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트로 불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들을 직접 만났고 이상구 박사 뉴스타트
사이트의 회복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의 글을 읽은 후인 2008년의 나는 2001년에 작성했던 아래 글로부터 유추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비극감으로 삶의 경이로움을 절절하게 느끼면 병에 걸린 사람들이 질병을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과 고통에 대한 자각이 가장 강력한 삶에의 자극의 하나가 되고 인류의 연대성의 기초가 되고, 또한 환희나 정열이 격렬함과 깊이를 갖기 위해 불가결한 경험이 된다.......
내가 특히 거론하고 싶은 금기가 된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의 억압은 성격의 근본인 비극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극감이다. 죽음의 의식과 삶의 비극적인 측면의 자각은 그것이 희미하든 또는 뚜렷하든 인간의 기본적 성격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에리히 프롬의 글귀가 5년 전부터 뇌졸중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자리에 누워서만 지내는 나보다 4살 더 많은 여자 환자를 비롯하여 다리가 오그라져 걸을 수 없는 환자들을 방문하여 진료하고 돌아온 날 떠올랐다. 환자들은 주로 노인 여성들이었다.
동시에 나의 건강한 삶을 경이롭게 느꼈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으며 순간마다의 삶을 더욱 더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주로 방 한칸인 환자들의 초라한 집에서 돌아와 본 보건소 건물은 무척 훌륭하고 아름답게 보였으며 그렇게 어려운 환자들을 방문해 무료로 진료, 간호해주고 약을 나누어 주는 보건소 조직은 평소엔 희미하게 생각했던 우리 사회의 오아시스라는 생각을 더 강하게 했다.
자녀가 있는 노인 여성 환자에게 자녀에게 가지 않고 혼자 사는 이유를 물어보니 자식들이 어렵게 살고 있어 정부에서 주는 18만원의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돈이 끊어지면 안 되니 갈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자녀들이 가끔 한 번씩 방문온다고 했다.
거동이 많이 불편한 노인은 구청에서 도우미 아줌마가 나와 목욕시켜 주고 이발 기계로 머리를 잘라주는데 그 전에는 자신을 업고 미장원까지 갔다고 했다.
밥은 복지관에서 도시락을 가져다 주는데 그것을 조금씩 덜어서 방안에 있는 야외용 부탄 가스 레인지에 데워 먹는데 그것도 힘들다고 숨이 차서 말했다.
도우미는 아무 때나 와서 일을 마치고 금방 간다고 했는데 한 도우미가 여러 명의 노인을 돌보기 때문에 다른 노인을 돌보러 가는 것이라고 동행했던 직원이 말했다.
보건소에 근무한 후 처음 방문진료를 나가 삶의 비극적적인 면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이런 정도의 사회복지라도 할 수 있다는 것과 나도 이런 인간적인 일에 동참할 수 있어 기쁘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아래와 같은 꿈을 그 날 밤 꾸었다.
1976년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전주예수병원의 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외과의사 Dr. Seal이 보건소의 원장이고 현재 보건소의 원장은 그 가족이며 나는 보건소 직원으로서 함께 일하는 꿈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천주교에 다녔는데 초등학생 때 '사람은 자신을 구하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느니라'라고 배웠던 교리가 가슴 속에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드물지만 성모의 꿈을 꿀 때가 있는데 최근의 것은 내 소유물인 성모 조각상을 잃었다가 되찾은 꿈이었다.
세례받은 교인만 들어갈 수 있는 예수병원에는 천주교에서 받은 영세를 교회의 세례로 어느 목사가 인정해주어 들어갔다. 그 곳에서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교에 관심을 갖다보니 가정적인 어려움이 많이 생겼다.
그러다 '사랑의 기술'을 비롯한 에리히 프롬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현대사회를 잘 분석한 프롬의 책이 성경보다 내게 더 빛이 되었다. 프롬이 저서에서 불교에 대해 아주 좋게 쓴 것을 읽고 불경을 읽게 됐는데 성경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내용이 불경에도 표현만 다를 뿐 시적으로 아름답게 기술된 것을 보고 인류의 지혜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예수병원을 떠나면서 나는 Dr. Seal에게 불경도 성경처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게 됐는데 성경의 야고보서에 있는 것처럼 실천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예수병원과 기독교를 떠나도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도록 노력하겠고 Dr. Seal은 내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 후 내가 속했던 과의 과장으로부터 Dr. Seal이 나에 대해 호의적인 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한번도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보건소에 근무한 후에 두번이나 꿈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현재 은퇴해 미국으로 갔는데 그는 내 꿈에서 예전의 모습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하고 있거나 불교의 좋은 점이 정신분석과 일치하는 점을 잘 기술한 이동식박사, 그리고 나와 함께 꿈을 다루는 병원같은 아름다운 건물을 경치좋은 곳에 지어놓고 내 남편도 함께 참석해 외우는 노래같은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나는 꿈이 환희와 비극의 감정을 단편적이지만 생생하게 느끼게 하여 우리가 삶을 더욱 더 진지하게 살아가게 하는 작용도 한다고 믿는다.
참고: 이 글을 쓴 몇 년 후에 Dr. Seal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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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의 회복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의 글을 읽은 후인 2008년의 나는 2001년에 작성했던 아래 글로부터 유추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비극감으로 삶의 경이로움을 절절하게 느끼면 병에 걸린 사람들이 질병을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과 고통에 대한 자각이 가장 강력한 삶에의 자극의 하나가 되고 인류의 연대성의 기초가 되고, 또한 환희나 정열이 격렬함과 깊이를 갖기 위해 불가결한 경험이 된다.......
내가 특히 거론하고 싶은 금기가 된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의 억압은 성격의 근본인 비극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극감이다. 죽음의 의식과 삶의 비극적인 측면의 자각은 그것이 희미하든 또는 뚜렷하든 인간의 기본적 성격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에리히 프롬의 글귀가 5년 전부터 뇌졸중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자리에 누워서만 지내는 나보다 4살 더 많은 여자 환자를 비롯하여 다리가 오그라져 걸을 수 없는 환자들을 방문하여 진료하고 돌아온 날 떠올랐다. 환자들은 주로 노인 여성들이었다.
동시에 나의 건강한 삶을 경이롭게 느꼈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으며 순간마다의 삶을 더욱 더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주로 방 한칸인 환자들의 초라한 집에서 돌아와 본 보건소 건물은 무척 훌륭하고 아름답게 보였으며 그렇게 어려운 환자들을 방문해 무료로 진료, 간호해주고 약을 나누어 주는 보건소 조직은 평소엔 희미하게 생각했던 우리 사회의 오아시스라는 생각을 더 강하게 했다.
자녀가 있는 노인 여성 환자에게 자녀에게 가지 않고 혼자 사는 이유를 물어보니 자식들이 어렵게 살고 있어 정부에서 주는 18만원의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돈이 끊어지면 안 되니 갈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자녀들이 가끔 한 번씩 방문온다고 했다.
거동이 많이 불편한 노인은 구청에서 도우미 아줌마가 나와 목욕시켜 주고 이발 기계로 머리를 잘라주는데 그 전에는 자신을 업고 미장원까지 갔다고 했다.
밥은 복지관에서 도시락을 가져다 주는데 그것을 조금씩 덜어서 방안에 있는 야외용 부탄 가스 레인지에 데워 먹는데 그것도 힘들다고 숨이 차서 말했다.
도우미는 아무 때나 와서 일을 마치고 금방 간다고 했는데 한 도우미가 여러 명의 노인을 돌보기 때문에 다른 노인을 돌보러 가는 것이라고 동행했던 직원이 말했다.
보건소에 근무한 후 처음 방문진료를 나가 삶의 비극적적인 면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이런 정도의 사회복지라도 할 수 있다는 것과 나도 이런 인간적인 일에 동참할 수 있어 기쁘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아래와 같은 꿈을 그 날 밤 꾸었다.
1976년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전주예수병원의 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외과의사 Dr. Seal이 보건소의 원장이고 현재 보건소의 원장은 그 가족이며 나는 보건소 직원으로서 함께 일하는 꿈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천주교에 다녔는데 초등학생 때 '사람은 자신을 구하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느니라'라고 배웠던 교리가 가슴 속에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드물지만 성모의 꿈을 꿀 때가 있는데 최근의 것은 내 소유물인 성모 조각상을 잃었다가 되찾은 꿈이었다.
세례받은 교인만 들어갈 수 있는 예수병원에는 천주교에서 받은 영세를 교회의 세례로 어느 목사가 인정해주어 들어갔다. 그 곳에서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교에 관심을 갖다보니 가정적인 어려움이 많이 생겼다.
그러다 '사랑의 기술'을 비롯한 에리히 프롬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현대사회를 잘 분석한 프롬의 책이 성경보다 내게 더 빛이 되었다. 프롬이 저서에서 불교에 대해 아주 좋게 쓴 것을 읽고 불경을 읽게 됐는데 성경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내용이 불경에도 표현만 다를 뿐 시적으로 아름답게 기술된 것을 보고 인류의 지혜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예수병원을 떠나면서 나는 Dr. Seal에게 불경도 성경처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게 됐는데 성경의 야고보서에 있는 것처럼 실천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예수병원과 기독교를 떠나도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도록 노력하겠고 Dr. Seal은 내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 후 내가 속했던 과의 과장으로부터 Dr. Seal이 나에 대해 호의적인 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한번도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보건소에 근무한 후에 두번이나 꿈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현재 은퇴해 미국으로 갔는데 그는 내 꿈에서 예전의 모습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하고 있거나 불교의 좋은 점이 정신분석과 일치하는 점을 잘 기술한 이동식박사, 그리고 나와 함께 꿈을 다루는 병원같은 아름다운 건물을 경치좋은 곳에 지어놓고 내 남편도 함께 참석해 외우는 노래같은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나는 꿈이 환희와 비극의 감정을 단편적이지만 생생하게 느끼게 하여 우리가 삶을 더욱 더 진지하게 살아가게 하는 작용도 한다고 믿는다.
참고: 이 글을 쓴 몇 년 후에 Dr. Seal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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