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을 원합니다.
작년부터 모든 부분에서
단연 최고 화두는 힐링(healing)이다.
방송에도 힐링캠프가 유행이고
학교에서도 힐링캠프를 운영하고
시에서는 힐링 로드까지 만들었고
절에서는 ‘템플스테이, 힐링캠프’를 진행할 정도다.
어딜 가나
힐링을 빼놓고는 대화가
안 될 정도로
힐링은 이 시대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나는 지금의 힐링 바람을 보면서
갑자기 10년 전
선풍적 인기가 있었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생각났었다.
책의 요지는 간단했다.
’긍정적인 착각‘을 하라는 거였다.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반드시 밝은 내일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으면
생각은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긍정적 착각을 했건만
이상하게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소수는 그런 착각을 하지 않았음에도
꿈은 현실화되었지만
보통 사람들은
긍정적 사고의 한계만을 더 뼈저리게
느꼈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러한 <긍정>의 언덕을 넘어
<웰빙>바람은
더 세차게 오래토록 불어왔다.
음식도 운동도 프로그램도
옷과 인생이
전부 다 웰빙 판 세상이 되었다.
먹고살기 힘든 때가 지나니
조금 덜 힘들고
조금 더 잘 살고
조금 더 신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으리라.
<긍정의 힘>이 건강한 사고라면
<웰빙>은 건강한 삶의 모습이었다.
우리 삶의 바탕이
더욱 팍팍해 지면서
건강한 몸과 마음 그리고 건강한
삶의 형태를 추구하는
전인적 인생은
너무나 필연적인 하나의 과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먹는 문제를 지나
경제지상주의가 지배적인
사회가 되면서
현대인들은 성취와 욕망의
극대화로부터
지치고 지쳐
이제 돈도 좋지만
인생의 여유과
영혼의 자유를 갖길 원하면서
<웰빙>은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일부로
자리를 잡아갔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되었다.
좋은 것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잘 입고 여행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 사회는
<웰빙>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용납해 주지 않았던 것은
겉은 멀쩡하고 멋있는데
마음 깊은 속에서는 아파 죽겠는데
어찌하겠는가.
몸에 상처가 나면
꿰매면 되지만
마음이 베이고 찔리면서
신음소리가 나고
영혼의 공허함은
세상 무엇으로 메꾸어도 채울 길이
없어지자,
웰빙으론 어림도 없다면서
힐링을 외치기 시작했다.
힐링 음악,
힐링 음식,
힐링 여행이 나오더니
이젠 힐링 유아법까지
생겨나고 있다.
내 몸을 고치기 위해서는
스스로도 어느 정도
길이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심령을 회복하기 위해선
자신만의 힘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여기 저기
전문가를 찾아 나서고 있다.
하지만 힐링은
웰빙보다
한 단계 진화된 개념이기에
인간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증세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않고는
흠집만 내고
힐링이라는 허울만 있을 뿐
영혼의 자유란 결단코 있을 수 없다.
예견하건데
긍정의 힘이 지나갔고
웰빙의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듯,
힐링 역시
소리만 낼 뿐 더 큰 상처로
깊어만 갈 것이다.
웰빙 속에서도
힐링 속에서도
사회적
폭력은 사라지지 않고
우울증과
자살률은 왜 더 늘어만 간단 말인가.
애초부터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타인과 사회를 떠나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삶을 치유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안고 출발한 것이 문제였다.
진정한 힐링은
음악이나 여러 프로그램 이전에
나를 바로 아는
자아성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아는 일은
우주에서 작은 별을 찾는
일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자아는 언제나
이성, 감정, 또 다른 자아와
충돌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자아성찰의 가능성을 보았다.
멈춘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아에 속하는
자기 경험과 자극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태도와
객관적인 자세를 가질 때
세상이 보이고
이웃의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
물론
객관성의 안경을 쓰려면
주변의 피드백을
확인해보면
훨씬 쉽게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을 볼 수 있다면
비로써 내 삶의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감정의 패턴,
사고의 패턴,
대인관계의 패턴 등
내 내면을 알고
내 패턴을 알면 어떤 병이든
근본적으로 힐링이 가능하게 된다.
자아성찰을 통해
힐링의 문제점을 발견했다면,
이제 힐링 안으로
이미 들어와 있는 셈이다.
내가 어디가 아프다면
먼저 아픈 요인을 바로 파악해야 하고,
찾았으면 이제 수술해야만
살 수가 있다.
배운다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라는
겸손에서 시작했다면,
회복하는 것은
‘나의 자아를 죽이는 것’이라는
자기부인에서 출발한다.
자아성찰로 만족해선 안 된다.
마음 훈련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아성찰의 다음 단계는
킬링이다.
‘죽어야 산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이런 종류의 격언의 핵심은
힐링(healing)은
킬링(killing)이라는 것이다.
3년 전부터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책의 내용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청춘에 아픈 것은 당연한데,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다.
참으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과연
무작정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올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달콤한
힐링이 아니라
자아를 바로 알았다면
킬링이 필요하다.
힐링과 킬링은 한 끗 차이다.
힐링을 원했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킬링이 될 때가 있고,
처음부터
킬링하려고 했더니
죽기는커녕 힐링이 되었다는 경험은
남의 애기가 아니다.
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킬링하기로 작정했다면
아픈 것이나
인내 하는 일은 일도 아니다.
살려고만 하지 말고
킬링하려고 마음먹으면
힐링도
콜링도 다 이루어진다.
주여,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적적한지
얼마나 겁이 나는지
모두가
힐링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값싼
힐링 앞에 무릎 꿇고
더 깊은 심연의
바다에 빠져
세상과
하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주여,
저도
힐링이 필요합니다.
나를 바로 알고
이제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내 발로 킬링의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