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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0개월을 성실히 생활해온 듯 생각되는데, 아직도 너무 무지한 제 자신에 실망을 하게 됩니다. 처음 몇 개월간은 와~내가 이런 것을 알다니'뭔가 된 줄로 알았건만  뒤돌아보니  제자리걸음인 거 같네요.  제 삶이 변하기위해서는  그 품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식, 더 완전한 이해, 더 완벽한 무언가를 알고 노력해야 한다고 믿고 고전을 해 온 거 같습니다.


답: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이유는 명원님께서 “뭔가 된 줄로” 느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명원님께서 “박사님, 저는 많이 발전한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죠!”라고 말했다면, 저는 생각하기를, “아, 명원님이 속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자기의 부족함을 보고 실망만 하고 있다는 것은 자존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감사 없는 실망은 교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완전한 사람으로 속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습니다, 옛날에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부족함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마침내 바울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자기는 절대로 가망이 없는 존재임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엘렌 화잇도,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 자신이 더 죄인임을 알게 된다. 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셔야지요!, 실망,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만 절망을 감사할 수 있지요. 이것이 복이구요!


진리는 단순한 거라 했고 그것을 확신하며  기대하고 그 간단한 생명생활법칙을 정리하려 애썼는데 참으로 어렵네요.  한 가지를 겨우 넘으면  더 커다란 미로가 사단의 등장으로 또 지체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끈질긴 건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 의지가 꺽기지 않고  포기하고 싶지 않는 것은 그 보다 더 끈질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답: 아멘, 당연한 사단의 방해지요! 더 심해질 것이라고 예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연습을 하는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사단의 비웃음, “네가 예수를 믿는다고?, 너 꼴을 봐!, 네 꼴을!”에 넘어지지 마십시오.

저는 생명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품성을 믿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섭리는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 가가 있지  이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를 전제합니다.


답: 물론이지요, 지속적인 성장의 길을 가셔야지요!, 그 길은 자신의 죄 된 성향을 부인해가는 투쟁의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는 것은 투쟁을 선택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투쟁은 절대로 혼자하시면 패배하는 투쟁입니다. 전쟁의 하나님께 나의 투쟁을 그분에게 맡기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투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투쟁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바보 같은 질문이겠으나


답: 똑똑한 척 하시는 것, 혹시 아닙니까? 너무 자존심에 상처 받지 마세요. 그냥 바보가 되세요. 이 정도의 말은 소화하실 수 있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 교회생활을 시작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어 기쁜 것도 있으나  알면 알수록 솔직히 말씀드리면, 은혜아래 있는 것이 분명한데, 자꾸 율법아래 있는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답: 온 죄의 세상은 율법주의 사상에 완전히 세뇌된 세상이고 모든 사람이 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매님이나 저나 매 일반이지요, 진리를 알아서 이 세뇌 상태를 벗어나 은혜 속에서 자유 하게 되어가는 과정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믿음의 생활이지요.

우리의 뇌 속에 시넾스(뇌신경의 연결)가 이미 그렇게 율법주의적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지식으로는 알아도 매사에 반응할 때에는 결국 율법주의적인 조건반사기 나와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치 아나하는 것은 하고 있구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롬7:15-18)

이 시넾스의 변화가 올 때에 진정한 성화가 있지요. 그러나 시넾스는 유전자의 조절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의 몫이지요.

감사하며, 기도로 맡기는 투쟁은 우리의 몫이지요.


제게는 모든 것이 가하나~가  정말 어려운 구절중 하나입니다.  이것에 대해 명쾌하게 초보 신자를 가르쳐주세요.
전 율법이 맹인인 나를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목소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얼마 전에 깨달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안다면  율법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저는 너무나 약합니다.  완벽할 자신도 전혀 없습니다. 허나 합리화나 정당화를 시키며
맘 편하기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정도로 걸어가고 싶고  나의 실수나 넘어짐에도
너그럽기는 바랍니다.


답: 율법이 명령으로 기록되었으나 약속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율법 속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율법이 사랑임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율법이 사랑인줄을 알게 될 때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사랑을 “받아드리는 것”임을 깨닫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명령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세뇌 되어 있지요. 투쟁해야지요, 맡기셔야지요!

유명한 분이 이런 말씀한 걸 들었는데, 한 가지밖에 모르던 사람이 그 한 가지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때 구원이다. 70가지를 아는 사람이 60가지 온전한 순종을 했다 해도 10가지를 그 분께 드리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구원이라 말해줄 수 없다.'
두 가지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 없는 무서운 율법주의
또 하나는. 적당한 타협은 나를 결국 멸망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메세지!
제가 바라는 것은  넘어지지만  그래도 아주 넘어지지 않고  하늘을 바라볼 때는  언제나
실오라기 같은 끈이라도 주님께 연결되어있다면  나는 주의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죠.


답: 그 유명하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신 진의를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님께서 그분의 말씀 때문에 또 율법주의적인 죄 된 본능을 자극시켜서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면, 님께서 그분의 뜻을 잘 못 이해하셨거나 아니면 그분이 잘 못 말씀하셨을 수도 있겠지요.

너무 유명하신 분들을 의존하시지 마십시오.

이 거짓의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것은 위험천만입니다. 저 자신부터도요. 왜냐하면 거짓 속에서 유명하면 유명하지 않은 것보다 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진리로는 유명해지기 힙듭니다. 사울은 유명했었지요, 그 후에 바울이 되고 나니 옛날의 유명세는 없어져버리고 곤장이나 맞고 살게 되었지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사망의 길로 지금 다니고 있지만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내 죄 된 습성이 그 길로 인도할 때-주저앉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화하지 않는 한)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초보와 연륜은 무시 못 할 것임을 느낍니다.  누구나 한번은 이 길에서 서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답: 아멘입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죄의 “조건반사”라는 것,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안다고 극복되는 것은 아니지요.

결국 성령의 능력이 오셔야 하고, 나는 그것을 받아야 변화가 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간구해 놓고서도 오시면 받지 않는 죄인들입니다. 받지는 않고서는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아우성치지요.

그래도 귀엽게 보아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망의 사각으로 가지 않고 정도로 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이 가하나~ 를  다시 이야기해주세요


답: 율법주의적인 시각으로 혼란이 생겨서 또 질문하시는 것 같군요. 다시 설명드리지요.


우선 다음의 말씀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 의 사랑, 그 품성부터 이해하시고 그 다음 글을 읽어주십시오.


“열매가 없어도 열매 맺게 하리라”가 주제입니다.

그리고 “약한 것을 자랑할 수 있는 믿음” “약할 때에 기뻐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합3:17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합3:19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학2:19]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슥8:12]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아멘!


“모든 것이 가하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로 치우친 결론:

“모든 허락하신 것만이 합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허락하지 않는 것은 불법이다.”

예배에는 정숙과 경건만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이것만이 합법이다. 그러므로 박수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이다.(치우친 보수주의)


좌로 치우친 결론:

금하신 모든 것만이 불법이다. 그러므로 금하지 않은 모든 것은 합법이다.

예: 돼지고기는 금했기 때문에 불법이다. 그러나 다른 육식은 금하지 않았음으로 합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기를 먹는다.(치우친 자유주의)


이러한 좌로 치우친 신앙은 역시 ‘치우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한 ‘치우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좌로 치우친 자기의 신앙을 합리화하는 잘못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그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죄의 유혹을 이기고 잘못된 입맛을 인내하고 건강식을 하여 건강해지며 더 나아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드려서 진정한 생명적 변화(성화)를 이루어나가는 기쁨을 맛보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을 때에 그 유혹을 받아드리고 싶어 하는 자신의 죄 된 성향과 투쟁하기보다는 그 유혹에 굴복해버린 것을 오히려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라고 합리화하며 자기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부터 주어지는 자유를 오히려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갈5: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하나님의 남은 교회의 정체성상실은 계명과 율법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품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좌나 우로 치우치게 율법을 보게 되므로 일어난 현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그리스도의 품성의 사본으로, 살리는 율법으로 보지 않고, 무엇을 금하셨나, 무엇을 허락하셨나를 나타내는 율법으로 본 것이 정체성 상실의 치명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좌는 우를, 우는 좌를 공격하며 논란하는 가운데 정체성은 완전히 허물어져버리고 혼란이 찾아오면서 마침내 큰 흔들림이 오고야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금하시는 분, 허락하시는 분, 무서운 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품성인 절대적인 사랑은 알지 못하고 율법을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그분의 품성의 오해로부터 시작합니다. 루스벨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품성의 오해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루스벨은 하나님의 능력은 원했으나 그의 품성은 원하지 않았다.(소망 435)


그러나 진정한 율법의 의는 그 율법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곧 그분의 품성인 사랑을 율법으로부터 발견하여 삶에 적용하는 의이지요.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사랑)의 사본이니까요.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것이 가하나---”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 육식도 가했습니다. 하나님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면 고기를 먹는 것도 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기를 먹는 것이 덕이 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초 신자를 실족시키는 경우라면 영원히 먹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지요. 그는 육식을 즐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채식가이지요.


[롬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믿음이 있지만 연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느니라.


이 말씀에서, “아! 믿음만 좋다면 고기를 먹어도 상관이 없구나!”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의 결과입니다.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또 이 말씀에서, “아!, 사도 바울도 고기를 먹긴 먹었구나, 그렇다면 나도 먹어도 상관이 없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면 이것도 미성숙한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해도 된다고 허락하셨기 때문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올바른 신앙이 아니지요. 이혼을 허락했다고 해서 이혼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도 사랑을 선택하는 신앙이 아니지요. 배우자가 간음을 했기 때문에 이혼할 수 있다는 신앙도 사랑을 선택하는 신앙은 아니지요.

“나는 내 아내가 간음했기 때문에 그 간음한 아내와 이혼했다. 그러므로 나는 의롭다.”라고 생각하는 남편과 같은 사람들 가끔 있지요. 이러한 남편들이 바로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는 율법의 글자대로 정죄의 돌, 심판의 돌, 곧 사망의 돌을 든 사람들이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돌은 용서의 돌, 구원의 돌, 생명의 돌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생명의 돌이십니다.


참으로 그들의 손에 쥐어진 돌은 사망의 돌이었습니다. 생명의 돌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그들이 지킨 율법은 사랑과 생명이 나타난 그리스도의 품성의 사본으로서의 율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율법은 도리어 증오와 분노, 정죄와 사망의 사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돌로 치라는 율법 속에 있는 그 율법의 저자이신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지요. 따라서 그분이 주시는 생명도 알지 못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하지 않으며 정죄를 받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없느냐?” 여인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을 폐하시거나 범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율법의 진정한 의를 들어내어 보여주시어 그 율법의 진정한 의를 도리어 굳게 세우시는 순간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롬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여기에 두 다른 의로움이 나타난 것입니다.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생명을 주시는 의로우심,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그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며 사망을 주는 바리세인들의 표면적 율법의 의로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누구의 의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의입니까?

하나님께서 간음한 다윗을 용서하셨다고 해서 간음을 합법화하시거나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또 간음한 경우에는 반드시 정죄를 받아 돌로 쳐 죽임을 받아 죽어야 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돌로 치라는 율법을 범하시거나 폐하신 것도 아닌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만지지 말라는 율법을 주신 분이 문둥병자를 생명을 주셔서 치유하시기 위하여 친히 만지시는 것이 그분 스스로가 그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죽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의는 좌로 치우친 것도 아니며 우로 치우친 것도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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