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사님.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박사님께선 말씀하시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십자가 강도나 집에 돌아온 탕자를 조사심판 교리대로 설명하면 강도나 탕자를 아들로 받아들일지 말아야 할지 먼저 조사를 하는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사심판이 아니며 주께서 십자가 강도에게 하신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구원은 주를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사심판을 알려면 먼저 주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갖고 태어나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하신 후에 31년 부터 1844년 까지 하셨던 성소 사업을 알아야 합니다. 1800년 동안 인자께선 아담 시대 부터 오늘날 살고 있는 사람들 까지 한명, 한명씩 차례로 불러서 돕는 방법을 모색하셨습니다. 그렇게 돕는 방법이 세워졌기에 아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인자의 도움을 받았고, 오늘날 살고 있는 박사님과 저도 인자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자, 이제 1844년 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께서 하시는 지성소 사업 (조사심판)이 뭔지 알아 볼까요, 박사님? 박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박사님의 따님은 (재판정에서 "이 사람은 이렇게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 모든 전과기록을 말소합니다"라는 판결을 내려 주었습니다. 전과기록 말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이 바로 의인들을 위한 조사심판입니다.
그분은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삶을 체험하셨어요.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 겪지 않으신 어떤 일을 겪어야 한다면 사단은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히 4:15)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값없이 제공되지 않은 능력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시험을 대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말씀하세요.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괴로움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고치시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의 특성과 그의 봉사의 본질을 명백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우리도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DA2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혹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아담은 아무런 죄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 몸과 마음에 충만한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덴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었고 날마다 하늘의 천사들과 교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단과 상대하시기 위하여 광야에 가셨을 때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4천 년간 인류는 체력과 정신적 능력, 그리고 도덕적 가치가 퇴보되어 왔어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퇴보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만 그는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시험에 정복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처지에 서지 못하셨을 것이며, 아담이 얻지 못한 승리를 얻을 수 없으셨을 거예요. 만일 우리가 어떤 점으로든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보다 더 혹심한 투쟁을 당한다면 그는 우리를 도우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는 온갖 연약성을 지닌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는 시험에 굴복할 가능성을 가진 인성을 취하셨어요. 우리는 그가 당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도 질것이 없어요. (DA117)
독에다 아무리 꿀을 발라놔도 독은 독일 뿐이고, 독은 먹으면 죽습니다.
조사심판에다 아무리 유사복음으로 화장칠 해봤자 조사심판은 조사심판일 뿐이고, 조사심판은 복음이 아닙니다.
토요일에 하루 쉬면서 누리는 불완전한 안식 말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의 완전한 안식을 맛보실수 있으시기를...