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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7 15:06

내가 발견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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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렸을 때에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이야기를 공포가 느낄 정도로 자세하게 들은 적이 있다. 또한 중세 암흑기에 비참하게 죽어갔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어린 나의 마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겪으셨던 그 고통과 이러한 순교자들이 견디어야 했던 그 비참함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다. 사실, 많은 순교자들이 당했던 고통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것보다도 더 심했으며 길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그 고통과 수치와 외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순교자들이 죽을 때에는 그들의 친구들이나 잘 아는 누군가가 그들의 옆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응원하여 주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십자가를 두고 모두 도망갔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도 그렇게 큰 차이점을 주지 못했다. 이와 비슷한 외로움과 거절과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은 순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나 다 그들이 착한 사람이었다면 그들이 맞을 밝은 죽음 저편의 세계를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배운 바 대로는 만약 착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하늘에 가서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이었다면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는다고 알았다. 예수는 당연히 착한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예수께서 죽으신 다음 곧바로 하늘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과 즐거운 주말을 보내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도 “오늘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처럼 보였다.


예수께서는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시고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께서 그 사이에 하늘에 가셨다 오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예측은 예수께서 그 고통을 더 쉽게 견딜 수 있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어떠한 확실한 영광과 행복이 앞날에 있을 것이 확실하다면 인간은 초인간적인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고 있는 특별한 영광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고민하였다.


더욱이 예수께서 겪으셨던 육체적인 고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모든 고통의 시간은 12-15시간 이내에 끝이 났다. 그렇다고 내가 이러한 고통의 시간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순교자들이 더 긴 시간동안 더 큰 고통으로, 또한 곧바로 하늘에 가서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이 순교를 당했던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 보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고 있는 특별한 영광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감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그 십자가에서 내가 깊은 감사를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들은 바 대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이에 영광을 돌리고 특별하고 심오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감흥을 느껴야만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며 울기도 한다. 나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한 말씀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없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감동 받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 보았으나 헛된 일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어떤 풀 수 없는 실마리에 묶여져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장래에 어떠한 일이 있을 것을 아셨으므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처럼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내 생각 속에 머물렀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아셨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과 다시 돌아갈 것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이 땅의 육체적 고통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했어...”


나는 어렸을 때 세상에서 가장 이름난 부자 중 하나였던 헨리 포드에 대한 책을 읽은 것을 기억한다. 그 유명한 자동차 회사의 건립자인 헨리 포드는 어느 날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한 친구와 함께, 그날 따라 제일 작고 싼 차를 타고 어느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싸구려 자동차가, 가난한 사람들이 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경험하는 것처럼, 갑자가 길 한가운데서 망가져 서 버렸다. 포드는 시골 자동차 수리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불편한 시간이었지만 헨리 포드는 그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고 적고 있다. 나는 그 때 포드가 그 망가진 작은 차를 꼭 고쳐야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라도 회사에 전화해서 Lincoln과 같은 좋은 차를 보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이러한 사실이 포드로 하여금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만약 보통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면 그 기분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리스도도 이 같은 상황에 있지 않았는가? 나는 스스로 변론하였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3) 하신 것은 바로 헨리 포드의 자동차가 고장났을 때의 상황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총알이 더 많이 있는 군인이 하나도 없는 군인보다 더 용감할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나를 혼란케 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남겨 두셔서 내가 그리스도께서 내게 하신 일을 잘 이해할 수 없게 하셨는가? 나는 고민하게 되었다. 그냥 내가 그 사실을 믿는다고 해 버릴까? 아니면 내가 어떤 중요한 감흥을 느낀다고 해버릴까? 내가 느낄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나는 구원받기를 열망하였지만, 동시에 나는 진실되고 싶었다. 내가 진정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작가들과 강사들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늘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나에게 위안이 되기보다는 더 큰 혼란을 주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바울을 포함한 예수의 제자들의 마음이 십자가를 통하여 깊은 감동과 변화를 경험하였다. 어떤 놀랄만한 현상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까지도 고통받기를 자초했으며, 울거나 슬퍼하기는 커녕 그들이 받는 고통과 박해와 모욕과 불편함을 즐겁고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에게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이 있었다. 아마 이것을 나는 하늘에 갈 때까지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를 괴롭힌 것은 내가 만약 그것을 지금 갖지 못한다면 나는 하늘에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렇게 희망 없는 쳇바퀴만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충고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당신과 같이 있지 못해서 도와줄 수 없어 참 안됐군.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십자가에 대하여 특별한 감흥을 느껴야만 하늘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냥 단순히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받아들기만 하라고. 이것은 단순히 보험카드에 싸인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간단한 것이야. 눈물이나 어떠한 감정도 싸인하는 일에 필요하지 않아. 그래도 싸인하는 동시에 당신은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받는 거야.”


내가 이러한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의 만족도는 예수의 제자들이 경험한 그 불타는 신앙과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경험하신 그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의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린도후서 11:25-30).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같은 믿음은 푹신한 교회 의자에 매주 앉는 것도 힘들어 한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33,27). 만약 누구든지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섬기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내 마음에 깃든 음성이었다.


십자가의 의미를 감추어 버리는 것


사람이 죽을 때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상태로 살게 된다는, 영혼은 절대로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가르침은 큰 오류이다. 단순히 비타민이 부족하여 어떤 병이 걸리는 것처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혼 불멸적인 사상은 내 마음에 복잡한 혼란을 만들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죄를 지을지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하였다(창세기 2:17 참고). 지금도 사단은 우리에게 “너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4)고 유혹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어떤 인간도 결코 완전히 멸망 받을 수 없어. 영혼은 자연적으로 불멸한다고.”


이러한 사상이 이방인들의 종교의 기본사상이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기독교에 퍼져나가 이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겉으로 볼 때 이러한 생각이 별 나쁜 결과를 끼친다고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여 보라. 이 사상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하신 로마서 5:8절의 말씀과 대치된다. 왜냐하면 영혼불멸설 안에는 실제적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사단이 우리에게 이 사상을 통하여 속이려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겪으셔야만 하였던 경험은,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릴 것도 없고, 포기해야 할 것도 없으며, 그래서 참기에 충분하였다고 사단이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희생은 어디에 있는가? 희생은 존재할 수 없다.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쇼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다. 나라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전쟁 용사들의 죽음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게 십자가를 만들어 버리는 사상이 바로 죽음이 없다는, 영혼 불멸의 사상인 것이다.


십자가가 주는 진정한 의미


그리스도께서 경험한 십자가의 고통은 그 어떤 육체적 고통이나 순교자들의 경험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는 어떠한 수치나, 억지로 믿어야만 하는 짐이 없다. 이사야서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죄악”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죄악은 우리로 하나님과 분리되게 만들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하였다(이사야 59:2). 죄는 우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빼앗기게 하였으며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구주께서는 진정으로 우리들의 죄악을 자신에게 옮겨놓으셨다. 이 의미는 죄악이 갖는 모든 죄책감과 외로움, 완전히 버림받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이 멸망 받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사형선고 받은 죄인의 처절함을 모두 느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시킨 요소들이었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정말로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부르짖음이 영화 속의 배우가 극적인 표현을 하기 위하여 꾸미는 연극과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예수께서 버림받았다는 사실로 울부짖었을까?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24).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그의 어깨에 우리의 짐을 지시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마음과 영혼 깊숙이 우리의 죄를 지셨다. 그의 모든 신경조직에, 그의 마음과 영혼에 우리의 죽음의 죄를 지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


예수께서는 죄인이 아니셨다. 그는 죄 없는 분이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갈라디아서 3:13). 죄와 저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지셨던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만약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시고, 죄의 저주를 받으셨다면, 그는 죄의 결과가 주는 고통도 경험하셔야만 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브리서 2:11).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받으신 그 죽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두 가지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으로 “잔다”는 의미에서의 죽음 (요한복음 11:11,13 참고)을 말하고, 두 번째 죽음은 완전한 죽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11, 20:6, 21:8절에 나오는 이 두 번째 죽음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며, 모든 빛과 즐거움과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하신 그 죽음은 바로 이 두 번째 죽음이었다. 영원히 이 땅과 온 우주에서 사라져 가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거나 창조함 받을 수 없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상태로 가버리는 죽음이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브리서 2:9). 예수께서는 인류 모두가 각기 당하여야할 그 죽음을 맛보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죽음은 우리가 늙어서 죽는 그러한 죽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 한번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만약 그들이 죄를 짓는다면 받을 것이라고 말한 그 죽음을 당하셨다. 이 지구에 그 동안 살았던 수 천억의 인류 개개인의 모든 죄의 결과를 마음에 지시고 한 사람의 죄책감이 아니라 수 천억 명의 죄책감과 그들의 불안함과, 희망 없음을 모두 느끼시며 영원한 죽음을 당하시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브리서 2:17,18).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로부터 완전히 가려졌다. 희망도, 빛도 두 번째 죽음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시 창조되는 부활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당하셨으므로 더 이상 부활을 기대하거나 용서를 바랄 수 없었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의 소망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맛보기에 부적합하였을 것이고, 진정으로 자신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애원하실 때에 그의 인성은 움츠려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8,39). 그리스도께서 마셨던 그 잔은 어떤 인간도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것이었다. 실제로 우주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셨다.


소름끼치도록 두렵고 절망적인 두 번째 죽음을 온전한 정신으로서 경험하신 그리스도. 그의 손을 찌른 못도, 그의 뚫어진 발도, 매서운 채찍도 그를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끼실 수 없을 정도로 그 마음의 고통이 극심하셨다. 그를 죽인 것은 겟세마네부터 흘리시기 시작한, 피땀 흘리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편 69:20). 


이 땅에서 사신 모든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부활에 관한 확신이 있으셨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보실 수 있으셨으며, 이러한 영광의 햇빛 아래서 마음이 움츠려들 수 있는 어떠한 큰 장벽도 없었다. 심지어는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가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였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즐거운 확신 속에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곧 이러한 감흥은 사라지고 예수께서 마셔야 할 그 잔이 그의 몸과 마음을 침투해 들어왔다. 급속한 변화가 그에게 이르렀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마 27:42, 40). 그리스도께서 마신 그 쓴잔은 이렇게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구원하시려 왔던 바로 그 사람들로 인하여 더욱 쓰게 변하였다. 십자가 위에서 이러한 말씀을 들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 번 내려와 봐!” “하나님이 왜 너를 구원해주지 않지?” 그리스도의 손은 넓게 벌려져 나무에 박혀 있었기에 귀를 막으실 수 조차 없으셨다. 그저 기도할 수만 있었을 뿐. 승리의 기도가 아니라, 희망의 기도가 아니라, 버림받는 울부짖음의 기도뿐. 하늘은 닫혔고 어느 누구도 그를 돕는 손길을 뻗히지 않았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치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2). 


여러 시간동안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짐과 싸우셨다. 구경꾼들의 잔인하게 모욕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 조금 후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하나님과 자신과의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음의 절망을 선고하셨다. 사람들의 모욕은 독에 담겨 가시 돋친 화살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일으켰으며,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가는 예수의 영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제 완전한 죽음이 그리스도의 영혼을 빼앗아 갔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감출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두움을 보내어 놀리는 군중들로부터 그의 얼굴을 숨기셨다. 오직 짙은 암흑 속에서 들리는 것은 갈바리로부터 메아리치고 있었던 그의 사라져 가는 적은 신음소리 뿐... 얼마나 잔인한 인간들인가? 또한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이신가? 아들의 마지막 고통을 숨기시는 그 자상한 사랑. 천사들조차도 보기를 허락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고통의 마지막 장면들, 영원한 죽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동정, 그러나 마지막 격정의 모습을 사람들로부터 숨기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의 법과, 구속과, 사랑의 원칙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었다.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지만, 사랑은 견디었다. 시편 22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겪으셨던 그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믿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지이다. 그러나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수난을 통과하실 때에 그 마음과 영혼은 오직 죽어 가는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서 채워져 있었다. 그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희망이 전혀 없었지만, 사랑은 그 영원한 죽음을 끝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순교자의 죽음이 아닌 죄인의 죽음을 택하시고, 희망 없는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그의 얼굴을 돌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하늘의 원칙을 기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을 위하여 구속의 경륜을 세우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하시고, 겟세마네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통과 모욕과, 아픔과, 외로움과 희망 없음과 싸우셨으며, 끝까지 변함없이 그 영원한 죽음을 받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셨다. 희망은 완전히 없어졌으나, 사랑은 이를 견디었다. 믿음은 움츠러들었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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