우울증은 자신의 잘못은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많이 생긴다. 진정한 영적용서의 체험이 없이는 진정한 우울증의 치유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용서는 사망의 어둠이 가득한 뇌세포 속에 생명의 빛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우울증은 뇌세포에서 엔도르핀과 세로토닌 등의 뇌신경신호전달물질들이 원활히 생산되지 못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물질들을 생산하는 프로그램인 유전자들이 뇌세포 속에 입력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우울증이란 이러한 신경전달물질들을 생산하는 유전자들의 기능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현대의학의 우울증치료법 중에서 가장 오래된 방법이 전기쇼크방법이었다. 환자의 뇌에 강력한 전류를 통하면 일시적인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슨 이유로 전기쇼크가 왜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磁場을 이용한 “磁氣 치료법”이 개발되었다. 우울증환자의 뇌에 자기를 통하면 뇌세포에 전류가 흐르게 되고 이 전류는 뇌세포 속에 입력되어 있는 유전자를 활성화시켜서 신경전달물질들을 생산하게 하여 우울증이 놀랍게 회복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전기쇼크나 자기치료가 아니라도 인간이 기쁜 소식을 듣거나, 진리를 깨닫거나, 선을 베풀거나 또는 아름다움을 느끼면 뇌신경세포에 새로운 전류가 흐르게 되고 그 전류가 신경전달물질 생산유전자들을 활성화시키어 엔도르핀과 세로토닌 등을 생산하게 된다. 眞善美는 유전자를 활성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眞善美는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은 창조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시넾스를 변화시키어 영적용서를 이루고 이 영적용서는 인간을 우울증으로부터 해방시키어 다시 태어나게 한다. 우울증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용서를 체험하여 인간인 나 자신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불가능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성공적인 영적용서로 우울증을 정복하는 체험을 위해서는 꼭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울증은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흔히 상대방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고 원망한다. 이것은 스스로가 스트레스를 받아드리기로 선택한 것을 은폐하게 하는 사단의 기만에 빠진 것이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드린 것은 나의 잘못된 선택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새로운 선택을 하여야 한다. 나와 상대방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진정한 영적용서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원칙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
1, 용서는 상대방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2, 용서는 상대방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조건 없이 해야 한다.
3, 용서는 스스로는 할 수 없고 기도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