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법 . 신정자 <위마35기>
목이 돌아가는 이상한 병, 그 사망의 무서운 늪에서
나의 병명은 ‘신경성근육경직증’이라는 희귀한 병이었고, 직업은 건축 설계사로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3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 밀려오는 업무들로 바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1994년 9월 어느 날,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머리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더욱 기이한 일은 흔들리는데 그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왼쪽방향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억지로 돌려놓으면 다시 돌아가곤 하는 것이 내 질병의 초기 증세였다.
서울의 S의료원을 찾아 진찰을 받아보니 ‘신경성근육경직증’이라는 희귀한 병명을 얻게 되었다. 또 다른 S대학병원에서는 일명, 좧사경(斜徑)좩이라는 병명으로 진단을 내렸다.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병적으로 구부러져서 잘 펴지지 않는 목, 또는 그런 병증”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답답한 일은 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치료 방법이 없었다. 신경 안정제를 처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약을 복용하면 증세가 완화되기는커녕 온 몸이 가라 앉으며 기억력이 감퇴되는 현상이 눈에 띄게 일어나곤 하였다. 그 후로는 처방 받았던 병원 약을 중단하고 양방, 한방, 민방, 물리치료, 기(氣)치료 등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치료를 간구 해 보았다. 명의(名醫)와 명약(名藥)을 찾아다니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다 지쳤고 아내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나 자신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를 간호하며 지켜보는 아내의 마음은 더욱 답답하고 힘이 들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동안 희망과 절망이 늘 교차하며 나를 혼란 속으로 빠지게 하였다.
뱀(巳)의 독극물 주사가 불러들인 부작용
그렇게 절망의 시간들을 보내던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의사선생님의 소개로 한국에는 치료약이 없지만 미국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귀가 번쩍 열렸다. 미국? 치료약이 있다면 미국이 아니라 지구 끝까지라도 가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미국 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이리 저리 수소문(搜所聞) 끝에 스탠포드대학 메디칼 센터에서 이러한 병에 대한 특효약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같다.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고 주사를 맞게 되었다. 주사약은 뱀의 독극물을 채취하여 만든 특수한 약으로 근육을 이완시켜 주는 치료제라는 것이다. 치료 방법으로는 목의 근육이 경직되었으니 목에다 주사해야 하는데 3개월 간격으로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20cc 한 병을 다 맞고 당시는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한 채 물리치료와 ‘카이로프라틱'이라는 치료도 병행하게 되었다. 일주일 후 다시 오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다시 병원을 방문했더니 아무런 차도를 느끼지 못했다는 나의 말에 담당 의사는 2배의 약물을 주사하자는 제의를 해 왔다. 의사의 제안대로 40cc의 약물을 다시 투여해 보았지만 그래도 목이 돌아가는 현상은 여전했다. 그래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나을 수 있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귀국한 후에 다행히 한국에도 그 약이 수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수입되는 대로 그 약을 맞아 보자는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餘地)도 없이 그 약물에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1995년 12월 수입된 약으로 다시 주사하며 치료를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이번에는 더욱 양을 많이 늘여서 맞아야 한다며 미국에서보다도 훨씬 많은 양을 주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무식한 처방이었다. 병원에서는 3개월에 한 번씩 투약할 것을 권했다.
주사를 맞은 후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하여 기쁜 마음이 있었는데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목이 돌아가는 증세는 없어진 듯 했지만 갓난아기처럼 목을 전혀 가눌 수 가 없는 것이었다. 근육이 너무 많이 이완되어 도무지 목을 가눌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목을 지탱해 주는 목대를 통해 목을 간신히 목을 가누기도 했는데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의 모든 부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걸음도 걷지 못하고, 운전도 할 수 없었으며, 치아도 모두 솟아 먹기도 어렵게 되었다. 체중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많이 빠졌으며 사무실도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투약하는 의사의 처방이 미국에서 맞은 것도 특별한 효과가 없었다는 말에 적정량 2배 이상의 약물을 처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목뿐이 아니라 온 몸의 근육이 이완되어 흐느적거리며 나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더니 열심히 치료하면 할수록 점점 어둡고 험난한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불안과 초조한 마음으로 두려움에 쌓이기 시작하였다. 정신적 의지는 점점 쇠약해지고 20여 년의 기독교 신앙을 통한 믿음도 약해져만 가게 되었다. 지금껏 조금의 의심도 없이 열심히 믿어왔던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다는 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내 신앙은 하나님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단 말인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인과응보(因果應報)적인 결과로 죄에 대한 벌로 다가오기 시작하며 마음속에 강한 죄의식만 쌓여가고 있었다.
희망의 서곡 제1장 '양평뉴스타트'
이러한 절망가운데 허덕일 때 한 모임의 같은 회원으로 알고 지내던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백혈병이었는데 치료를 목적으로 이상구박사가 지도하는 위마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나의 어려운 형편을 듣게된 그는 나에게 강권하며 꼭 위마에 갈 것을 추천하였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렇게 많이 발전한 현대의학으로도 방법이 없는데 위마 이상구박사에게 가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는 생각과 함께 한 쪽 귀로 흘려 보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3박 4일의 짧은 기간동안 가까운 양평에서 이상구박사의 세미나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당시 나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던 처지였기에 마지막 희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양평 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다.
양평 프로그램이야말로 나와 나의 아내에게는 정말 너무도 값진 체험이었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귀중한 기회였다. 의학적인 희망의 메시지는 물론이었고, 지금껏 지내온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의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던 치유의 길을 분명하게 정할 수 있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적인 두려운 하나님에서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다가오게 되었다.
당시 양평 프로그램에는 약 250여명의 참가자들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이박사와 개인면담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상담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며 기회를 구했다. 별도의 시간을 배정 받기는 힘든 상황이었기에 질문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메모지로 전할 마음으로 질문을 준비하였다. 다음날 강의를 마치고 목대를 감은 상태로 다가가 이박사의 팔을 붙잡고 간절한 나의 사정을 짧게 이야기하며 메모지를 전했다. 이박사는 자리를 권하며 친절하게 상담에 응하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사람은 나의 아내였다. 나는 본래 대단히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이런 행동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같은 용기를 냈다는 것은 그 만큼 내 사정이 절박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상담을 통해 나의 사정을 이야기 하며 나같은 병도 회복될 수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이박사의 대답은 “물론 회복될 수 있으며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T-임파구가 자살하고 싶은 상황입니다”라는 말이 나의 모든 생각을 바꾸게 되었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다. 이제껏 나의 증상은 외과적인 문제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박사의 설명을 통해 나의 무의식 속에 작용하는 내면의 문제들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내와 나는 생명적인 기쁨을 안고 양평을 떠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모든 것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내와 같이 위마를 가기로 결정하는데는 순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고 위마 제35기 정규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다.
희망의 서곡 제2장 '위마 뉴스타트'
막상 위마를 가기로 결정했더니 뜻밖의 어려움이 다가왔다. 병원이나 교회에서 나를 사랑하는 이웃의 많은 분들의 한결 같은 중론(衆論)은 내가 비행기를 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위마에 도착하기 전에 어려운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를 받으면 받을수록 나의 마음은 더욱 위마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위마를 가다가 죽더라도 나는 위마를 가겠다는 강한 결심에 만류(挽留)하던 교우들은 특별 기도회로 모임을 이루어 기도해 주었다.
지난 1년 8개월 동안 긴 터널의 어두움 속에 방황하며 헤매던 내가 위마에 도착하니 고통의 터널을 빠져 나온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제야 올바른 길을 찾게 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놀라운 일은 당장 도착 후 첫 날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 강의를 마친 후 산책을 하는데 12000걸음을 걷게 된 것이었다. 나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 난 것이다. 불과 얼마 전 양평에서는 2000걸음을 걷고도 지쳐 쓰러질 정도였는데 이렇게 많이 걷고도 큰 이상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모든 근육이 이완되어 몸을 조금만 움직이거나 기침만 해도 온 창자가 딸려 오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곤 했는데 피곤한 증상이나 가슴에 이상증세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위마 뉴스타트 생활을 10여 일 지낸 후에는 아내와 마주보면 눈물짓고, 한숨짓는 대신 웃음 지으며 노래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 왜 그토록 위마에 오고 싶었었는지 이제 조금씩 이해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박사의 강의를 통해 유전자를 배우게 되었고, 그 유전자가 회복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도 깨닫고 보니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가 주시는 생명의 에너지가 어떻게 나의 손상된 근육유전자에 힘을 주게 되는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거듭되는 강의를 통해 펼쳐지는 과학의 세계, 의학의 세계,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세계가 이처럼 아름답고 오묘한지를 배우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 향기 가득한 위마의 산책길을 걷자니 왜 그리 눈물이 흐르는지,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다. 내가 움직여도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내 몸의 근육이 되살아나서 나의 병든 세포들이 완전히 회복되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나의 병을 고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제는 햇빛이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아내와 함께 걷는 산책길에 즐겨 암송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말라기 4장 2절의 말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아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상은 1996년에 처음 뉴스타트를 시작하고, 위마에 참가하여 간증했던 수기(手記)였다.
발병한지 8년이 지난 지금 이들 부부의 삶의 모습에서 어둡고 두려웠던 지난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지은, 주형)과 함께 행복 속에 묻혀 살고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회복되어 이강범씨는 정상적인 사업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부인 신정자씨는 남편의 회복에 감사하면서 정기적으로 사회 봉사활동에 자원 봉사자로 참가하여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오늘도 열심히 봉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온전히 회복된 후 몇 년은 잠시 뉴스타트 생활을 등한히 하고 외도(?)도 해 보았다지만 결국 진정한 뉴스타트 생활만이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건강한 삶을 위해 오늘도 힘찬 발걸음을 내 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