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작은 책”과 “보혜사“
서론 – 계시록 10장은, 십자가로 나타난 “영원한 복음”을 먹고 맛보게 하시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의 오심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 3년 반 동안을 그분과 함께 했던 그 제자들마저도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다 이해하거나 믿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에게도 십자가 보혈의 구원의 진리가 그들의 피와 살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연약하였다. 그들은 십자가 이후 실망과 무기력으로 의기소침하여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 가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제자들도 예수님의 살을 먹지 않았을까? 아직도 보혜사가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는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꼭 오셔야만 했다. 그리고 그 보혜사가 예수의 말씀, 곧 “생명의 떡”을 그들에게 먹여주셔야만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얼마 전에 “나의 살을 먹으라, 피를 마시라,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그토록 성령이 없어 무기력해진 제자들이 다시 어부로 돌아 가버렸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는 그들에게 친히 찾아오셨다. 그리고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20:22) 성령을 받지 않으면, 실제로 주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일지라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구원의 진리는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 주셔야만 제자들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만이 그들을 변화시키시어 복음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을 실제로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시어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떡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살을 먹는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말씀, 곧 생명의 떡, 곧 복음이 기록된 책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먹는다는 뜻이다. 이 책을 먹이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반드시 보혜사를 보내셔야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보혜사는 주님이 떠나가셔야만 오실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주님은 보혜사를 오시게 하시기 위하여 심지어는 당신이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까지 다음과 같이 특별히 말씀하셨다. 이만큼 보혜사가 오시는 일은 중차대한 일이다. 보혜사 없이는 복음을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요16:7]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러므로 하늘에서 온 힘센 천사는 보혜사 성령이시며,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된 작은 책, 곧 생명의 떡, 곧 예수님의 살을 먹이려고 오신 것이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본론 - 하늘에서 온 힘센 “천사”는 누구인가?
계10: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이후,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다.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재림 때에는 천사들과 함께 공중에 머물기만 하시지 땅이나 바다를 밟지 않으실 것이다.(살전4:17)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 온” “힘센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밟고 서 있다. 그러므로 그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밟고 있는 몸을 가지신 인간 예수님일 수가 없다. 분명히 예수님을 상징하는 천사이다. 바울은, 천사는 영(spirit)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히1:14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그런데 바로 이 “영”(spirit, 천사)는 몸을 가지신 인간 예수님을 상징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구름을 입은 것,(마24:30, 행1:9, 17:5, 계1:7) 머리 위의 무지개, 해 같은 얼굴,(계1:16, 행17:5) 불기둥 같은 발(계2:18)은 영(천사)이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영인데 보통 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영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영, 곧 하나님의 영(성령)이심이 다음의 말씀들로 증명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동일한 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롬8: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구약 선지자들의 마음 안에도 “그리스도의 영”이 계셔서 그분이 오실 때와 시기를 증거 하였다고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벧전1:11 그(선지자)들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미리 증거 하실 때, 그 “영”이 어느 때, 어떤 시기를 지시하시는지 탐구하던 것이니라.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성령을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벧전1:12 그들이 행한 사역들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임이 그들에게 계시되었고, 이것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으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이제 전해졌으며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니라.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계10:1)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 곧 예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보혜사)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계10:1) =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보혜사)
“작은 책”은 무엇인가?
계10:2 그 손에 펴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힘센 천사가 보혜사 성령이라면 그 “작은 책”은 복음서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혜사를 보내시는 목적 자체가 복음을 깨닫게, 믿게 하시어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책”에 대한 더 깊은 설명
성경이 말하는 책은 두루마리이다. 두루마리 책이 펴져 있다면 두 손이 모두 필요하다. 만약 한 손 안에 두루마리가 펴져 있다면 그 두루마리는 작은 책임이 분명하다. 성경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열 수 있는 “하나님의 한 손 안에 있는 작은 책”(계5:1,6:1,10:2, 겔2:10)이 세 곳에 등장한다. 이 펴진 세 책은 모두 하나님의 한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세 책들은 모두 “작은 책”들(겔2:9, 계5:1,계10:1)이다. 그리고 이 세 “작은 책”들은 다음과 같은 “7 가지 공통점”들이 있다.
1, 하나님의 한 손에 있다.(겔2;9)(계5:1)(계10:2)
2, 펴진 책이다.(겔2:10)(계6:1)(계10:2)
3, 안팎으로 썼다.(겔2:10)(계5:1)
4, 먹으라는 책이다.(겔3:2)(계10:10)
5, 입에서는 달콤하다.(겔3:3)(계10:10)
6, 사자(Lion)의 소리 같다.(계5:5)(계10:3)
7, 우레 소리가 있다.(계10:3)(계6:1)
계10장의 “작은 책”은 위의 모든 7 가지의 공통점 중에, “안팎으로 썼다”는 점만 언급이 없을 뿐 다른 6가지의 공통점은 모두 가지고 있다.
에스겔이 본 복음 ⇒ 승천하신 예수께서 복음 책을 열다. ⇒ 완전히 열린 복음(보혜사)
(에스겔서) (계 5장) (계 10장)
예수님의 별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계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말씀은 책이다. 예수께서 “나의 살을 먹으라”는 말씀은 “말씀”을 먹으라는 뜻이며, 말씀을 먹으라는 것은 결국 책을 먹으라는 뜻이다.
1, 하나님의 한 손에 있는 책 - 에스겔이 본(겔2:8)
겔2:9 내가 보았더니, 보라, 한 손이 내게 뻗쳐졌는데, 보라, 그 한 손안에는 한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겔2: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쓰여졌는데 그 안에는 애가들과 애곡과 화(재앙)가 쓰여져 있더라.
겔3:1 또 그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네가 본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에 말하라." 하시기에
겔3:2 내가 내 입을 벌리니 그가 나로 그 두루마리를 먹게 하시고
겔3:3 내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로 먹게 하고 네 창자를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그것을 먹었더니 그것이 내 입에 꿀처럼 달더라.
보았다 - 한손이 나타났다. - 작은 책을 보았다 – 먹었다 – 달았다.
2, 하나님의 한(오른) 손에 있는 책 - 요한이 본(계5:1)
계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계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계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 계10:2,3절의 작은 책과 일곱 우레와 일치한다.
3, 보혜사 성령의 손에 있는 책 – 요한이 본 책
계10:2 그의 손에는 작은 책이 펴 있고 오른쪽 발은 바다를, 왼쪽 발은 땅을 밟고서
“열려 있는 작은 책”, 보혜사 성령의 손에 있는 작은 책은 본래 하나님의 손에 있었던 인봉된 책이었다.(계5:1) 이 책이 보혜사 손에는 열려 있는 이유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그 인봉 된 인을 떼시고 여셨기 때문이다.(6:1) 그리고 보혜사 성령께서는 그 열린 책을 손에 들고 오신 것이다.
사자(예수)처럼 외치신 “일곱 우레”는 보혜사 성령의 음성으로만 깨달아 알고 믿을 수 있는 완전한 구원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성령을 거부하는 자는 깨달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보혜사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그 내용이 열려 있지만, 성령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작은 책이 열려있을지라도 인봉 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작은 책”은 복음서, 곧 새 언약이다. 큰 책은?
작은 책이 있다면 큰 책이 있을 것이다. 큰 책은 모세 오경(율법)과 시편과 선지서이다. 율법, 시편, 선지서를 통털어 방대한 “큰 책”을 구약이라고 부른다.
[신9:9]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이 구약 책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고(요5:39)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스스로 율법의 끝이 되셨다. 그리고 새 언약을 주셨다.
출24:7 모세가 (옛)“언약서”(율법책)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신31:26]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수23:6]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구약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옛 언약” 또는 ”옛 계명“이다. 십계명은 ”옛 계명“이며 동시에 ”옛 언약“이다. 모세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언약의 돌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약속(언약)들을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율법, 곧 옛 언약(옛 계명)의 끝이 되셨다. 큰 책(구약)의 끝이 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새 언약(새 계명)을 주셨다. 새 언약(신약, 복음서)는 그 큰 구약(옛 언약)책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완전케 하시고 요약하신 “복음서”(새 언약)라는 작은 책이 되신 것이다.
롬10:4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느니라.
그리고 부활하셨다.
예수님도 구약에 아무라 많은 율법과 방대한 양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글이 있을지라도 작고 간단한 새 계명 두 개 속에 모든 구약의 율법(언약)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새) 계명이 온(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도 바울도 동일한 뜻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롬13:9 그것은 "너는 간음하지 말지니라,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안식일 계명도 포함)이 있을지라도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가운데(모든 계명과 율법들이) 다 들어 있음이니라.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구성된 큰 책, 곧 구약(옛 언약 – 옛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작은 ”복음서“(작은 책),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마지막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율법 그 자체였다.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바다와 땅의 왕이 되셨다. 그분의 손에는 꿀같이 달콤한 복음과 함께 새 언약(새 계명)이 담긴 “작은 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셨다.(계5:7) 그분은 그 작은 책의 인봉을 친히 떼시고(계6:1) 그 열린 “작은 책”(복음서)을 높이 들고 온 세상을 향하여 사자처럼 외치셨다. “열린 사 복음서”란 그분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는 복음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작은 책”은 더이상 구약시대의 유대인만을 위한 율법책과 선지서 같은 큰 책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유대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하여 보혜사를 보내시어 사자처럼 외치게 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선지자이며 위로자였던 노아에게 주셨던 구원의 약속(언약)을 모세를 비롯하여 침례 요한의 때까지 무려 2300여년 동안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반드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곧 구원의 언약을 기록한 “큰 책”, 곧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으로 구성된 구약(옛 언약)이다. 이 약속들은 십자가로 지켜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옛 약속, 곧 “옛 언약”이 되었다. 이 “옛 언약”의 책은 실로 방대하며 총 1331쪽으로 구성 되었기 때문에 두루마리로는 명실공히 “큰 책”이다.
마침내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어 이 “큰 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약속)을 십자가로 친히 다 이루시고 복음을 완성하셨다. 이 온 우주에서 최초로 나타난 십자가의 피로 완성된 복음이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복음은 성령이 주신 선물인 믿음으로만 그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약속(새 언약)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이다. 이 책은 오직 네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만을 기록한 책이다. “큰 책”에 비교하면 186쪽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이다. 예수의 육성으로 친히 하신 말씀이 기록된 책이다. 책은 말씀이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곧 책(말씀)이시며 사랑이시며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작은 책의 말씀은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이 작은 책, 곧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셔야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은 책은 먹을 수 있는 책이며, 또 반드시 먹어야 하는 책인 것이다.
작은 책 = 그리스도 = 복음서 → “먹는 책”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큰 책(율법, 선지서, 시편) = 성경(구약) = 십자가, 예수 = 복음서 =작은 책(새언약)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십자가로)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리고, 주님은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어 제자들이 위로부터 능력을 받게 하시고, 모든 족속이 복음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혜사 없이는 그 누구도, 제자들일지라도 위로부터 능력을 받을 수가 없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침례 요한도 주님과 보혜사의 오심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왜 작은 책(복음서)는 열려 있고, 보혜사는 땅과 바다를 밟은 모습일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님의 말씀, 곧 완전한 복음을 온 세상(땅)과 온 족속(바다)에게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보혜사 성령이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다. 보혜사가 오시기 전에는 이 복음(책)은 제자들에게도 펴지지 않은 닫힌 책이었다. 이제 보혜사는 이 복음(복음서)을 밝히 전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하늘에서 인을 떼고 열어주신 복음서를 한 손에 들었다. 그리고 온 천하에 전하시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계시록 10장의 시기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보혜사께서 오신 오순절과 사도행전의 시기이다. 승천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재림 때뿐이다. 재림 때는 책을 가지고 오시지 않고 예수님이 땅을 밟지 않으신다.
계시록 10장 해석에 대한 안식일 교회의 오류
그런데 안식일 교회는 그 힘센천사는 실제로 그리스도이며, 예수께서 친히 손에 드신 “작은 책”은 다니엘서라고 가르친다. 재림하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니엘서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이 땅을 다시 친히 밟으시는 모습을 계시로 보여주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그 작은 책이 다니엘서일지라도 성령이 가르치실 것이지 예수님이 직접 다니엘서를 들고 재림운동을 예언하고 계신다는 주장은 곤란하다.
이런 가르침은 오순절과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오심이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필수적이며 핵심적인 구속사적인 사건인지에 대하여 안식일 교회가 전혀 관심이 없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또 안식일 교회는, 예수께서 작은 책인 다니엘서로 재림운동을 세상에 알리고, 그 재림운동을 통하여 그 다니엘서를 들고 계신 예수께서 다니엘서로 재림날짜를 계산하여 사자처럼 외치시며 세상에 알려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재림날자는 다니엘서로 예언될 수가 없음이 분명히 나타나 버렸다. 그러므로 계10장의 힘센천사는 재림운동을 알리고 재림날짜를 알려주시는 예수님이라는 안식일 교회의 주장은 이미 윌리엄 밀러의 실수로 물건너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재림날짜라고 생각한 날이 엉뚱하게도 예수님이 지성소로 들어가 조사심판을 시작한 날로 둔갑해버렸다. 그렇다면 힘센천사가 재림운동과 재림날짜를 예언하는 그리스도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안식일 교회가 스스로 인정한 것이 된다. 사실 예수님도 알지 못하신다고 분명히 강조하여 말씀하신 재림날짜를 예수님의 손안에 있는 다니엘서로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 것부터도 주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어처구니없는 반성경적인 계시록 해석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보혜사 성령의 소리가 “사자의 부르짖음” 같을까?
계10:3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예수님의 별명이 바로 유다 지파의 “사자”(Lion)이다.(계5:5), 보혜사의 가르침은 예수님(사자)이 가르치신 복음이다. 그러므로 보혜사가 가르치는 복음의 소리는 마치 사자 소리, 곧 예수님이 부르짖으시는 소리 같은 소리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일곱 우레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우뢰”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말씀)이다. 시편 기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시77:18 회리바람 중에 하나님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가르쳐 주셔야만 인간이 그 내용(의미)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요한에게는 성령께서 그 내용을 알려 주었고 요한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할 수 있었다.
요12:27 이제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시여, 이 시간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이 시간까지 왔사옵니다.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그러나 아직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전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단순히 “우뢰가 울었다”, “천사가 예수께 말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요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음성, 곧 우뢰 소리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 자들에게 친히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주셨다.
요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음성”은 나 때문에 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난 것이라.
“너희를 위하여 난 음성”이란 “너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말씀)이었다는 설명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들려(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시고 죽으시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구원이며, 동시에 믿지 않는 자와 사단의 심판이라는 내용이었다.
요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힘센 천사”, 곧 보혜사 성령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그 목적은 제자들이 기록했던 말씀들, 곧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셨던 말씀들이 기록된 “복음서”를 열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의 구원의 경륜과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이해시키시고 믿게 하시어 또 실제로 영적인 체험을 시키시기 위하여 보혜사께서 보내심을 받아서 하늘로부터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친히 증거하시어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의 손에 있는 작은 책(복음서)은 반드시 보혜사 성령만이 죄인들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고 증거 할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열어주신 복음서(계5:1,6:1)이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보혜사만이 복음을 직접 증거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확실히 하시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그리고 “일곱 우레”의 “일곱”은 “완전”을 상징한다. 우레는 온 세상을 흔드는 하나님의 소리, 그러므로 “일곱 우레”는 유대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졌던 구약(불완전한 복음)이 아니다. “일곱 우레” 진정한 뜻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곧 십자가와 부활로 마침내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한 복음, 곧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이방 족속들에게도 전해야 할 ”영원한 복음“(계14:6)을 뜻한다.
일곱 우레 – 완전한 외침(말씀) – 영원한 복음 – 온 세상을 위함
”일곱 우레“를 기록하지 말라는 이유는?
불완전했던 구약(옛언약, 율법과 선지자)는 종이에 기록하여 주셨다. 그러나 ”십지가로 완성된 “새 언약”(영원한 복음)으로서의 “일곱 우레“는 기록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성령이 주신 믿음을 받아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주신 구원을 믿는 자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직접증거 하시(롬8:16 히10:15 요일5:7, 계22:18)기 때문이다.
행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그리고, 믿는 자들의 마음(판)에 기록하실 것(고후3:3)이기 때문에 따로 종이에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고후3:3 또 너희는 우리가 섬긴 그리스도의 편지임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육신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사단이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주었다.(요13:2)고 요한이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사단이 넣어준 이 생각을 유다가 거부할 할 수 있는 능력도 성령께서 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그의 선택대로 성령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로 유다는 사단이 넣어준 생각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의 마음이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 가버리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싶은 마음, 원수를 용서하고 싶고,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믿을 수 있게 하시는 믿음(생각) 등은 성령이 직접 우리들의 마음에 넣어주시고 증거 하셔야 한다. 이런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적 지식을 뽐내는 지식인들은 거부할 것이나, 어린아이들 같은 순수한 자들은 받아드릴 것이라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셧다.
마11:25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이런 일들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예레미아 선지자도 출애굽 때에 광야에서 주신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 곧 “일곱 우레”를 마음판에 기록하여 주실 것(렘31:33)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렘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옛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이 “새 언약”은 믿는 자들의 마음(판)에 기록하시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법, 곧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하시고 원수도 사랑하시는 십자가의 법, 곧 사랑의 법이다.
[렘31: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에스겔 선지자도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여 바벨론에 노예가 되어도 계속 썩어가며 범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었다.(겔36: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구해 내신다. 그들의 구원은 완전히 은혜였다. 그리고 고국으로 데리고 오신다,(겔36:24) 그들이 회개하고 성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그다음 그들을 성령으로 깨끗이 씻어 성화시켜 주시면, - 다음 말씀을 보자.
겔37:23 ~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렇다!, 먼저, 구원하여 정결케 하신다는 말씀이다. - 먼저 “정결케 되면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성령은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다.
[겔37:27]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사도 바울도 새 언약을 보혜사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기록하실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히8:10]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그렇다, 일곱 우레(영원한 복음)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오직 보혜사 성령만이 기록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만 그 영원한 새 언약의 복음이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곱 우레는 종이에 기록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기록하지 말고 인봉하라는 뜻은?
계10: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율법(옛 언약, 옛 계명)은 모세가 먹으로 책에 문자로 기록하였고, 하나님이 역시 문자로 돌판에 새기셨다. 그러나 일곱 우레의 완전한 복음은 성령께서 마음에 기록하신다. 보혜사 성령께서만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실 수 있고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도들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이 “작은 책”은 오직 예수께서만 친히 열어주신(계6:1) 완전한 복음서이며 그 복음의 내용은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는 일곱 우레가 되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들, 곧 성령을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인간의 온 영혼에 생명의 울림을 주는 사자(Lion: 예수님의 별명)가 부르짖는 것 같은 성령의 큰 소리이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복음이 전혀 마음에 울림이 없다. 성령을 거부한 그들에게는 복음은 아직도 인봉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아들여 마음을 열면 그 사자 소리 같은 일곱 우레, 곧 보혜사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그들이 성령의 음성에 마음을 열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사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3년 반 동안을 그분과 친히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 이해하거나 믿지 못하고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 가버렸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20:22) 이처럼 성령이 함께 하셔야만 복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하는 공부로는 절대로 성령이 주시는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삶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작은 책”(완전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을 죄인들로 하여금 먹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에서 내려 온 힘센 천사인 보혜사 성령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혜사가 오시는 일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모든 죄인들에게, 그 당시에도, 지금도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만이 먹고 맛보게 할 수 있는 일곱 우뢰(완전한 복음)는 글자로 기록한 것을 읽어서 지식적으로는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을 받은 자들만 직접 체험적으로, 영적으로 맛을 볼 수 있는 성령의 체험이다. 이 때문에 보혜사 성령만이 이 완전한 복음, 곧 일곱 우뢰가 기록되어 있고, 오직 예수께서만 인을 떼시고 열어주신(계5장, 계6:1) “작은 책”을 먹게 하실 수 있다. 보혜사만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떡)이신 예수님을 먹여서 체험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다. 이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작은 책”, 곧 일곱 우레(완전한 복음)는 인봉 되어 열리지 않은 책, 또는 단순히 의미 없는 천둥소리나 다름이 없을 뿐이다. 주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그 당시에 자신들의 지식만 믿고 성령을 거부하던 소위 지식인, 종교 지도자들(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말씀(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였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인봉된 말씀(책)이 되었다. 그들은 성령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성령을 받도록 강요하지는 말라라는 뜻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마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책(말씀)을 먹이는 일이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이 없이는 제자들마저도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체험할 수도, 성숙할 수도, 성화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 곧 진리의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 보혜사 성령은 반드시 오셔야만 했다. 그래야만 제자들이 그 작은 책(복음서)을 보혜사 성령(힘센 천사)로부터 받아서 입으로 씹어서 먹고 배에서 소화 시켜 성숙하고 성화 되어가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보혜사 성령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보혜사께서만 그리스도의 살(복음)과 피(생명)를 먹고 마시게 하신다는 말은 성도들이 실제 삶 속에서 오직 보혜사만이 복음의 말씀(그리스도)을 실제로 체험하게 하시고 변화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사실 예수님은 그분 자체가 말씀, 곧 책이시며,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6:58)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 말씀 = 책 = 생명의 떡 = 하늘에서 내려온 빵 = 일곱 우레 = 새 언약(복음)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곧 복음(서,책)은 그분의 살이며, 죽은 자(죄인)들이 먹어야 하는 하늘의 빵(떡), 곧 생명의 떡이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6: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6: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그렇다, 영원한 십자가의 복음은 그냥 지식적으로 배워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먹어야 한다. 먹어서 맛을 보고 그 자체가 나의 살과 피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제자들부터도 십자가의 복음의 단맛과 쓴맛을 완전히 소화하여 깨닫고 체험하여 온 세상에 십자가 구원의 복음, 곧 일곱 우레의 복음, 곧 보혜사 성령께서 외치신 “일곱 우레의 복음”을 사자(계5:5, 예수님의 별명)처럼 큰 소리로 전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요14: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위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이 기록된 책이 바로 천사로 오신 보혜사 성령의 손에 있는 책이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책,(겔2:8)이며 계시록 5장 1절,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인으로 인봉 된 책이다.(계5:1)
[요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보혜사 성령이 복음서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 하시어 이해시키시고 믿게 하실 것이다. 그 결과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십자가 중심적인 올바른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올바른 이해가 십자가 이전까지 율법적으로 오해되어 있었던 죄, 의. 심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세상을 성령이 책망할 것이었다.
[요16: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므로 보혜사의 손에 있는 펴진 작은 책(두루마리, 말씀)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이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며, 피를 마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생명(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6:55 이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임이라.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은 말씀(생명)을 먹는 것이요, 말씀을 먹는 것이 말씀이 기록된 ”책“을 먹는 것이며 말씀(살)을 먹는 것이 참된 양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며, 그분의 별명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계19:13]또 그(예수)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10: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이제 에스겔이 먹었던 책을 살펴 보자.
에스겔은 바벨론에 노예로 잡혀간 백성들의 선지자였다. 그들이 바벨론의 노예가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하고 사단의 거짓과 악을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예언의 말씀, 곧 십자가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에스겔에게 주셨다. 이 두루마리, 곧 책이 바로 에스겔서이다. 그 책은 에스겔이 언뜻 보기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일 뿐이었다.
겔2:9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 책 역시 하나님의 한 손에 열려 있는 책이었다. 두 손이 아니라 한 손에 있는 책은 역시 큰 책이 아니라 작은 책이었다. 하나님(성령)께서는 그 작은 책을 에스겔에게 열어 보여주신 것이다.
겔2: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은 하나님이 주신 그 애곡과 재앙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면서 너무나 두려웠고 슬펐다. 주신 말씀이 하나님의 형벌의 말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이 애곡과 재앙의 말씀을 먹여주셨다.
겔3: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에스겔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잘 씹었다. 깊이 묵상하였다. 성령께서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어 더 깊이 이해하게 하여 주셨다. 마침내 그 말씀이 그의 입에서는 꿀 같이 달았다. 그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 바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언약)의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십자가의 사랑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겔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러나 에스겔의 시대는 십자가 이전이었다. 그 시대에는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약속,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 시대였다. 특히 바벨론의 노예 상태에 있었던 상황에서는 이 구원의 약속의 단맛은 더 절실히 필요했다. 백성들은 이미 노예생활의 고통 속에 있었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사랑의 약속, 곧 구원의 언약, 바로 달콤한 맛의 약속이었다. 에스겔이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 기록된 책을 먹고 입에서 달콤함을 느꼈던 이유는 그가 그 재앙과 애곡의 말씀 속에 숨겨진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을 성령께서 맛보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에스겔이 이 단맛의 복음을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에스겔로 하여금 먼저 에스겔서의 단맛을 성령으로 맛보게 하셨던 것이다.
에스겔은 여기서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스겔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애가와 재앙의 말씀 속에서 이제 막 십자가 복음의 단맛만 성령으로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심각한 사단의 현실적인 핍박으로 고통을 당하는 쓴맛을 이미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은 주로 맛을 보는 과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먹은 영양소를 흡수하여 그 말씀이 나에게 피와 살이 되게 하는 곳은 아니다. 입을 지나서 배에 가면 더 이상 맛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배에 가서는 복음 속의 생명이 흡수되어 죽었던 나를 살리신다.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그리고 성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곳(단계)이다.
가리지는 누구인가?
그러므로 단맛만 전하는 자는 쓴맛을 체험하여 보지 못한 자이다. 쓴맛도 전해야 한다. 쓴맛은 입에서 달았던 복음이 뱃속에 들어가 실제로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내가 변화되는 아픔을 체험하는 과정, 곧 성화의 과정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성령의 체험이다. 그러므로 이런 복음의 쓴맛을 보지 못한 자들은 성령이 주시는 성화의 체험을 못해본 자들이며 사실상 그들이 맛보았다고 주장하는 단맛도 보혜사의 도우심으로 맛본 진정한 복음의 단맛은 아니다.
이런 쓴맛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가라지들이며, 또 혼인잔치에 오긴 왔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로 비유된 자들이다. 예복은 선물로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다. 이 옷은 성령이 입혀주신다. 이 예복을 받아 입어야만 내가 경건치 아니할지라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다.(롬4:5) 성령이 입혀주시는 이 예복을 받아 입는 것이 바로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확신(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이 예복(믿음)을 죄인이 받아 입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시점부터 그는 사단의 공격의 대상이 되어 핍박의 쓴맛도 함께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다음 말씀에서 ”자녀이면“이라고 강조하면서 자녀라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롬8:17 (조사심판 없이도)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환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단 맛 이후에 오는 쓴맛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이 단계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단맛의 단계이다.
그러나 단맛 다음의 단계는 쓴맛의 단계가 따른다. - 환난, 인내, 연단, 소망의 네 단계이다. 복음은 단맛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단맛을 본 자들에게 사단은 반드시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삼년 반 동안 실제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주님의 모습이,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연구하는 구약(율법과 선지서) 속에서 선명하게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구약 속에 예언되었던 그리스도와 그들이 실제로 보고 만졌던 그리스도가 더 확실히 그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혜사 성령은 영적으로 그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는 그 그리스도가 너무나 달콤했다. 구원의 확신과 함께 기쁨과 감사와 함께 생기가 넘쳤다.
이제, 오순절이 왔다. 달콤함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부터 사도행전의 승리와 고난 날들이 시작되었고 쓴맛을 보기 시작했다. 이 고난과 핍박의 쓴맛은 재림 때에 가서야 끝날 것이다.
영적 쓴맛은 ”내가 죄인(괴수)임을 더 절실히 깨닫는 맛“이다.
이 일곱 우레의 완전한 복음, 영원한 복음은 입에는 꿀 같이 달다. 그러나 뱃속에 들어가면, 곧 이 복음을 믿게 하신 성령이 성도들과 함께 하시게 되면, 그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비로소 내가 심령이 가난함을 깨달아 알게 된다.(마5:3) 그 결과 영적으로 애통하게 되고(마5:4) 바울처럼 자기가 죄인의 괴수임을 알게 되고,(딤전1:15) 그의 옛사람이 매일 죽어야 되는 죄인임을 알게 된다.(고전15:31) 이런 쓴맛을 본 결과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된다.(마5:6) 그와 동시에 사단의 극심한 핍박이 시작된다.(마5:10) 이것이 바로 ”작은 책“의 쓴맛이다.
죄인이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복음의 단맛을 본 후에 과거의 자신이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한 일들이 실상은 위선에 불과했으며 악하고 가증했음을 기억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에스겔과 욥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겔36: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욥은 자기가 알지 깨닫지 못했던 복음의 단맛을 마침내 맛보게 되면서, 그 복음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알지 못했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욥42:3 지식 없이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그러므로 나는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하였으니, 그것들은 내게 너무 경이로워서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욥42:5 내가 주에 대하여 귀로만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보나이다.
그리고 그가 과거에 의롭고 선행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 것이 가증스러웠음을 깨닫게 되면서 과거의 자기를 밉게 보게 된 쓴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회개하였다.
욥42:6 그러므로 내가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 - 쓴맛이다.
바울도 이 완전한 복음(작은 책)을 먹고 나니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확신과 함께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입에서는 너무나 달콤하였다. 그러나 성령으로 그 복음이 배로 들어가 소화된 후에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수 있는 새롭게 거듭난 인간이 되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바울은 사단과의 치열한 씨름을 하며(엡6:12) 달콤한 복음을 받은 결과로 고통스러운 쓴맛을 보고 있었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자기의 의로 충만했던 사울이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성령이 보여주시는 이런 자신의 곤고한 영적인 진면목을 결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그는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만 하는 죄인임을 절실히 깨닫고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신의 곤고함을 깨달은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고전15:31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지니고 있는 너희의 자랑으로써 단언하노니 나는 매일 죽노라.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엿다.
딤후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꿀맛 같은 복음을 맛본 후, 구원의 확신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쳤던 사도 야고보도 사단의 극심한 도전을 받으면서 다음과 같은 간증으로 성도들을 격려하였다.
약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복음을 믿음으로 받은 후에 이런 성령께서 죄인들의 영적 눈을 열어서 보여 주시는 자신의 가증함을 보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맛보는 그 영적인 쓴맛, 그리고 사단의 공격으로 말미암는 고통의 쓴맛이 없으면 십자가의 은혜를 더 갈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다. 사단의 핍박으로 인한 투쟁과 고통이 있어야 그 투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절실히 통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철저히 기도로 매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단의 핍박의 기간이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양육을 받고 성숙하는 복된 기간이 되는 것이다.
계12: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십자가의 복음(작은 책)을 받은 사도 요한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배웠던 율법(큰 책)을 통하여는 영적 달콤함을 느껴본 적이 전혀 없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고서야 복음의 달콤함을 체험하였다. 성령을 받은 그 후부터 요한도 사단의 핍박의 고통을 받고 밧모섬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 속에서 동일한 핍박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이 계시록의 말씀을 전하였다.
계시록 전체가 믿음과 소망으로 인내하는 쓴맛의 이야기,
애굽의 노예가 된 하나님의 백성이 달콤한 출애급을 맛보고 광야로 가서 즉시 쓴맛을 보고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계시록 전체도 복음의 단맛을 본 성도들이 볼 고통스러운 쓴맛에 곤한 계시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 쓴맛이 고통스럽고 지겨울지라도 그 쓴맛은 반드시 속히 오실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한 놀라운 부활, 곧 재창조로 인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 결과로 잃어버렸던 에덴의 안식이 회복되어 영원히 지속 될 갈바리의 안식일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일곱 교회”의 예언도 에베소교회의 달콤한 승리로 시작하자 마자 심각한 핍박의 쓴맛을 보는 서마나 교회를 거쳐 심각한 변질과 세속화 끝에 결국에는 예수께서 쫓겨나 문밖에 계신 절망적인 라오데게아 교회를 지나 재림하신다. 그리고 “일곱인”에서도 첫째 인을 떼시면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달콤한 승리, 초대교회의 승리로 시작된다. 그러나 둘째 인부터는 심각한 쓴맛이 시작되어 결국 재림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핵심 내용은 핍박의 쓴맛(계10:10)과 재림의 희망이다. 십자가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예수님은 승리하셨고, 또 보혜사를 보내셨다. 우리는 구원의 단맛을 보았다. 그러므로 사단은 핍박할 것이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시어 사단의 세력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성령으로 인쳐 주신(엡4:30) 하나님의 자녀들이라(엡4:30)는 믿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사단의 미혹과 핍박을 인내하며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핍박의 고통과 죄와 싸워 이기라는 격려의 말씀을 하나님이 보내시는 편지이다.
“작은 책”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는다는 뜻이다.(계10:10)
사실, 먹고 마시고 맛을 본다는 것은 실제로 체험한다는 뜻이다. 지식적으로 학습하고 분석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미신다는 말, 곧 작은 책을 먹고 맛을 본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의 맛, 그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게 한 성령이 주신 ‘믿음’의 맛, 그리고 그 믿음으로 받은 놀라운 구원의 단맛과 쓴맛을 실제로 삶 속에서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십자가의 복음,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음의 체험은 성령만이 체험시켜주실 수 있고 맛보게 하여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살을 먹는다는 뜻으로 주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너희 조상이 만나를 먹고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시니라.
그러므로 “작은 책”을 먹는다는 뜻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곧 예수님을 먹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그 완전한 복음을 성령으로 나의 온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게 하심을 뜻한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는 이유는?(계10:11)
구약 선지자들과 침례 요한의 때까지는, 곧 십자가 때까지는 큰 책, 곧 옛 언약(율법)은 마침내 오신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는 이 율법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큰 책(옛 언약, 율법)이 상징하던 그 상징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리고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친히 주신 복음의 새 언약(작은 책), 곧 “영원한 복음”을 주셨다. 이제 이 복음(작은 책)은 더이상 유대인들만을 위한 복음서가 아니었다. 이 죄의 온 세상 이방인들에게도 차별과 제한이 없이 이 영원한 복음은 전해져야만 했다,
이제 “온 율법(큰 책)의 완성”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작은 책(새 언약) 곧 십자가의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더이상 유대인들만의 율법이 아닌), 온 세상의 모든 죄인을 위한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이 작은 책의 십자가의 복음의 꿀 같이 단맛과 쓴맛 모두를 맛보게 하는 복음이야말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하여 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토록 완전한 복음(일곱 우레) 곧 “영원한 복음”(계14:6)은 이 세상 역사상 십자가 이후에 처음으로 전해지는 영원한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불완전했던 복음을 들은 유대인은 물론, 하나님의 복음을 전혀 몰랐던 모든 족속에게도 반드시 전해져야 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 영원한 복음을 온 족속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계10: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그러므로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은, 처음 주신 예언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오류를 다시 수정하여 예언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은 십자가 이전까지 유대인에게만 전하려 했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구약, 옛 언약) 속에 상징적으로 숨어 있었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나 옛 언약(구약)이 완성된 이후에는 더 이상 옛 언약은 전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이 영원한 복음(일곱 우레)는 모든 족속에게 전하여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이제 실제로 오신 “그리스도 자신”,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신 분을 상징하는 “작은 책”(완전한 복음), 곧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영원한 복음”, 곧 새 언약을, 유대인에게만이 아닌, 온 세상의 온 족속에게 새롭게 전하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곱 우레와 세 천사의 기별
하나님은 “일곱 우레”의 십자가로 완성된 복음, “영원한 복음”을 유대인들만이 아닌, 모든 민족과 족속들에게 다시 예언하기 위하여 마침내 하늘의 세 천사를 온 세상에 보내신다.
계14:6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사는 자들과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이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로 인하여 나타난 “영원한 복음”, 곧 하나님의 완전한 복음이 울려 퍼지자, 마침내 사단이 숨기고 있었던 율법주의적(행위주의적)인 가르침이 거짓이었음이 나타나고 말았다. 십자가의 은혜의 구원을 은폐해 왔던 사단의 거짓, 곧 바벨론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됨과 동시에 사단의 음모가 밝혀지면서 바벨론의 거짓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둘째 천사를 보내어 사단의 거짓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실 수 있게 되었다.
계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그리고 “반드시 속히 될 일”(계1:1), 곧 재림과 함께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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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박사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먹고 마시는 성찬의 의미도 함께 풀어지네요. 작은책은 먹고 인봉하지 않는 책이며 큰책에대한 인봉하라는 대조적 성경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